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방송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1홈으로 | 즐겨찾기등록 |  +관련사이트 
문화재방송 한국 " Since 2008. 2. 1 "
[공지]왼 쪽 상단 VJ 金鐘文을 클릭하시면 그동안 KBS에 방송됐던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왼 쪽 아래의 유튜브 바로가기를 클릭하시면 문화재 관련 동영상을 많이 보실 수 있습니다. [문화재방송 캠페인]선조들의 숨결어린 문화재, "문화재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국심칩니다"
hudownwbe wojodown nuebfile monjdown yesnkdown lpmedown jneepudw mndownfile bafdownco yabiqedown amehdown fadowntero evnhdown
HOME >
문화재뉴스 >
무형문화재 >
유형문화재 >
기타문화재 >
영상문화 >
역사기행 >
유네스코세계유산 >
문화재연감 >
유튜브 바로가기 >
PageNo : 01
제 목 중국 시안여행...병마용과 진시황릉, 실크로드와 양귀비
글쓴이 문화재방송.한국 등록일 [2021.02.21]

 

▲ 화청궁 입구 광장에 조성된 양귀비와 현종의 조형물.




중국 시안여행...병마용과 진시황릉, 실크로드와 양귀비

글 | 조성관 주간조선 편집장

▲ 진시황병마용박물관 출입구 전경.
버스가 시안성(西安城)을 뒤로한 채 한 시간쯤 달렸을까. 아침부터 도시를 삼켰던 스모그는 오후가 되어서도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연막탄처럼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진당대로(秦唐大路)는 희뿌연 미세먼지의 터널 속을 향해 희미하게 뻗어 있었다. 왕복 4차선의 대로변 구릉에는 과수원이 끝없이 이어졌다. 석류 농장 입간판들이 나타났다 이내 뒷걸음질 치며 멀어져갔다. 시안에서는 어디서든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게 석류다. 감, 대추와 함께 석류는 시안의 대표 특산물이다.
   
   진당대로 왼쪽으로 어렴풋하게 야트막한 산이 보였다. 지린성 출신 조선족 가이드가 그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진시황릉입니다.”
   
   순간, 버스 안은 웅성거렸고 여행객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가이드가 설명해주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그냥 지나쳤을 법한 평범한 야산이다. 세계의 여행객이 시안을 찾는 이유는 단 하나. 병마용과 진시황릉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다.
   
   잠시 후 버스는 왼쪽 길로 좌회전을 했고, 곧 진릉북로(秦陵北路)의 주차장에 멈췄다. 진릉북로를 건너 광장으로 들어섰다. 저 멀리 거대한 ‘秦始皇兵馬俑博物館(진시황병마용박물관)’이라는 현판이 가로로 붙어 있었다. 입구의 규모는 서울대공원의 그것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3만원짜리 입장권을 내고 안으로 들어섰다. 병마용박물관은 입구에서 도보로 10여분 거리에 있다. 보행이 불편한 사람을 위한 전동열차도 운행한다. 처음 와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입구와 박물관 사이가 너무 멀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평지라 걷기에 힘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시안에서 부자가 되고 싶으면 풍막(風幕)을 치고 땅을 파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한나라, 당나라, 명나라 등 중국의 주요 왕조가 시안을 도읍으로 삼았다. 그 세월만큼 진귀한 유물과 금은보화가 땅속 어딘가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리라.
   
▲ 진시황병마용박물관 1호갱의 병마용들. 4열 종대로 세워진 병사들이 바라보는 방향이 동쪽이다.

   1974년 봄 어느날. 이곳에 살며 채마밭을 일구던 농부 세 명이 삽, 곡괭이, 두레박, 사다리 등을 들고 우물을 파기 위해 너른 밭으로 나갔다. 양씨를 비롯한 세 사람은 새참을 먹으며 땅을 파내려갔다. 암석이 섞이지 않아 땅을 파내려가는 데는 큰 힘이 들지 않았다. 한 5m쯤 파내려갔을 때였다. 물기가 배어나와야 할 곳에 이상한 나무판이 보였다. 두드려 보니 울리는 소리가 났다. 농부들은 누군가의 무덤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덤이 왜 이렇게 깊은 곳에 있을까. 곡괭이로 나무판대기를 내리쳤다. 나무판이 쪼개지면서 흙먼지를 뒤집어쓴 무언가가 나타났다. 양씨는 그것을 두 손으로 잡아 끌어올렸다. 사람 머리와 똑같은 인형이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농부들은 혼비백산했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옆에도 똑같은 사람 머리 인형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뭘까. 공포에 질린 두 명은 아예 현장에서 줄행랑을 쳐버렸다. 흥분을 가라앉힌 양씨는 ‘머리’ 하나를 들고 시안 공안 당국으로 달려갔다.
   
   이것이 병마용 갱(坑)이 세상에 알려지는 발굴의 시초다. 이어 고고학 전문가들이 대거 투입되어 발굴을 시작했다.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진(秦)제국(BC 221~206)의 위용이 22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세상에 알려지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양씨 등이 우물을 판 곳은 병마용 1호갱이었다. 이어 2호갱, 3호갱이 발견되었다. 5년에 걸친 발굴 작업을 마치고 중국공산당은 1979년 10월 1일 진시황병마용박물관을 열었다. 중국은 이로써 만리장성에 이어 또 하나의 불가사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후 병사용의 복제품들은 세계 전역에 팔려나갔다. 지금 서울을 비롯한 세계 주요 도시의 중국 요리 전문점 입구를 눈여겨보라. 거기에 무엇이 서 있는지.
   
   내가 병마용을 찾은 것은 지난 12월 중순, 비수기였다. 일 년 중 병마용을 찾는 관람객이 가장 적을 때였다. 입장권을 사는 데도, 들어가는 데도 조금도 지체가 없었다. 5월 초나 10월 초에는 병마용을 관람하려면 최소 2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박물관의 하루 평균 입장객 수입은 18억원이다.
   
   병마용박물관 1호갱 앞의 광장에 섰다. 중국인들이 삼삼오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병마용 갱을 보는 순서는 보통 1호갱을 시작으로 3호갱, 2호갱 순으로 관람한다.
   
   사진과 영상과 영화로 수없이 보아온 병마용(兵馬俑), 영어로는 테라코타 아미(terracotta army)다. 찰흙으로 구워 만든 군인이다. 인파에 떠밀려 다니지 않으려 일부러 비수기를 택했는데도 병마용 안에는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대부분이 중국인이었고, 그 다음이 한국인, 간간이 백인이 보였다.
   
▲ 1호갱의 일부. 병사들은 계급에 따라 복식, 신발, 머리 모양 등을 달리해 제작되었다.

   병마용 1호갱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면적은 1만4260㎡. 병사들은 모두 출입구 쪽을 향해 서 있는 자세였다. 진시황은 갱 속에 병과와 계급에 따라 병마용을 세운 뒤 나무판을 가로로 놓아 그 위를 가렸다. 나무판 위에 다시 흙을 5m 정도로 덮어 위장을 했다. 2000년 이상 시안 사람들은 땅 밑에 놀라운 문화유물이 잠자고 있는 줄을 꿈에도 모른 채 농사를 짓고 살았다.
   
   박물관 출입구는, 방위로 말하면 동쪽. 시안은 동쪽을 제외한 서남북 방향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 같은 입지조건을 가졌다. 역대 왕조가 이곳을 수도로 정한 이유다. 병사들과 군마들이 일제히 동쪽을 향해 있다는 것은 동쪽에서 쳐들어오는 적군만 막으면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관람객들은 3~5m 아래에 있는 병마용을 내려다본다. 출입문 쪽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병마용의 얼굴을 관찰하는 최적의 방법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맨 앞 세 줄의 병사들은 그 뒷줄 병사들과 군복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앞 세 줄의 병사들은 갑옷이 아닌 군인 복장을 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들은 전투병이 아닌 홍보선전원이다. 진시황은 전투에서 심리전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병사들 중간중간에 말들이 배치되어 있다.
   
   1호갱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다 보면 중간중간에 병사들이 넘어져 깨져 있는 게 보인다. 그 결과 4열 종대로 서 있던 병사들이 움푹 꺼진 느낌을 준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보자.
   
   “진나라 말기 항우(項羽)가 군사들을 이끌고 시안을 공격했다. 이때 항우의 병사들은 출입구를 통해 병마용 갱 안으로 들어와 병사들을 부수고 병사들이 쥐고 있던 무기들을 모두 약탈해갔다.”
   
   
▲ 발굴 당시 군화의 채색. 현재 1호갱에 사진으로 전시 중이다.

   국가원수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곳
   
   병마용 관람의 정수는 병사들의 얼굴과 복장과 머리 모양에 있다. 지금까지 1~3호갱에서 발견된 병사의 숫자는 6000여명. 놀라운 사실은 얼굴이 같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이다. 6000여명이 모두 제각각의 표정으로 굳어 있다. 화난 얼굴, 뚱한 얼굴, 찌푸린 얼굴, 찡그린 얼굴, 언짢은 얼굴, 불쾌한 얼굴, 무시하는 얼굴, 무표정한 얼굴, 노려보는 얼굴, 눈을 부릅뜬 얼굴, 눈에 힘을 준 얼굴…. 웃음기가 없는 얼굴을 어떻게 이처럼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안내원의 설명이 이어진다.
   
   “진시황은 병사들이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어야 적군이 감히 넘보지 못한다고 생각해 모든 병사용의 얼굴에서 웃음을 없애버렸다.”
   
   진시황이 중국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배경에는 결국 적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가공할 군대가 있었다는 뜻이다. 1호갱에서 차분하게 살펴볼 시간이 없다면 산시성역사박물관에 가면 된다. 1호갱에서 가져온 실물 병사용을 50㎝ 앞에서 관찰할 수 있게 전시했다. 병사용을 관찰하면서 나는 ‘지옥의 문’을 제작한 위대한 조각가 로댕(1840~1917)을 떠올렸다. 로댕이 만일 병마용을 봤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것인가.
   
   병사용의 몸통과 머리 부분은 속이 비어 있다. 도예 장인들이 외부에서 제작한 후 이곳으로 옮겨져 조립되었다. 현재의 도예가들은 2200년 전에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구워낼 수 있었는지 의아해 한다. 병마용 미스터리의 하나다. 최근 영국 BBC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병마용이 고대 그리스 장인들의 지도로 제작되었다는 주장을 폈다. 진나라 때에 와서 갑자기 실물 크기의 병마용이 등장한 것은 고대 그리스의 영향이라는 얘기다.
   
▲ 웃음기 없는 다양한 표정의 병사용들. 산시성역사박물관에는 실제 병사용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게 전시해놓았다.

   관람객들의 눈에 병마용은 대부분 짙은 회색이다. 1974년 최초로 발굴되었을 때 병사용은 계급에 따라 갑옷과 군화를 채색했다. 흙 속에 묻혀 있다가 2200년 만에 햇볕을 보자 며칠 만에 모두 회색으로 변색되었다. 1호갱 복도에는 발굴 당시의 화려한 색깔의 갑옷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다.
   
   1호갱 뒤쪽에는 구덩이에서 꺼낸 병사용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놓은 공간이 있다. 일반 관람객들은 이곳 출입이 불가능하다. 병마용박물관은 중국을 방문한 외국 국가원수들이 가장 가 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중국 당국은 외국의 국가원수급이나 주요국 대사들이 병마용을 방문했을 때, 이곳을 개방한다. 외국 국가원수들은 바로 코앞에서 2200년 전 진시황의 욕망을 느끼며 전율한다.
   
   일반 관람객들은 병사용의 키를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곳으로 옮겨진 병사용들을 보면 장신임을 알 수 있다. 박물관에 따르면 병사용의 평균 신장은 185㎝. 시황제와 함께 진나라를 통일했던 병사들이 건장한 체구를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해 시라크·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등이 모두 현직에 있을 때 병마용을 찾았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진시황은 병마용 갱을 400여개 만들었다고 한다. 그중 불과 3개만이 발굴되었는데도 세계가 경악했다. 1호갱에서는 병사용 6000구에 마차 40대가 발굴되었다. 2호갱에서는 기병과 근위대의 용병이 발굴되었고, 지휘부로 추정되는 3호갱에서는 채색된 전차 1량과 병사용 64구 등이 나왔다.
   
   병마용 발굴과 재미 있는 삽화. 병마용을 찾은 프랑스 대통령은 최초 신고자인 양씨를 만나고자 했다. 프랑스 대통령은 양씨로부터 역사적인 최초의 느낌을 듣고 친필 서명을 받고 싶어했다. 그런데 양씨는 자신의 이름자도 쓸 줄 모르는 사람이어서 당혹해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바위 뒤쪽에 있는 피라미드 형태의 야산이 진시황릉이다.

   병마용 갱이 발견되면서 진나라에 대한 중국사의 퍼즐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사마천의 ‘사기’는 진시황릉이 완공된 6세기 뒤에 저술된 책이다. ‘사기’에 따르면 진시황릉은 병마용 뒤쪽에 조성되었다고 기술되었다. 병마용 갱이 발굴되면서 높이 76m, 둘레 4㎞에 달하는 거대한 피라미드 야산이 진시황릉임이 확인되었다. 진시황릉은 지상의 황궁을 지하로 그대로 옮긴 규모로 조성되었다고 ‘사기’에 기록했다. 고고학자들은 원격탐지 장치를 통해 진시황릉 내부에 거대한 벽이 세워져 있음을 확인했다. 진시황릉과 관련한 아주 오래된 이야기의 하나, 진시황릉을 만드는 데 참여한 모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온 적이 없다! 중국은 현재까지 진시황릉에 대한 발굴을 시도하지 않은 상태다. 중국은 그 내부를 들여다보지 않는 게 황제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병마용박물관과 진시황릉 사이에는 무료 셔틀버스가 운행한다. 진시황릉 입구를 들어가면 중간쯤에 커다란 바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표시가 음각되어 있는 게 보인다. 그 뒤로 약간 나지막한 피라미드처럼 있는 게 진시황릉이다.
   
   진시황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후(厚)하다. 진시황이 없었으면 지금의 중국도 없었을 것이라고 중국인들은 생각한다. 진시황처럼 공과(功過)가 선명한 황제도 드물다.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상징되는 무자비한 살상은 명백한 과(過)에 해당한다. 진시황은 문자와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했다. 산시성역사박물관에 가 보면 문자의 통일이 얼마나 지난한 과업이었을까가 실감난다. 중국 문명의 하부구조를 세운 사람이 동시에 가장 야만적인 폭정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진시황은 무시무시한 군사력으로 통일을 이뤘지만 그 가공할 권력은 15년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지고 말았다. 모든 권력자는 역사에 무언가를 남기기를 갈망한다. 진시황은 평균 수명이 40세도 안 되던 시절에 50년을 살았다. 절대 권력자는 죽음에 대한 공포도 절대적이었던 것 같다. 불멸과 불가침에 대한 황제의 욕망이 비교불가의 문화유산으로 남았으니…. 위대한 독재자는 후손을 먹여살린다.
 
▲ 실크로드 기념탑. 대상(隊商)의 전형적인 모습을 묘사했다.
시안 성벽을 나와 서쪽 개원문(開遠門)으로 길을 잡는다. 개원문 부근에 세워진 기념탑을 보기 위해서다. 자동차로 20분이면 넉넉하다.
   
   개원문 부근 공원에 거대한 조형물이 서 있다. 실크로드 기념탑이다. 알려진 대로, 시안은 실크로드의 기점(起點)이다. 한자로는 사주지로(絲綢之路), 즉 비단길이다. 고대 동서 무역로인 실크로드는 시안을 출발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길이다.
   
   실크로드는 흉노(匈奴)의 침입에 골머리를 앓던 한(漢) 제국이 흉노와 견원지간이던 월지와 외교관계를 맺으려 장건을 사절로 보낸 게 발단이다. 장건은 광대한 서역 땅을 헤매며 갖은 고생을 했지만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한 채 10여년 만에 귀국했다. 장건이 개척한 길은 타클라마칸사막을 위와 아래로 지나 중앙아시아 지역을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 서역과 한 나라의 상인들이 오가면서 훗날 실크로드가 된다. 실크로드의 최초 목적은 군사·외교상의 루트였다.
   
   공원으로 들어섰다. “쫙~” “쫙~”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한 중년 남성이 공원에서 거대한 팽이를 역시 거대한 팽이채로 쳐 돌리고 있었다. “쫙~” “쫙~” 중국인들과 관광객들이 이 장면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실크로드 기념탑은 비단길을 오가는 대상(隊商) 조형물이다. 대상은 먼저 윤곽을 보고 나서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대상의 길이는 15m. 대상을 이끄는 상인은 모두 6명. 이동수단은 낙타 여섯 마리와 말 한 필. 맨 앞에서 낙타의 목줄을 잡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다섯 명은 낙타에 올라타 있다.
   
   이제 자세히 들여다보자. 대상의 맨 앞에 선 사람 옆에 먼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모습의 개가 눈에 띈다. 어, 웬일로 개가 대상에 끼어 있지? 대상은 말이나 낙타로 구성돼 있다고 들었는데. 개는 야생동물 중 3만4000년 전부터 인간에 길들여진 짐승이다. 모든 개는 주인에 충성스럽고 외부인 침입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개가 한 마리가 아니다. 몇 마리는 사람처럼 낙타 위에 올라타 있다.
   
   대상들은 왜 개를 데리고 다녔을까. 대상이 하루 일정을 끝내고 야영(野營)을 할 때 개들에게 불침번을 서게 하지 않았을까. 초능력적인 후각과 청각을 가진 개에게 외침에 대한 척후(斥候)를 맡겼으리라.
   
   19세기 말 독일인이 비단 무역이 행해졌다고 해서 실크로드라고 명명했을 뿐 이 교역로는 지구상에서 가장 험하고 위험한 길이었다. 톈산산맥과 타클라마칸사막 사잇길을 지나 파미르고원을 넘어가는 게 비단길이다. 결코 비단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운 길이 아니다.
   

   맨 앞에서 길잡이를 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자. 한눈에도 이목구비가 중국인의 그것과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골상학(骨相學)을 모르는 사람도 금방 알 수 있다. 두 번째 사람도 맨 앞사람과 인상이 비슷하다. 3~6번째 사람은 전형적인 중국인의 얼굴이다. 다시 첫 번째 사람을 들여다본다. 광대가 돌출하고 코가 크고 눈이 움푹 들어간 모습이다. 휘어진 콧수염도 인상적이다. 유럽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닌 얼굴. 이들은 누구일까. 얼핏 총을 든 탈레반 전사(戰士)의 이미지가 겹쳐 지나간다.
   
   실크로드는 중국을 벗어나면 서역(西域)을 통과해야 한다. 서역은 중국과 유럽 사이의 중앙아시아 일대로, 지구상의 육로 네트워크 중 가장 험한 지역이었다. 실크로드는 험준한 산맥과 사막이라는 지형적인 장애물과 함께 언어가 다른 여러 독자적인 민족 집단의 영역을 통과해야 하는 장애물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나타나 흉기를 휘두를지 모르는 거칠고 난폭한 투쟁의 역사가 실크로드에서 이뤄졌다.
   
   이런 위험천만하고 기나긴 여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민족이 소그드(Sogd)인이다. 이들은 중앙아시아가 이슬람 세계로 흡수 통합되기 이전 중앙아시아 최고의 중개무역 상인으로 활약했다. 이들이 주로 활동하던 지역은 오늘날 부하라,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등이다. 소그드인들은 중앙아시아의 지리에 밝을 뿐 아니라 여러 부족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이런 점이 중국 상인들의 이해와 맞아떨어졌다. 중국인이 소그드인을 앞세워 비단길을 안전하게 오갈 수 있었다. 소그드인의 역할은 여기에 그친 것이 아니다. 중국이 투르크족을 몰아내고 중앙아시아에 지배력을 행사하던 당나라 시기에도 소그드인의 역할이 중요했다. 중국은 이 지역에 파견된 관리들에게 월급으로 비단을 주었는데, 소그드인은 보급품을 중개하는 역할을 맡았다.
   
   소그드 상인들의 몰락은 안녹산의 난(755) 때문이었다. 안녹산은 바로 소그드-투르크 출신으로 당제국의 군대에서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안녹산의 난은 결국 당제국의 쇠락으로 이어졌다. 중앙아시아 지역에 파견된 당제국의 군대와 관리들이 철수하면서 공생관계에 있던 소그드인의 생존 기반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중국 산시성역사박물관에 가보면 소그드 상인들을 묘사한 조각상들이 판매된다.
   
   
▲ 화청궁 입구 광장에 조성된 양귀비와 현종의 조형물.

   현종, 아들의 연인을 탐하다
   
   당 현종(685~762)은 재위 기간(712~756) 동안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자녀를 두었다. 그중에 역사에 기록된 자녀는 셋째 아들과 열여덟 번째 아들이다. 셋째 아들은 현종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한 숙종이다. 열여덟 번째 아들 수왕은 순번에서 짐작할 수 있듯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수왕은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 태어나 일찌감치 황위 계승권에서 벗어난, 여러 왕자 중의 한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열여덟 번째 아들이 화제에 오르내리는 것은 ‘치명적인 사랑’ 때문이다.
   
   양옥환(719~756)이 그 주인공이다. 빼어난 미모와 함께 춤과 노래 실력을 겸비했던 양옥환은 열일곱 살에 수왕을 만나 왕자의 비(妃)가 된다. 양옥환이 왕자의 부인으로 6년째 살던 해, 현종은 애첩을 잃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현종의 환관 채홍사는 중국 전역에서 황제의 밤을 위로할 만한 미인을 수소문한다. 그러던 중 수왕의 아내가 절세미인이라는 이야기를 전해듣는다. 채홍사는 교묘한 구실을 붙여 양옥환을 현종의 주연에 데뷔시킨다. 양옥환은 현종이 연주하는 현악기에 맞춰 멋진 춤사위를 선보였다. 50대 후반인 현종은 첫눈에 스물셋 양옥환에게 반하고 만다. 뭐든 할 수 있는 가공할 권력을 지닌 황제였지만 양옥환은 아들의 부인이었다. 사랑에 눈이 먼 현종은 우회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양옥환을 화산으로 보내 도교의 도사로 입문시킨다. 도사가 되면 속세의 삶은 다 지워지는 것으로 여겨진 사회적 통념을 이용했다. 대신 아들에게는 다른 여자를 소개해주었다. 현종은 도사를 모셔와 가르침을 받겠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붙여 양옥환을 궁으로 끌어들였다. 4년 뒤 스물일곱 양옥환은 귀비로 책봉된다. 이렇게 하여 양귀비가 세상에 등장했다. 그때부터 현종의 총기가 흐려지고 당제국은 기울기 시작한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됐다.
   
▲ 화청궁 경내의 양귀비 입상에서 바라본 해당탕(왼쪽)과 연화탕 전경.

   시안에는 현종과 양귀비의 러브스토리를 보여주는 장소가 있다. 화청궁(華淸宮)이다. 3800년 전부터 양질의 온천이 나와 화청지(華淸池)로 불렸다. 고대부터 역대 왕조의 왕실은 화청지에 행궁을 지어 겨울을 보내곤 했다. 당 현종은 행궁을 대대적으로 확장해 화청궁으로 명명했다. 건물 하나씩 온천탕을 하나씩 만들었다. 해당탕, 연화탕….
   
   시안 중심가에서 화청궁까지는 자동차로 40여분 걸린다. 지금으로부터 1260여년 전,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화청궁까지는 마차로 자그마치 이틀이 걸렸다. 현종은 겨울이 올 때마다 양귀비와 함께 화청궁에 들러 시간을 보내곤 했다.
   
   화청궁 입구에 내리면 무엇보다 먼저 군상(群像)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중앙에 육감적인 몸매의 여인이 관능적인 춤사위를 하는 모습을 금속으로 조각했다. 왼쪽에 한 남자가 그 여인에게 사랑스러운 눈길을 던지고 있다. 당 현종이다. 현종은 황제가 아닌 사랑에 빠진 한 남성에 불과했다.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언제든지 품을 수 있는 사랑하는 여인을 눈앞에서 바라보며 행복해하고 있는 남자!
   
   
▲ 해당탕 내부의 양귀비 전용 욕조.

   양귀비의 목욕탕에서 ‘상상’하다
   
   화청궁 안으로 들어섰다. 수려한 풍광을 배경으로 궁전 누각들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었다. 지금 화청궁의 건물은 모두 당나라 때의 오리지널 건물이 아니다. 안녹산은 반란을 일으킨 뒤 화청궁에 쳐들어와 불을 질러 궁전이 전소됐다. 현재는 당시 규모의 7분의 1 정도만 복원한 상태라고 한다. 그럼에도 당제국의 광휘(光輝)를 엿보는 데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당 현종의 전용 목욕탕인 연화탕, 양귀비 전용 목욕탕인 해당탕은 바로 이웃해 있다.
   
   온천탕으로 둘러싸인 마당에 있는 한 여인의 입상(立像)에 여행객이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대는 모습이 보인다. 가운을 벗고 온천탕에 들어가려는 양귀비의 나신(裸身)이다. 현종은 해당화를 좋아하는 양귀비를 위해 전용 목욕탕을 해당탕으로 명명했다. 해당탕으로 들어가 본다. 중국 4대 미녀 중 제일 앞에 서는 양귀비와 관련된 일화가 많다. ‘매일 우유 목욕을 세 번씩 했다’ ‘목욕을 자주 한 것은 암내가 심했기 때문이다’…. 해당탕의 욕조는 의외로 작았다. 바로 옆 연화탕의 욕조는 마치 대중목욕탕의 그것과 비슷했다. 여행객들은 양귀비의 욕조를 보면서 방금 전 마당에서 보았던 나신의 양귀비를 상상한다.
   
   화청궁을 한가롭게 유유자적하며 몇 걸음 거닐다 보니 문득 현종의 눈에 골치 아픈 정사(政事)가 들어올 턱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로지 양귀비와의 정사(情事)만이 관심이었으리라. 당시(唐詩)에 화청지를 소재로 한 시가 많은 것이 이곳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화청궁은 현종과 양귀비의 러브스토리 말고도 여러 가지 스토리를 갖고 있다. 그중 하나가 시안사변의 현장이다.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을 침략한 일본과 싸우는 것보다 반란군인 마오쩌둥의 공산당을 섬멸하는 게 급선무라고 보았다. 이에 동북지방 군벌 장쭤린의 아들인 장쉐량이 화청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장제스를 체포해 제2차 국공합작을 이끌어낸다. 제2국공합작으로 공산당은 간신히 명줄을 지켜 대역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장제스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장쉐량 군대의 기습을 받은 오간청 건물은 언덕 위에 있다. 당시의 총탄 자국이 건물 외벽에 선연하다. 중국 공산당에 시안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곳이다.
   
▲ 시안사변 당시 장제스가 체포된 오간청(좌). 후이족거리에서 전통음식을 파는 위구르 상인들(우).

   다음으로 가볼 곳은 후이족(回族·회족)거리. 후이민제(回民街). 이슬람교는 한자어로 회교(回敎)라고 쓴다. 서역 지방에 사는 소수민족인 위구르족(回紇族·회흘족)이 믿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후이족거리는 200여m 정도. 양쪽에 다양한 위구르족 식문화가 펼쳐진다.
   
   회교도 소수민족의 문화를 즐기려는 인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거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식재료와 음식을 요리하는 사람들의 복장이다. 특히 대부분 흰색 빵떡모자를 쓰고 있다. 호두 같은 견과류도 많이 파는데 사겠다고 결심하지 않았으면 절대 손을 대서는 안 된다. 길가 나뭇가지에 죽은 양을 걸어놓은 채 날카로운 칼로 정형을 뜨는 진귀한 모습도 볼 수 있다. 양꼬치 구이가 후이족거리의 대표 별미다. 갓난아이 손가락 굵기만 한 향나무에 양꼬치를 끼워주는 게 이채롭다. 향나무 향이 양꼬치의 풍미를 더하게 한다는 뜻이다.
   
   후이족거리는 업소마다 현판 위에 청진(淸眞)이라는 한자어가 새겨져 있으며 그 옆에 아랍어가 병기(竝記)되어 있다. 청진은 할랄(HALAL)의 한자어 표기. 즉 이슬람 율법에 따라 모든 음식과 식재료를 조리했다는 뜻이다. 후이족거리 안쪽에는 모스크도 있다.
   
   시안 여행은 최소 사흘은 잡아야 한다. 병마용, 진시황릉, 화청궁에서 여유 있게 이틀을 보내면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는다. 절대 권력, 절대 모험, 절대 사랑이 공존하는 곳이 시안이다.

출처 | 주간조선 2439호, 2442호 


 

주소: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석바위로 53번길 17 | 이메일:tntvkr@nate.com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인천 0101529' 등록
Copyright(c)tntv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