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 삿 갓 墓 域
江原道 寧越郡 下東面 臥石里 김삿갓 溪谷
2004年 10月 26日 土地博物館大學
김삿갓 (본이름은 김병연, 金炳淵 1807∼1863)
호는 난고(蘭皐), 속칭은 김삿갓, 김립(金笠)
당대 명문 안동 김씨 가문에서 진사(進士) 김안근(金安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고 5살 (1811)때 황해도 선천 부사로 있던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 반란군에게 투항한 후 처형당하고, 아버지마저 화병으로 돌아가신 후 어머니를 따라 곡산, 광주, 가평 등지로 도망다니다 강원도 영월 땅에서 어린시절을 숨어 살았다.
그는 조부를 규탄하는 명문으로 장원에 급제하나 할아버지를 팔아 입신양명 하려고 한 자신에 부끄러움을 느껴 글공부를 포기하고 농사를 지으며 은둔 생활을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백일장을 보기 전에는 그의 조부가 김익순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 아직 뚜렷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그러나 김삿갓은 신분 상승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지만 부패한 과거 제도에 실망을 하고 어느 세도가의 집에서 식객으로 지내던 중 그의 출신 성분이 주위에 알려지면서 제도권 진입을 포기하고 스물 다섯에 기나긴 방랑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김삿갓의 살림이라곤 얼굴을 거의 가리다시피 하는 큰 삿갓, 개나리 봇짐 하나, 그리고 대나무 지팡이가 전부였다.
어느 날 지나가던 사람이 특이한 복장을 한 김삿갓에게 물었다.
"어찌 그렇게 큰 삿갓을 쓰고 다니오? 불편하지 않소?"
"하늘 아래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몸이라 그러오. 허허허"
김삿갓은 할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으로 삿갓으로 얼굴을 가린 것이었다. 바로 이때부터 그의 본명인 김병언으로 불려지지 않고 김삿갓이라고 된 것이다. 방랑 초기에는 지방 토호나 사대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나름대로의 품위를 유지하나 세상 인심이 한결 같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점점 변방으로 밀려나고 서민들 속에 섞여서 날카로운 풍자로 상류 사회를 희롱하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으며 일생을 보낸다.
타고난 글 솜씨와 영리함으로 급제까지 했던 김삿갓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즉흥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산과 들 그리고 사람에 얽힌 그의 시는 한 수 한 수 철학이 깃들여져 있으며 풍자성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정부패를 일삼는 세도가와 거만한 부자들의 허풍을 마음껏 풍자하고 조롱하는 그의 시 속에는 당시 부당하게 대우받고 사는 가난한 백성들의 한풀이로서 충분했다. 때문에 김삿갓의 시는 가난한 백성들의 안식처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나이 쉰 일곱, 전라도 땅에서 눈을 감음으로써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일생을 마감하고 아들 익균이 유해를 영월로 옮겨 장사를 지냈다. 영월 와석리에 그의 생가 터와 묘지가 있다.
김삿갓묘가 발견되기까지
죽장에 삿갓 쓰고 전국을 떠돌던 김삿갓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1863년 3월 25일, 57세의 나이로 전라도 화순군 동복면에서 객사를 하게 된다. 부친의 행방을 찾아헤매던 익균은 부친의 유골을 자기 집 가까운 영월로 이장을 해온다.
역사적 기록은 여기까지였다. 이후 김삿갓이라는 이름은 조선 팔도의 그 어느 누구도 모르는 이 없이 세월을 뛰어넘어 전해져 내려왔지만 아무도 김삿갓의 묘에는 관심이 없었다. 까마득하게 잊혀질 뻔했던 김삿갓의 묘를 찾아낸 것은 80년대 초 영월 읍내의 유지였던 고 박영국 선생 덕택이었다.
전국으로 널린 김삿갓의 시편과 일화를 모으며 그 누구도 몰랐던 김삿갓의 시를 39편이나 더 찾아내기도 했던 선생은 영월 구석구석을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와석리 노루목에서 김삿갓의 묘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안동 김씨 대종회에서는 그 사실을 확인한 후에 사초를 하고 정식으로 묘비를 세우게 되었다. 그것이 84년도의 일이다.
영월읍내에서 와석의 노루목까지는 70리길. 당시만 해도 노루목까지 가려면 버스를 타고 와석까지 가서 거기서부터 20리 산길을 걸어가야 했다. 지금은 그 산길 20리 계곡이 김삿갓계곡이라 하여 모두 포장되어 묘역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지만 말이다.
발견 이듬해인 85년 9월에 소설가 정비석은 <소설 김삿갓>을 쓰기 위해 그에 앞서 일흔다섯의 노구를 무릅쓰고 김삿갓묘를 찾게 되는데 그 일화가 매우 재미있다.
영월읍에서 하동면 와석리까지는 70리밖에 안 된다기에, 지프라면 쉽게 다녀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50리쯤 가면 제법 큰 개울이 있는데, 만약 지프가 못 건너가게 되면 사람은 옷을 벗고 건너가, 20리쯤은 걸어서 다녀와야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70을 넘은 늙은이가 옷을 벗고 물을 건넌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질색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일행은 천신만고하여 마침내 와석리의 노루목 마을에 도착하였다. 마을이라는 것은 이름뿐이고, 개울가 좌우편 언덕배기에 서너 채의 집이 쓸쓸하게 매달려 있을 뿐인 곳이었다.
박영국씨가 경사진 언덕배기 위로 달려 올라가더니, 화전 한 귀퉁이에 오직 하나뿐인 무덤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이 무덤이 바로 김삿갓의 무덤입니다."
첫눈에 보아도 외롭기 짝없는 무덤이었다. 그 무덤 앞에는 높이가 두어 자 가량 되어보이는 묘비가 서 있는데 그 묘비에는 "蘭皐 金炳淵之墓"라는 일곱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렇듯 김삿갓묘는 발견되고 나서도 접근하기 어려운 점으로 인하여 한동안 관리도 소홀하게 이루어졌으며 찾는 이들도 뜸한 편이었다. 그러던 것이 90년대 초부터 진입로 공사가 이루어지고 묘지 부근 밭을 모두 사들여 묘역일원을 개발하면서부터 전국에서 시인을 기리는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98년에 제1회 난고 김삿갓문화 큰잔치가 개최된 이후 매년 10월이면 묘역일원에서 문화제가 열리며, 근처에 김삿갓문학 기념관이 건립예정이고, 그리고 좀 더 들어간 골짜기에 김삿갓 생가가 복원 예정에 있다.
알려진 김삿갓 방량코스 또는 유적지
ㆍ출생지 : 경기도 양주군 회동면
ㆍ영월의 집터 : 영월군 하동면 어둔리 선래골(선낙동)
– 생가복원 예정
ㆍ묘소 :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 – 향토박물관 건립 예정
ㆍ기념시비 : 충북 단양군 영춘면 (강원도 남부와 접경지역), 광주 무등산 공원
ㆍ말년을 보내며 생을 마친곳 : 전남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 적벽(赤壁) 초분지와 망향정이 있음
ㆍ시(詩)에 나타난 곳 : 금강산 내긍강 등
ㆍ김삿갓 계곡-묘역(6km) : 김삿갓 문화의 거리 조성
ㆍ홍경래난에 따른 피신코스 : 황해도 곡산, 경기도 가평, 경기도 광주, 강원도 영월 三玉里

김삿갓 유머 詩
◈ 自知면 晩知고, 補知면 早知라.◈
자지면 만지고, 보지면 조지라.
자지면(自知) - 스스로 알고자 하면 만지고(晩知) - 깨달음이 늦고
보지면(補知) - 도움을 받아 알고자 하면 조지라(早知) - 그 깨우침이 쉬우니라.
풀이 : 혼자 알려고 하면 늦게 알고, 도움을 받아 알려고 하면 일찍 알게 된다.
<충북 김삿갓의 묘비>

◈ 서당 욕설시(辱說某書堂) ◈
- 김삿갓 (1807~1863) - 본명:金炳淵
어느 추운 겨울날 김삿갓이 시골 서당에 찾아가 재워주기를 청하나
훈장은 미친 개 취급을 하며 내쫓는다.
화가 치민 김삿갓이 더러운 욕설시를 한 수 써 붙이고 나온다.
書堂來早知
서 당 내 조 지 (서당은 내좆이요)....... ..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왔는데
房中皆尊物
방 중 개 존 물 (방중은 개 좆물라)........ 방안엔 모두 높은 분들 뿐이고.
生徒諸未十
생 도 제 미 십 (생도는 제미십이고)..... 학생은 모두 열 명도 안 되는데
先生來不謁
선 생 내 불 알 (선생은 내 불알이다)... 선생은 찾아와 보지도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