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방송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홈으로 | 즐겨찾기등록 |  +관련사이트 
[문화재방송 캠페인]'문화재에는 우리 민족의 얼과 혼이 숨 쉬고 있습니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입니다. 휴일이면 가족과 더불어 각종 문화재와 함께 하여 민족의 숨결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문화유산 답사기]고조선의 땅, 낙랑군 갈석산(樂浪郡 碣石山)
 국가무형문화재 '해녀' 전승활성화 사업 추가 공모
 [단독] 이완용 땅, 후손들이 대물림..멀쩡히 남아 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의 성은 김(金)씨가 아니라 전(全)씨"
 [단독]발해와 옥저의 땅, 연해주를 가다<하> ...고조선 청동투겁창, 러시아 연해주서 첫 발견
 가야시대 조개장식 말갖춤새, 日 오키나와 조개류로 확인
 2천년 역사 한국의 젓가락 세계를 들어 올린다
 대한민국 공예품대전 이종수씨 국무총리상
 90년 전 우리 문화재 담은 미공개 흑백사진 첫 선
 [신간] 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
 [숨은 역사 2cm] 한반도 분단 불씨 '얄타회담' 3개국 정상 모두 치매 걸렸다
 신라시대 호남에 뿌리내린 불교는…국립광주박물관 특별전
 빙하기 이후 해수면 122m 상승… 수백만명 이주가 임박했다
 서울시한강사업본부, 17일 한강 세빛섬에서 ‘서울스토리패션쇼’ 개최
 남산예술센터, ‘천사-유보된 제목’ 29일 개막
 [역사와 함께 걷는 강화나들길]청나라에 함락된 강화도, 여자들이 바다로 뛰어든 이유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의 명승
 청명한 가을 달빛 아래 창덕궁에서 밤을 즐기다
 사진으로 담은 아름다운 독도
 [일제 잔재] ② 가오와 곤조로 버텨왔건만…간지 안 나는 인생
 3·1운동때 불렸던 '애국가 11편' 필사본 찾았다
 [단독]“위안부 연구조차 日자료에 의존… 사료집 편찬 최선”
 발해와 옥저의 땅, 연해주를 가다 <상> 러 콕샤롭카 온돌 유적...고구려 후예임을 밝힐 결정적 증거
 [단독]일제는 왜 비단 수의(壽衣)를 죄인 상징하는 '삼베 수의'로 바꿨나
 보물급 고려 불경 日서 돌아왔다…"형식상 매우 드문 책"(종합)
 
 
[기타 문화재] > 최신게시물
제목 : 日 규슈(九州) 여행...‘시마바라(島原) 난’의 원초적 본능 아마쿠사(天草)
 
본문이미지
모형으로 재현한 그 당시의 진지

日 규슈 여행...‘시마바라(島原) 난’의 원초적 본능 아마쿠사

글 |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지금 농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 생애까지 친구이다”
 
10월이 열리자마자 가을이 숨 가쁘게 다가왔다. 하지만, 일본의 규슈(九州)는 아직도 무더운 여름이었다. 섭씨 28도의 구마모토(熊本)-지진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모금운동을 펼치는 ‘구마몽’이 미소를 날렸다.
 
본문이미지
구마몽 모금함
필자는 땀을 닦으며 구마모토 역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아마쿠사(天草)를 가기 위해서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전차를 바라보면서 버스를 탔다. 버스가 구마모토 시내를 벗어나자 바로 우도(宇土)로 이어졌다. 우도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88-1600)가 다이묘(大名)를 지냈던 곳이다. 버스는 녹슨 기찻길과 평행선을 그으며 달리다가 해안으로 방향을 틀었다. ‘느림의 미학’이 몸에 밴 운전사 덕택에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친해질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섬이 수놓은 듯 즐비한 바닷가의 갯벌 위에서는 갈매기들이 분주하게 먹이를 찾고 있었다.
 
자연과 문화로 육성된 섬, 아마쿠사(天草)
 
구마모토(熊本) 현의 남서부에 위치하는 아마쿠사(天草)는 크고 작은 120여의 섬으로 형성된 제도이다. 단절과 고립, 그리움과 외로움을 덜어낸 교량이 50주년이 되었는지 ‘50년’이라고 크게 새겨진 깃발들이 곳곳에서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아마쿠사는 푸른 바다에 둘러싸여 있고 돌고래들의 유희(遊戱)를 즐길 수 있는 곳이며, 일본 최대급 육식 공룡의 화석이 발견된 지역이기도 하다. 더욱 특징적인 것은 유럽 문화와 크리스천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아마쿠사는 ‘자연과 문화로 육성된 섬’으로 불린다.
 
본문이미지
아마쿠사 메모리얼 홀

버스는 해안을 돌아 산을 넘으며 길게 반복되는 흐름으로 전진했다. 한 시간 반 쯤 후 달리다가 ‘아마쿠사 시로(天草四朗) 메모리얼 홀’을 만났다.이 홀은 ‘아마쿠사 시로’를 기념하는 전시관이다. 전시관은 남국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나무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쿠사 시로(天草四朗)는 누구인가?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 1621년-1638)는 아마쿠사(天草) 섬에서 태어난 크리스천이다. 본명은 마스다 시로(益田四朗). 가톨릭 다이묘 고니시(小西)의 낭인 ‘마스다 진베이(益田甚兵衛, 1583-1638)’의 아들이다. 그는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亂) 당시 16세의 나이로 무장봉기군의 총대장이었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본래의 세례명은 제로니모(Geronimo)였으나 전투 당시 프란시스코(Francisco)로 바꿨다.
 
슬픈 역사의 기념관 속으로...
 
계단을 오르자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18호 태풍 차바(Chaba)의 영향이었다.

“저 건물의 형상에서 뭔가를 느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바로 성모마리아가 미사포를 쓴 형상입니다.”
 
본문이미지
아마쿠사 메모리얼 홀의 외관
기념관 입구에서 만난 나카야마 히로미(中山裕巳) 관장의 말을 듣고서 건물 외관에서부터 특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전시장은 남만(南蠻) 문화와 천주교의 전래를 전시한 역사 테마관이었다. 테마의 중심은 ‘시마바라·아마쿠사 난(乱)’과 비극의 주인공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였다. 에도(江戶) 막부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의 ‘박해와 탄압’을 계속했다.
 
1633년 에도 막부는 외국과의 왕래를 금지하고 크리스천 탄압에 열을 올렸다. 개종을 강요하고 ‘크리스천 전향증서’를 발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외에서 잠입한 선교사들은 은밀하게 포교 활동을 했다. 그 결과 아마쿠사(天草)와 나가사키(長崎)에 크리스천이 늘어났다. 특히 아마쿠사는 본토와 멀리 떨어진 섬인 관계로 감시의 눈을 피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무렵 결정적인 민중봉기를 촉발시킬만한 참혹한 사건이 있었다. 규슈의 가고시마(鹿島)에서 한 임산부가 밀린 세금 때문에 차가운 강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를 계기로 민중의 폭발이 야기됐던 것이다.
 
‘신의 깃발아래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
 
시마바라의 난(島原の亂)은 일본 역사상 최초이면서 대규모 무장봉기(一揆)이기도 하다. 기독교인들이 농민과 함께 일으켜 기리시탄의 난(吉利支丹の亂)이라고도 하며, 나가사키의 시마바라와 구마모토의 아마쿠사가 공동 전선을 펼친 관계로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島原・天草の亂)이라고도 한다.
 
본문이미지
아마쿠사 시로의 동상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 메모리얼 기념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기념관에는 전설과 수수께끼에 싸인 불과 16세의 소년 아마쿠사 시로를 중심으로 전개된 신앙의 싸움인 ‘아마쿠사・시마바라의 난’에 대한 기록을 다양하게 전시하고 있습니다. 아마쿠사 시로의 진정한 모습과 민중의 뜨거운 생각을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체험적 테마관입니다.”
 
나카야마 히로미(中山裕巳) 관장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자신의 사진 촬영을 극구 사양하는 것 외에는 취재를 위한 모든 편의를 완벽하게 제공했다. 그는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장대한 로망의 궤적을 더듬는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인 일에 관심이 없더라도 한번쯤은 방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시마바라의 난’의 근본적 원인은 주민들의 혹사와 과중한 세금이었다. 해마다 현물로 바치는 공납으로 수입의 약 50%를 쌀로 바쳤다고 한다. 거기에 번(藩)의 크리스천 박해와 기근에 의한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무장봉기가 발생했던 것이다.
 
크리스천을 중심으로 3만 7천명이 뭉친 이 반란은 궁핍한 생활에 빠져있던 농민뿐 아니라 어업, 수공업, 상업 등 거의 모든 산업 종사자들까지 크고 넓게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외침은 12만 여명의 막부군에 의해 90일 만에 끝이 나고 말았다. 그 후 막부의 크리스천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가혹해졌다. 기념관에 전시된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하라(原)성의 공방전
 
<1637년 12월 1일. 시마바라의 무장봉기군은 하라(原)성터에서 농성을 준비했다. 12월 3일에는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가 입성했다. 아마쿠사(天草)의 봉기군 1만3천명이 12월 9일까지 각 지역에서 바다를 건너 합류해 무장봉기군은 총 3만7천 여 명에 이르렀다. 12월 20일 막부군 4만 명이 하라성을 공격했으나 봉기군은 세 번에 걸쳐 막아냈고 막부군은 대패했다. 1638년 1월 1일의 총공격에서는 네덜란드의 군함에 의한 포격이 가세했고, 하라성의 포위를 강화해서 성내의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작전을 폈다. 그런 가운데 그해 2월  27일 서남제도로부터 동원된 연합군 12만 5천명이 총공격을 개시했고, 28일에는 하라성이 떨어지게 됐다. 시로(四郞)를 비롯한 3만 7천 여 명의 봉기군은 모두 죽음을 맞았다.
 
본문이미지
모형으로 재현한 그 당시의 진지

이 전투에서 막부군은 사망 2천명, 부상 1만 명이 나왔다. 이 전투 이후 아마쿠사는 막부직할 관리영토가 되었고, 크리스천 탄압은 더욱 강화되어 1639년에는 최종적인 쇄국령이 선포되었다. 이후 200년 이상에 걸쳐서 쇄국의 시대가 계속되었으나, 그러한 통제 하에서도  신앙은 은밀히 계속되었다. 메이지(明治) 6년(1873년) 크리스천 금제(禁制)가 해제되고, 다음해에 오에(大江)교회가 창립돼 드디어 종교 자유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본문이미지
크리스천 박해 영상의 한 장면

3만 7천명의 무장봉기군은 “지금 농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 생애까지 친구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최후를 맞았다. 그런데, 이 봉기군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다. 야마다 에모사쿠(山田右衛門作, 1575-1657)이다. 그는 막부군과 내통했던 사람이다. 이유 불문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배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나카야마(中山) 관장은 평범하게 답했다. '그에 대한 정보는 어떠한 것도 없다'고 했다.
 
“막부군과 내통했던 사람입니다. 그 역시 크리스천이었지요. 에도에서 살다가 나가사키에 귀향해서 병사했다는 설과 해외로 도피했다는 소문이 무성할 따름입니다.”
 
‘난(乱)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전투이다’
 
푸르고 맑은 하늘이었다.
투명한 쪽빛의 바다였다.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자유는 빼앗겼고, 평등은 없었다.

 
본문이미지
'자유와 평등' 코너의 그림
“엄밀히 말하면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乱)’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싸움’입니다. 아마쿠사 시로(天草四郞)는 자유·평등·박애의 상징이지요.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이 작은 섬에 자유와 평등의 씨앗이 발아(發芽)된 것입니다.”
 
나카야마 히로미(中山裕巳) 관장은 당초보다 다소 숙연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큰 울림이 있었다. 이 코너에는 자유와 평등을 의미하는 르네상스(1500-1700), 프랑스 혁명(1789-1799),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에 대한 기록의 전시도 함께하고 있었다. 시마바라·아마쿠사의 싸움(1637-1638)과 나란히.
 
자유·평등·박애-프랑스의 혁명정신이다. 오늘의 자유와 평등은 많은 사람들의 피에 의해서 이룩된 고귀한 희생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들의 성취를 위한 무장봉기는 일어나지 말아야 하고, 이를 살생으로 몰아가는 권력자들의 횡포도 사라져야 한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운 장대한 로망의 궤적’이라고 했던가. 아마쿠사 시로(天草四朗) 메모리얼 홀에 담긴 로망의 궤적들이 오히려 무거운 짓눌림으로 다가왔다. 기념관을 나서자 하늘은 검은 구름으로 뒤덮였고 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원문보기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5&nNewsNumb=20161021631&nidx=21632&dable=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