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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은밀하고 위대하게 나라를 구한 신호 봉수대와 연대
글쓴이 문화재방송.한국 등록일 [2021.06.29]

은밀하고 위대하게 나라를 구한 신호 봉수대와 연대 인간은 ‘정보를 주고받으며(통신하며)’ 사회를 유지, 발전시킨다. ‘통신’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일에서 그만큼 중요한 요소다. 때론 국란에 맞서고자 하는 ‘의지’를 지키고 잘 전달하는 데도 필요하다. 세월이 흘러 기술적인 면은 변화했지만 그 본질은 여전하다. 01.경상남도 시도기념물 양산원적산봉수대

통신의 기본, ‘시각’

별다른 통신시설과 장비가 없었던 과거에 원거리에서 가장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통신 방법은 불[烽]과 연기[燧], 깃발 등을 이용한 시각통신이었다. 물론 역마나 인편의 방법도 있었으나 이들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효율성이 떨어져 급변하는 상황이나 정보를 더 빨리, 더 멀리 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나라가 위급한 시기에는 낮엔 연기, 밤엔 불빛만큼 쉽고 빠르게 적의 침입이나 전쟁 등의 소식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란 어려웠다. 고대에 봉수통신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폭넓게 사용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봉수통신이 도입된 시기는 기록상 고려 중기라고 하고 있으나 짐작하건대 고대부터 사용되었으리라 판단된다. 위쪽으로는 요동 지역과 접하고 아래로는 삼면이 바다와 접해 있는 국토의 특징상 모든 권력이 집중된 중앙간 통신은 시대를 불문하고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봉수의 활용 및 명칭에 관련된 기록이 다수 언급되어 있고, 또한 중국에서도 한대 이전에 봉수제가 성립되었음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에는 어떻게든 봉수통신이 사용되었으리라 짐작된다. 다만 당시에는 불과 연기를 다루는 방법과 연대 축조 기술이 미흡하여 그 활용 정도가 조선시대 봉수대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봉수통신이 국가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제도화된 것은 조선시대였다. 세종대왕 때 봉수의 거화법과 관계규식이 확립되었는데 이는 『세종실록』과 『경국대전』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연기와 불을 이용하는 봉수통신의 실효성은 봉수군의 사명의식과 기후 상황에 많이 의존하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왜란과 호란의 양난을 겪으며 봉수의 허실에 많은 논란이 제기되었으나 대체 가능한 통신수단이 마땅찮은 상황에서 봉수제의 근본적 모순과 운영상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방향으로 정책이 전환되었다. 각자거화론, 봉수의 이설과 가설, 파발제 도입, 화포설치론 등이 그 예이다.


02.울산광역시기념물 우가산유포봉수대 03.제주 토산봉수

통신시설이자 최전방 병참기지로

봉수대는 통신시설 기능뿐만 아니라 특히 변경에서는 최전방 병참기지 역할도 수행해야 했다. 인구가 그리 많지 않은 당시의 사정상 북로남왜의 침입으로부터 국토를 효율적으로 지키기 위해선 경보시설인 봉수대와 방어시설인 성곽이 연계·운용되어야 상호 보완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압록강과 두만강 연변의 봉수대는 진보(鎭堡)와 인접해 배치되었고 남동해안의 봉수대는 수군진이나 연해읍성과 연계되었다.


한편 제주도에 가면 육지의 봉수제도와 조금 다른 모습을 S볼 수 있다. 조선 전기부터 제주도에도 해안을 따라 섬 전체를 일주하는 25개소의 연변봉수대가 축조되었다. 연변봉수대는 대부분 한라산의 기생화산인 오름에 설치되었는데 지형적 특성상 상호 간격이 지나치게 멀거나 해안으로부터 다소 떨어진 내지에 위치하여 바다를 조망하기 어려운 곳도 있었다. 따라서 봉수대와 봉수대 사이에 연대라고 부르는 소규모 통신시설을 해안에 촘촘하게 배치하여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였다. 봉수대와 연대는 환해장성, 수군진성과 더불어 조선시대 왜구로부터 제주 지역의 백성과 영토를 굳건히 지킨 군사시설물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전통건축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주거, 사찰, 서원 같은 생활밀착형 문화재를 먼저 떠올리지만 5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묵묵히 국가와 백성을 지켜 온 봉수대의 역사문화적 가치와 그 활용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시점에 서있다. 나아가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통신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역사적 토양이 되어 준 전국의 봉수유적을 국가적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관리하려는 노력에도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글. 남상욱(호산대 교수, 대구광역시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 사진. 이철영(가운문화유산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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