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인은 “시는 삶의 상처에서 피는 꽃이다. 문학 예술 장르의 하나로 가둘 수 없는 심장의 뉴스”라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올해 노벨문학상 발표일이었던 지난달 9일 일간지 문학 담당 기자들은 수원 광교산 자락 고은(81) 시인의 자택을 찾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 없었다. 수상할 경우를 대비해 시인 집에 진을 치는 언론의 호들갑을 비웃기라도 하듯 미국 시카고에서 시 낭송회를 열고 있었다. 돌아와서는 곧 이탈리아로 훌쩍 떠났다. 이탈리아 재단이 주는 노르슈드 국제문학상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런 고씨가 4일 오후 대중 앞에 섰다. 그의 방대한 시 작품들 가운데 명(名)시구 100개를 뽑아 펴낸 책 『시의 황홀』(RHK) 독자를 위해 출판사가 마련한 ‘국민시인 고은과의 만남’ 자리였다. 강연이 열린 서울 신촌 현대백화점 300석 홀이 청중으로 빼곡했다.
고씨는 대뜸 “나는 시를 문학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해 궁금증을 불렀다. “(시는) 심장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새로운 소식,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정신의 율동”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한국 현대문학 초창기의 세 천재, 홍명희·최남선·이광수에 대해 얘기하는 대목에서는 자신을 “한국의 문화유산, 문화재”라고 표현했다. “1908년 최남선의 신체시(新體詩)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 시작하는 현대문학 100년사의 딱 중간쯤인 58년에 등단해 이후 50여 년을 문단생활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최남선 등 1세대 문인과 직·간접적으로 어울린 몇 안 되는 생존 문인이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밉지 않은 과장, 춤사위를 연상시키는 제스처, 전류처럼 빠른 시적 직관이 번득이는 인생 통찰이 청중을 사로잡는 무기였다.
자신을 다산(多産)의 작가라고 평하는 데 대해서는 “뭘 모르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김소월·이상·윤동주 등 일부 작가의 요절과 과작(寡作·적게 씀)이 우리 문학의 체질처럼 돼 있어서 그렇지 괴테나 빅토르 위고 같은 서양의 대가들과 견줘보면 방대한 작품 생산이 바람직하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나는 아직 더 써야 한다”고 했다.
강연 마무리는 다시 시는 무엇인지에 관해서였다. 네 발에서 직립보행으로 인류의 진화 과정이 녹아 있는 듯한 사람의 일생, 죽음 직전 대부분 겪는 끔찍한 육체의 고통에 대해 얘기한 후 “시는 상처 많은 삶 속에서 나오는 꽃, 반대로 삶은 그런 시 속에 들어 있다”고 했다. 또 “인생은 혼자 사는 게 아니고 과거는 물론 미래로 연결돼 있는 만큼 후대의 삶에 공적인 책임감을 갖는 게 지금 우리 인생의 가치”라며 “현재에 충실하자”고 했다.
이날 청중의 연령층은 다양했다. 30년간 미국에 살다 올 초 영구 귀국한 미국 시민권자 최상준(59)씨는 “모국어의 저수지를 오랜만에 만난 느낌”이라고 했다. 서울여대 국문과 채진실(23)씨는 “연세가 있으신데 위트가 있어 재미있었다”고 했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