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찾은 충남 태안 안면도 할미섬에서 표범장지뱀들은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일광욕으로 체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라 온도에 민감한 표범장지뱀들이 굴 밖에 안 나오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지만, 섬을 둘러보기 시작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빠르게 움직이는 장지뱀들을 볼 수 있었다. 모래땅 곳곳에는 게가 파놓은 수직 구멍과 달리 비스듬히 파고들어간 표범장지뱀의 굴들도 눈에 띄었다.
함께 현장을 찾은 국립공원관리공단 국립공원연구원 송재영 박사는 “꼬리가 잘리거나 알을 밴 표범장지뱀은 추운 날씨나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에도 활발히 움직인다”며 “다른 개체보다 많이 먹어야 생존하고, 알을 분만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송 박사가 조심스럽게 붙잡아 확인한 표범장지뱀은 수컷과의 교미를 마쳐 배에 흉터가 남아 있는 암컷이었다. 송 박사는 “번식기인 5~6월에 수컷은 암컷을 발견하면 입으로 배를 물고 꼬리로 몸을 감은 후 교미를 한다”며 “교미를 마친 암컷에게는 배에 수컷이 문 자국이 남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황폐한 땅으로 변한 신두리 해안사구 모래지치·좀보리사초·갯방풍 등 사구 식물들이 자생하던 충남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위 사진)가 2012년 태안군청이 실시한 외래식물 제거 공사 때 1m 깊이로 파헤쳐지면서 지난달 26일 찾았을 때는 모래만 남은 황폐한 땅으로 바뀌어 있었다(아래). | 김기범 기자·서산태안환경운동연합 제공
▲ 500~700개체 사는 최대 서식지… 할미섬 일대에만 겨우 명맥 유지 해변·천변 개발 생존에 치명적 “외래식물 제거” 마구잡이 파헤쳐 전체 60% 이상 ‘사막’처럼 변해… 주홍거미·모래지치 등 전멸 위기 잘못된 보존정책, 동식물에 재앙 “빈대 잡으려고 초가 태우는 격”
몸길이가 10~12㎝가량인 표범장지뱀은 해안 사구를 비롯한 모래땅에서 주로 서식하는 도마뱀의 일종으로, 배를 제외한 몸 대부분이 표범 무늬로 덮여 있다. 장지뱀은 등의 피부가 거칠며 번식을 할 때 페로몬을 분비하는 구멍이 있는 점에서 보통 등이 매끈한 도마뱀과 구분된다.
안면읍 바람아래해변 건너편의 할미섬은 500~700개체의 표범장지뱀이 사는 국내 최대의 표범장지뱀 서식지이자 태안해안국립공원 내에서도 출입이 제한되는 특별보호구역이다. 지금 할미섬은 허가 없이 들어가면 과태료까지 부과한다. 과거엔 국내 해변과 천변에서 쉽게 볼 수 있었지만 어느덧 멸종위기에 처한 표범장지뱀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전국 바닷가가 속속 휴양지로 바뀌면서 모래밭 공사가 많아져 표범장지뱀 수도 많이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표범장지뱀은 대부분 100㎡도 안되는 면적 내에서만 이동하며 평생을 살아 넓은 면적을 파헤치는 해변·천변 개발은 치명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송 박사가 2010년 발표한 논문 <표범장지뱀의 이동거리 및 행동권 분석>을 보면 표범장지뱀의 최대 이동거리는 300m 정도이며 행동권은 84㎡가량에 불과하다.
표범장지뱀
국립공원관리공단은 할미섬의 모래땅을 늘리기 위해 섬 주변에 대나무 울타리 형태의 모래포집기를 설치했다. 바람에 날린 모래가 울타리에 부딪쳐 땅에 떨어지게 한 것이다. 공단은 태안군청이 설치한 콘크리트 옹벽도 지난해 7월 철거했다. 콘크리트 옹벽이 모래가 쌓이지 못하도록 막고, 표범장지뱀의 이동·서식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옹벽이 있었던 부분에는 좀보리사초, 통보리사초 등 다양한 사구식물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표범장지뱀은 이렇듯 할미섬에서는 서식할 만한 공간이 점점 늘고 있지만 그 밖의 지역에서는 여전히 전멸 위기에 빠져 있다. 4대강 사업은 내륙에 남아 있던 표범장지뱀 상당수를 사라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환경단체와 전문가들은 4대강 사업을 하면서 낙동강·남한강 등에서 하천정비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자연 파괴로 인해 곳곳에서 표범장지뱀들이 자취를 감췄다고 지적하고 있다.
태안 해변을 기름 범벅으로 만들었던 삼성중공업 기름 유출사고는 이 지역의 표범장지뱀을 전멸에 가까운 상태로 몰아넣었다. 송 박사는 “2007년 12월 허베이스피리트호 유류 오염사고 때 기름 범벅이 됐던 학암포 지역의 표범장지뱀들이 걱정돼 조사해봤는데 하루 종일 찾아도 서너 마리도 보기 힘들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고 당시 겨울이었던 탓에 동면 중이던 표범장지뱀들이 기름을 피하지 못하고 죽어간 것 같다”며 “다행히 최근에는 다시 수가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근엔 지자체의 그릇된 사구 보존정책이 표범장지뱀과 동식물들에게 재앙이 된 경우도 있었다.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의 해안사구에서는 2012년 태안군청이 중장비를 동원해 40만㎡ 면적의 표층 식물들을 대부분 제거해 다양한 동식물이 살아가던 땅이 사막처럼 변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태안군청은 환경단체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신두리 사구를 모래만 남은 사막으로 바꾸는 작업을 계속할 계획이다. 올해 외래식물을 제거하는 20만㎡와 2012년 공사한 면적을 더하면 사구 전체의 60% 이상이 죽음의 땅으로 변할 위기에 처한 셈이다.
모래지치(왼쪽)·주홍거미
태안군이 사구를 1m가량 깊이로 파헤치면서 내건 명분은 아까시나무·자작나무 등 외래식물 제거였다. 하지만 환경단체들은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웠다’고 비판하고 있다. 좁은 면적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표범장지뱀과 사구에 서식하는 금개구리·주홍거미·개미귀신, 그리고 모래지치 등 식물들이 전멸했을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다. 26일 함께 현장을 둘러본 서산태안환경운동연합 이평주 사무국장은 “현장 조사나 교육을 나올 때마다 쉽게 볼 수 있었던 표범장지뱀들이 태안군의 무지막지한 공사가 이뤄진 부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며 “해안사구는 원래 모래만 있는 사막 같은 곳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보호지역으로 묶여 있는 곳은 아니지만 해안사구 일부 지역을 파헤쳐 지은 현대식의 ‘신두리사구센터’도 해안사구와 인근 두웅습지가 머금고 있는 지하수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사막처럼 변해버린 신두리 사구 일부에서는 생명력이 강한 외래식물들이 다시 자라나고 있다. 이평주 사무국장은 “외래식물 제거 작업으로 다른 경쟁자들은 없어진 탓에 도리어 외래식물들만 늘어나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 해안사구
해류에 의해 해안으로 옮겨진 모래가 다시 파도에 의해 밀려올려지고, 바람의 작용으로 낮은 구릉 형태를 이루면서 생기는 지형이다. 해안사구는 자연 방파제이자 지하수 저장고, 희귀 동식물의 서식지 역할을 한다. 98만2953㎡의 충남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 해안사구는 국내 해안사구 중에서도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천연기념물 431호로 지정돼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