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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운영자 칼럼>유페생활 19년,광해군의 생명력
글쓴이 tntv 등록일 [2011.11.06]

<운영자 칼럼>

유페생활 19년,광해군의 생명력

 


사적  제363호  광해군묘(光海君墓)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비운의 왕, 파란만장의 군주로 표현되는 광해군,  조선왕조 제15대 왕이다.
 
33살에 왕위에 올라 48세에 폐위되어 67세에 생을 마감했다.  

광해군은 신하 이이반으로부터 반정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고변이 있어도 후궁과 연희를 즐기느라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반정군이 침입하자 광해군은 대궐 뒷문으로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숭었으나 곧 체포되어 서인으로 강등된 후 강화도로 귀양보내졌다.

광해군과 폐비 윤씨는 강화도 동문 쪽에, 그 의 외아들 내외인 페세자와 폐세자비는 강화도 서문 쪽에 각각 위리안치(圍離安置-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됐다.

울타리에 갇혀 살기 두 달쯤, 페세자가 울타리를 빠져 달아나려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고 폐세자비도 스스로 목슴을 끊었다.

이 소식을 들은 폐비 윤씨는 홧병을 얻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된지 1년 7개월만에 죽고 말았다.

광해군은 부인과 자식 내외를 모두 저세상으로 떠나 보내고 혈혈단신이 되었다.

광해군이 폐위된지 1년 뒤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불안한 인조는 그를 태안으로 멀리 귀양 보낸 뒤 난이 평정되자 광해도로 다시 옮겼다.

1636년 청나라가 처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인조는 광해군을 강화도 교동으로 옮겼다.

그동안 광해군은 죽음과 삶을 넘나 들었다. 반정세력의 끊임없는 위협과 인목대비의 복수심 때문이었다. 그는 겨우 겨우 구차한 삶을 유지해야 했다.

조선이 청나라에 완전히 굴복한 뒤 그의 복위에 불안을 느낀 인조는 더 멀리 제주도로 귀양보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19년 7월 10일자 기록에 광해군이 광화도 교동에서 제주도로 떠나던 날 남겼다는  비감어린 칠언율시가 보인다.

風吹飛雨過城頭(풍취비우과성두)
瘴氣薰陰百尺樓(장기훈음백척루)
滄海怒濤來薄幕(창해노도래박막)
碧山愁色帶淸秋(벽산수색대청추)
歸心厭見王孫草(귀심염견왕손초)
客夢頻驚帝子洲(객몽빈경제자주)
故國存亡消息斷(고국존망소식단)
烟波江上臥孤舟(연파강상와고주)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는 길
후덥지근한 장독 백척으로 솟은 누각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
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
나그네 꿈 자주도 제자주에 보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강화에서 태안으로 옮길 때 그를 호송하던 별장들이 윗방을 차지하고 그 아래채에서 재우는 모욕을 주어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제주도에서는 심부름하는 계집종이 '영감'이라고 부르며 앙탈을 해도 고개를 숙이며 한마디 말도 안했다 한다.

이형상의 <남한박물>에 따르면 제주에 유배 온 광해군은 제주 서성 안에 위리안치되었는데 "두문(杜門)하여 자물쇠로 봉한 후 도사 등 5인은 서울로 올라갔고 속오 유진군 30명이 윤번으로 수직하였다"는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19년 7월 10일자 기록을 보면 광해군이 죽자 당시 목사 이시방이 즉시 '열쇠를 부수고'문을 열고 들어가 예로 염빈하였다고 했다.

이로 미루어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난 뒤 유배생활을 하면서 외부의 세상과는 엄격히 통제된 유폐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제주도에 와서도 자연과 접촉하지 못한채 집에 갇혀 고독하게  샇아야 했다.

결국 광해군은 유폐생활 19년, 제주도에 온지 4년 만인 1641년 (인조 19년) 7월 1일에 예순일곱의 나이로 저승길에 올랐다.

그동안 광해군이 겪었을 처참한 좌절과 갈등, 모욕을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최근 우리 사회는 심각한 자살열풍에 휘말려 있다.

통게청이 매년 발표하는 2007년 우리나라 자살자 수는 1만2174명으로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24.8명에 달한다. OECD 국가 중 1위라는 불명예다.

그러나 이 통계도 축소된 것이라 한다. 국회 백제현 의원은 2007년 실제 자살자 수는 1만3407명으로 인구 10만 명당 27.3명에 이른다는 것-
2008년에는 43분마다 1명씩 자살했고, 2009년에는 42분마다 1명씩 자살했다.
특히 2008년 통계에는 2시간마다 60세 이상 노인 한 명씩 자살한 것으로 나타나 충격이 크다.

19년 동안 자유를 속박 당한채 울타리에 갇혀 지내고도 천수를 누린  광해군의 생명력을 우리 모두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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