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신성비 제1비, 경주 남산, 삼국 591년, 석(石), 91.0×44.0cm, 국립경주박물관
(사적 제22호인 남산신성을 쌓을 때의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한 비석이다.)

비문(碑文)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신해년(辛亥年)은 진평왕(眞平王)이 즉위한 후 13년이 되는 해로 서기 591년이다. 그해 2월 26일 축성에 참가한 사람들은 남산에 모여 비를 세우고 그들의 이름, 축성 담당 구간 그리고 견고한 성곽을 쌓겠다는 맹세의 서약을 새겼다.

1934년 경주 탑리 식혜곡 부근에서 제1비가 신고된 이후 지금까지 10기가 발견되었다. 원래의 위치에 놓여있었다고 추정되는 제9비만이 성벽 안쪽에 붙어 출토되었고, 나머지는 제각기 다른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제3비는 배반리 사천왕사지, 제4비는 탑리 일성왕릉, 제5비는 남산에서 떨어진 사정동 영묘사지에서 발견되었는데, 성곽이 사용되지 않은 시기에 사람들이 다른 건축물를 짓는 자재(資財)를 남산에서 조달하면서 축성비가 이동되었다고 판단된다.

남산신성의 축조 정보에 대하여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진평왕13년(591년)-秋七月 築南山城 周二千八百五十步.
---가을 7월에 남산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2,850보였다.
문무왕 3년(663년)-春正月 作長倉於 南山新城
---봄 정월에 남산신성에 장창을 지었다.
문무왕 19년(678년)-增築南山城.
---남산성을 증축하였다.

발견된 모든 남산신성비에는 591년 2월 26일 서약의 기록이 전한다. 그리고 같은 해 7월에 남산성을 축조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으로 보아 약 4개월간의 축성기간을 거쳐 성곽의 기초가 완성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와는 달리 봄철 농번기 상황을 고려해 2월 26일을 1차 완공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72년 뒤 북동편 구릉 자락에 창고시설인 장창을 설치하였고, 87년 뒤 성벽을 새로이 증축한 것으로 보아 상당기간 동안 관리,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산신성 평면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남산은 다양한 불상들이 자리 잡은 성역의 공간이다. 성곽은 북편 자락에 위치한다.

현재 성벽 대부분은 허물어졌으나, 노출된 하단 부분의 경우 비교적 현상을 잘 유지하고 있다. 여러 조사를 통해 확인된 성벽의 전체 둘레는 4km 정도이다.

비문은 크게 서약과 담당자, 담당구간으로 구분된다. 특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담당자 구역에서는 감독관과 마을 대표, 담당 책임자들의 계급과 직책을 새겼다.

남산신성 제1비 명문 내용

<1구역> 서약
신해년 2월 26일에 남산신성(南山新城)을 만들 때, 법에 따라 만든 지 3년 이내에 무너져 파괴 되면 죄(罪)로 다스릴 것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려 서약(誓約)케 하였다.

<2구역> 담당자
아량나두(阿良邏頭)인 사훼(부)(沙喙(部))의 음내고(音乃古) 대사(大舍)
노사도사(奴舍道使)인 사훼(부)(沙喙(部))의 합친(合親) 대사(大舍)
영고도사(營沽道使)인 사훼(부)(沙喙(部))의 요▨▨지(夭▨▨知) 대사(大舍)
군상촌주(郡上村主)인 아량촌(阿良村)의 금지(今知) 찬간(撰干)
칠토▨▨지이리(柒吐▨▨知尒利) 상간(上干)
장척(匠尺)인 아량촌(阿良村)의 말정차(末丁次) 간(干)
노사촌(奴舍村)의 차▨▨(次▨▨) 간(干)
문척(文尺)인 ▨문지(▨文知) 아척(阿尺)
성사상(城使上)인 아량(阿良)의 몰내생(沒奈生) 상▨(上▨)
▨척(▨尺)인 아▨▨차(阿▨▨次) 간(干)
문척(文尺)인 죽생차(竹生次) 일벌(一伐)
면착상(面捉上)인 진앙▨(珎卬▨)
면착상(面捉上)인 지례차(知礼次)
면착상(面捉上)인 수이차(首尒次)
소석착상(小石捉上)인 욕▨차▨(辱▨次▨)

<3구역> 담당 구간
11보(步) 3척(尺) 8촌(寸)을 받았다.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II(1992)

1. 서약의 정보

서약의 내용은 축성에 대한 일종의 맹세이다. 내용의 요지는 3년 동안 붕괴되지 않은 성곽을 마련하기 위한 책임을 부여한 것으로 실상 율령(律令)과 같은 효력을 지닌다. 비문에는 보이지 않으나 그 약속의 대상은 국왕이며, 왕에 대한 일종의 충성 서약이기도 하다.

2. 담당자의 정보

감독관에서 하위 담당자에 이르는 서열이 기재되어있다. 그 가운데 축성의 총책임자는 도사(道使)·나두(邏頭)의 직책을 가진 사람으로 이들은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된 지방관들이다. 그 아래 일선 지휘자는 촌주(村主)·장척(匠尺)·문척(文尺)의 직책을 가진 사람으로 이들은 인력 동원과 설계 등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비문에는 보이지 않으나 실무 담당자 아래에는 땅의 굴착과 석재 운반 등의 여러 가지 잡무를 담당하는 이름 모를 사람들도 존재한다. 요컨대 비문을 통해 요즈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지휘 및 분업 체제로 신성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담당구간의 정보

1비의 집단이 담당한 축성 구간은 11보 3척 8촌이다. 그리고 명문이 비교적 양호한 제2비의 경우 담당 구간이 7보인 것으로 보아 한 집단이 담당한 구간은 대략 10보 내외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재된 성곽의 둘레가 2,850보인 점을 감안해 볼 때 남산신성비를 세울 당시에는 200여 집단이 투입되었고 각각의 공정구간을 적은 비석이 남아 있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아직도 190여 개가 넘는 많은 수의 남산신성비가 남산과 주변지역에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각 집단이 공사한 구간은 성곽 둘레 4km를 기준으로 볼 때 대략 14m 정도로 생각된다.

이러한 비문의 건립 이면에는 축성을 기념함과 동시에 당시 사회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1. 축성에 동원된 사람들

제1비에 등장하는 아량촌(阿良村)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지역이다. 나머지 9개의 비석에서도 아량촌과 같은 지방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의령(宜寧)·의성(義城)·상주(尙州)·옥천(沃川)·선산(善山)·영풍(榮豊) 등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당시 축성작업에는 여러 지역 사람이 동원되었고, 지역별로 담당구역이 설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발견되지 않은 비석의 양을 고려한다면 당시 신라 영토 전역에서 인력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2. 왕권과 국력 강화

왜 이러한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남산신성을 쌓았을까? 여기에는 신라의 정치적 상황이 배경에 깔려있다. 폐위된 진지왕(576~578) 다음으로 즉위한 진평왕(579~631)의 초기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이를 타개할 목적에서 왕은 건복(建福)이라는 새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조직 개편을 추진하는 등 다양한 변화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그 변화의 연장선에서 남산에 새로운 성곽이자 하나의 상징물인 신성을 쌓도록 명령하였다. 요컨대 성곽 축조에 투영된 내면에는 통치체제 변화와 백성에 대한 지배 강화 등의 목적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또한 축성 사업에 동원된 사람들은 전투에 투입될 수 있는 인력이며, 세금을 징수할 수도 있다. 때문에 전국 규모의 인력망과 군사․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방편이 되기도 한다.

3. 왕경의 남쪽 방어책

신라 왕경 방어 성곽의 분포(1월성, 2명활산성, 3남산신성, 4서형산성, 5고허성, 6부산성, 7북형산성, 8신대리성,관문성)-축성 순으로 배열)

남산신성은 방어적 목적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한다. 신라 방어체계의 첫 단추는 경주 중심부에 자리한 월성(月城)이었다. 동에서 서로 흐르는 남천(南川)이 해자 역할을 해주고 돌출된 자연 구릉은 그 자체가 천혜의 성벽이었다.

그러나 그 방어공간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기에 넓은 범위의 왕경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성곽이 필요했다. 이에 신라인들은 경주로 향하는 교통로와 연결되는 동서남북 사방의 산지에 산성을 축조하는 방어체계를 설계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남쪽 방향은 왜적의 주요 침입방향이었기에 여타 방위보다 한층 더 높은 방어 전략이 필요했다.

이에 좌우 양갈래의 방어가 가능한 남산일원에 남산신성과 고허성(高墟城)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울산만이 바라다 보이는, 산지와 고갯길에 신대리성(新垈里城)과 관문성(關門城)을 추가하여 두터운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따라서 남산신성은 왕경을 보호하는 마지막 방어선인 셈이다(우측 이미지 참고).

4. 기술 발달과 전파

경주 남산신성에 사용된 장방형의 면석

남산신성비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성이 3년 내에 붕괴되면 처벌을 받는다.”는 문구이다. 이는 기념비적인 상징성을 지닌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 말은 곧 이전에 축조된 성곽이 3년 내 붕괴는 일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붕괴를 막기 위한 방법들이 성곽 축조에 다양하게 시도되었을 것이다. 일예로 성벽을 쌓을 때 면석을 사용하는 사례가 증가한다. 이는 남산신성비문에 등장하는 면착상(面捉上) 즉 면석을 가공하는 장인의 소임이었다. 그리고 빗물의 1차적인 유입을 막기 위하여 물을 모으는 집수시설(集水施設)과 수구(水口)를 마련하거나 성벽 외측에 무너짐을 보안하는 시설들도 계속 보강되었다.

한편 새로 마련된 기술이 현장에서 여러 지역 사람에게 공유될 수 있었던 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초를 다지는 방법이나 돌을 채취하고 가공하는 방법 등의 기술은 물론 작업에 사용되는 다양한 공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보가 참여한 모든 이에게 알려질 수 있기에 신라 영토 내에서 유사한 성벽 형태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일차적으로 축성 주체는 경주지역의 지형을 철저히 파악하고, 최적의 장소를 선정하였다. 그 대상지로 경주의 성스러운 산이자 왜적의 침입이 잦은 남쪽방향에 위치한 남산을 선택하였다. 그런 다음 각 지역에 명(命)을 내려 축성에 동원될 인력을 모았다. 모여든 이들에게는 축성의 방식을 설명하고, 각자의 담당 역할을 부여하였다. 부수적으로 필요한 도구와 생필품들도 지급하였다. 모든 것들이 갖추어진 591년 2월 26일 성곽의 착공에 앞서 사람들은 비석을 세우고 이름을 새겨 맹세의 서약을 하였다. 계획한 대로 성벽의 기초가 마련되고 건물지들도 하나 둘 생겨났다. 남산을 비롯하여 경주일원에는 모여든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그들의 다양한 생각과 노력이 모여 남쪽 방어의 기틀인 남산신성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