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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남과 북에서 찾은 누정 건축, 촉석루와 부벽루
 

남과 북에서 찾은 누정 건축, 촉석루와 부벽루 수려한 풍경과 어우러진 누정은 풍류를 즐긴 공간으로 상징된다. 우리나라 3대 누정으로 손꼽히는 곳 중 두 곳인 진주 촉석루와 평양 부벽루는 시와 그림 등 작품으로도 많이 표현될 만큼 절경을 자랑하는 동시에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는 호국의 보루의 역할을 수행했다. 우리 건축문화유산의 백미로도 꼽히는 남과 북의 누정, 촉석루와 부벽루의 면면을 들여다본다. 01.섬세한 건축 양식을 갖춘 진주 촉석루 ⓒ문화재청 02.간결한 형태의 평양 부벽루 ⓒ문화재청

진주성의 치열한 역사와 함께한 촉석루(矗石樓)

진주 촉석루는 평양 부벽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정(樓亭)으로 일컬어진다. 왜 우리의 선인들은 아름다운 승지에 누정을 지었을까. 비록 강산이 아름답고 성곽이 장엄해도 누정이 없다면 울울한 회포를 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에 따르면 영남의 진주는 지리산 동쪽에 있는 큰 고을이며, 장수와 정승이 될 만한 인재가 많이 나왔고, 땅이 기름지고 강산이 아름다우므로 사대부는 넉넉한 살림을 자랑하며, 집과 정자 꾸미기를 좋아하여 비록 벼슬은 못했으나 한가롭게 노니는 귀공자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바로 이 진주의 젖줄인 남강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자리 잡고 있는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이 촉석루다. 촉석루라는 이름은 남강의 가운데에 뾰족뾰족한 돌이 있는 까닭에 붙여졌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저명한 시인인 신유한(申維翰)은 촉석루의 아름다운 경관과 역사적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진양성 바깥엔 강물은 동으로 흘러가고 晋陽城外水東流
울창한 대 꽃다운 난초는 푸르러 모래섬에 비치도다 叢竹芳蘭綠映洲
천지엔 충성 다한 삼장사가 있었고 天地報君三壯士
강산엔 객을 머물게 하는 높은 누각 우뚝 섰네 江山留客一高樓
병풍치고 노래하니 햇살에 잠자던 교룡은 춤추고 歌屛日照潛蛟舞
병영 막사에 서리 들이치니 졸던 해오라기 수심 깊네 劍幕霜侵宿鷺愁
남으로 북두성 바라보니 전쟁 기운은 사라졌고 南望斗邊無戰氣
장군단엔 피리 불고 북 치며 중춘에 노닌다네 將壇笳鼓半春遊


촉석루는 고려 말에 창건되어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진주성을 지키는 장수의 지휘소로 사용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군은 일본군과 그해 10월과 이듬해 6월에 진주성에서 두 차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두 차례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등은 순국하였고, 진주의 관민 6만여 명이 희생되었다. 김성일(金誠一)은 진주성 전투 때의 역사적 상황을 아래와 같이 칠언절구 한 수로 읊고 눈물을 흘리면서 크게 통곡하였다.


촉석루 누각 위에 올라 있는 세 장사 矗石樓中三壯士
한 잔 술로 웃으면서 장강 물을 가리키네 一杯笑指長江水
장강의 물은 도도히 쉬지 않고 흘러가니 長江之水流滔滔
물 마르지 않음이여 우리 넋도 영원하리 波不渴兮魂不死


전쟁이 끝나고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진주목사 김시민, 창의사 김천일 등의 여러 신위(神位)와 군졸들의 신위를 안치하기 위하여 1595년 경상감사 정사호(鄭賜湖)는 사당을 건립하였다. 1607년에 이 사당은 창렬사(彰烈祠)란 사액을 받았다. 한편 김시민의 신위를 모신 충민사(忠愍祠)는 1652년(효종 3)에 건립되어 1667년(현종 8)에 사액되었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자 창렬사에 신위를 옮겨 모셨다고 한다.


진주성 전투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논개(論介)의 활동이다. 그는 기생의 몸이었지만 오직 나라를 위한 일념에 불타있었다. 그는 아름답게 단장하고서 남강의 절벽 바위 위에 앉아 왜장을 유인하여 마주 안고 한바탕 춤을 추다가 왜장을 끌어안고 절벽을 뒹굴어 남강에 빠져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1740년에 영조는 논개에게 ‘의기(義妓)’라는 정표를 내렸고, 이어 경상우병사 신덕하는 순절한 논개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촉석루 옆에 논개의 사당을 건립하였다. 지금까지 촉석루를 찾는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의 역사를 회상하며 논개의 높은 순절과 민족혼을 얘기하고 있다.

03,04.유유히 흐르는 남강의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한 촉석루 ⓒ진주시청 05.〈평양감사향연도〉에 그려진 부벽루 ⓒ국립중앙박물관

예술작품에 자주 등장한 평양의 백미, 부벽루(浮碧樓)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는 1997년 9월 평양을 방문하여 여러 명승을 답사했는데, 당시에 부벽루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다고 전하면서 을밀대에 올라가서 부벽루를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북한문화유산답사기』에 부벽루에 대해 소개하면서 두 가지 사항을 특기하였다. 그 글에 따르면 부벽루에 걸려 있는 편액 글씨는 평양 사람 조광진(曺匡振)의 것이고, 김황원(金黃元)의 시구는 현재 부벽루가 아니라 연광정에 원문과 번역문이 주련으로 걸려 있다고 한다.


대동강 청류벽(淸流壁) 위의 부벽루에 올라서면 그 아래 유유히 흐르는 맑은 강물과 강 건너로 펼쳐진 들판, 멀리 크고 작은 산들이 보이는 전경이 매우 아름답다. 고려 예종 때의 시인 김황원은 부벽루에 올라가 시심(詩心)을 억누를 수 없어 “장성 한쪽 면은 넘실넘실 흐르는 물이요(長城一面溶溶水), 너른 들 동쪽 머리는 점점이 박힌 산이네(大野東頭點點山)”라는 두 구절을 읊고는 아름다운 경치에 그만 넋을 잃고 내려왔다고 전한다. 세상 사람들은 평양의 아름다운 경치가 이 두 글귀에 다 표현되었으므로 오랜 시간이 흘러도 다시는 한 구절이라도 덧붙이는 이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 말의 대문호인 이색(李穡)은 부벽루에 올라가 천고의 절창(絶唱)을 남겼다.


어제 영명사를 들렀다가 昨過永明寺
잠시 부벽루에 올랐었네 暫登浮碧樓
빈 성엔 한 조각 달이요 城空月一片
오랜 돌엔 천추의 구름이네 石老雲千秋
기린말은 떠난 뒤 돌아오지 않으니 麟馬去不返
천손은 어디에서 노닐고 계신가 天孫何處遊
휘파람 길게 불며 바람 부는 비탈에 기대니 長嘯倚風磴
산빛은 푸르고 강물은 절로 흘러가네 山靑江水流


조선조의 학자인 허균은 이색의 부벽루 시 작품은 별로 수식하거나 탐색한 흔적이 없이 저절로 음률에 맞아서 읊으면 신일(神逸)하다고 했고, 정사룡은 절묘하여 사람을 감동시킨다고 했다. 이 부벽루 시의 시어(詩語)인 석(石:朝天石), 인마(麟馬), 천손(天孫) 등은 고구려 동명성왕의 고사를 표현한 것이다. 부벽루가 있는 곳에 동명성왕의 궁궐이 있었다고 하니 유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의 성지인 것이고, 이색은 그 사실을 평이하면서도 절묘하게 시로 읊었던 것이다.


조선조에 이 부벽루에서는 평안감사가 주최하는 다양한 연회가 열렸고, 그때마다 관료와 문인들의 수많은 작품이 지어지고 또 지어졌다. 조선 후기에 평안감사의 부임을 환영하기 위해 베풀어진 연회의 모습을 그린 〈평양감사환영도(平壤監司歡迎圖)〉 등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멋과 풍류를 마음껏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벽루 역시 촉석루처럼 전란 시에는 호국의 보루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평양에서도 조선과 일본의 군대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부벽루는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 버렸으나 1614년(광해군 6)에 중건되었다.


평양의 부벽루와 진주의 촉석루는 우리의 선인들이 평화로운 시절에는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고, 유사 시에는 호국의 보루로 역할을 하였다. 평양성과 진주성은 나라의 안보를 상징하며, 부벽루와 촉석루에 걸린 시판(詩板)은 우리의 선인들이 창조한 풍류 문화의 자취들이다. 그러나 1948년 남북이 분단된 이래 아직까지 남북의 동포들은 서로 오고 가지 못하고 시와 그림 등 작품으로만 남북에 산재한 문화유산을 그려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 민족은 단군의 후손으로 이 땅에서 오 천여 년을 함께 살아왔기에 민족도 강역도 역사도 언어도 문화도 같다. 하루빨리 남북이 자유롭게 오가고, 통일로 이어져 촉석루와 부벽루에 올라가 그동안 가슴깊이 쌓인 울울한 회포를 풀 날이 오기를 빌어본다.



글. 권오영(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학전공 교수)

출처:월간 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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