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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전쟁의 상흔이 켜켜이 쌓인 산성들
글쓴이 tntv 등록일 [2020.06.09]

 

전쟁의 상흔이 켜켜이 쌓인 산성들 누구나 전쟁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인류 역사의 9할은 전쟁이었고 그 나머지 시간 역시 다음 전쟁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사람들은 왜 전쟁을 일으켰을까? 그들은 어떻게 전쟁을 하고 어떤 결과를 얻었을까? 그리고 전쟁의 순간마다 어떤 사람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까? 01.사적 제353호 담양 금성산성. 삼국시대에 처음 쌓았고, 조선시대에 성의 면모를 갖추었다. 현재는 동·서·남·북문의 터가 남아 있다. ⓒ문화재청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일까?

우리는 역사 속의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혹시 적의 군대가 쳐들어와서 마을을 불사르는 사이 우왕좌왕하다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을 연상하지는 않을까? 그 때문에 우리 민족이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외적에게 끊임없이 피해를 보았다는 ‘패배’ 의식에 사로잡혔던 것은 아닐까? 사실, 우리에게도 침략적 성격을 지닌 전쟁이 있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의 영토 확장, 고려와 조선의 영토 확장에 따른 여진 복속, 대마도 정벌 등이 그러한 사례다. 그리고 크고 작은 내란 역시 우리 역사 속에 있어 왔다. 또 열강의 소용돌이를 겪은 우리는 국권을 지키기 위해 농민전쟁이나 의병전쟁, 국권상실과 독립을 위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우리가 겪은 가장 최근의 전쟁은 6·25전쟁이다.


우리의 방어 전략은 ‘청야입보(淸野入保) 이일대로(以逸待勞)’

고대국가의 전쟁은 대부분 국가 간의 침략전쟁이었다. 고조선이 한나라, 연나라와 벌인 전쟁, 삼국시대 고구려를 비롯한 신라, 백제 등이 벌인 전쟁 형태는 성을 빼앗고, 주민을 굴복시켜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고려시대는 거란(요) 전쟁, 여진 정벌, 몽골전쟁, 홍건적 및 왜구 토벌 등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였다. 고려 때 외적을 막는 전략은 주로 방어전 형태의 농성전(籠城戰)이었다.


‘청야입보(淸野入保) 이일대로(以逸待勞)’의 전법은 적이 침입하면 모든 식량을 없애거나 성으로 반입한 후 성을 통하여 장기적인 저항에 돌입하는 것이다. ‘안시성 싸움’(645년)에서 알 수 있듯이 수와 당나라 항쟁에서 성공을 거뒀고, 고려 때에는 거란 및 몽골 항쟁에서도 적용됐다. 주로 북방민족을 대상으로 했고, 수성전(守城戰)이었다. 한반도 전체에 산재한 산성이 그 흔적이다.


02.구주성 남문전경 북한 평안북도 구성시 구성읍에 있는 고려전기 서희가 구축한 석축 성곽이다.ⓒ문화재청  03.경기도기념물 제69호 안성 죽주산성 236년(고종 23) 죽주방호별감 송문주가 몽골군과 15일간 전투를 치러 승리한 곳이다. ⓒ문화재청

고려의 수성전이 빛을 발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박서(朴犀)가 이끈 구주성(龜州城) 전투를 꼽는다. 1231년 몽골군은 고려를 침입해 4개월이 넘도록 구주성을 맹렬히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한다. 그러나 1231년 12월 개경 정부가 몽골과 강화를 체결하고 구주성에 사신을 보내 투항할 것을 독촉하자, 결국 박서는 1232년 1월에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 이러한 구주성전투의 승리에 대해 조선시대 역사서인 『동국통감(東國通鑑)』은 우리나라 수성전(守城戰)에서 안시성전투 다음으로 빛나는 승전이라 평가하고 있다.


값진 승리와 함께한 사람들

이민족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려주었던 그 치열한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용인 처인성(몽골전쟁) / 경기도 기념물 제44호

흙으로 쌓은 산성이자 군창(軍倉)을 보호하기 위한 성으로 알려져 있다. 1232년(고종 19) 몽골군의 수장인 사르타이(撒禮塔)가 수주(水州: 수원)에 예속됐던 처인부곡(處仁部曲)의 조그마한 처인성에 도달했을 때 이곳에서 백현원(白峴院)의 승려 김윤후(金允侯)에게 화살을 맞아 죽었다. 장수를 잃은 몽골군은 전의를 상실했고, 부장 철가(鐵哥)의 인솔 하에 서둘러 북으로 철수한다. 처인성 승리로 김윤후는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섭랑장(攝將)이 된다. 뒤에 충주산성 방호별감에 임명돼 병사와 관노(官奴)를 이끌고 몽골군과 70일을 싸워 승리를 이끌었다.


안성 죽주산성(몽골전쟁) / 경기도 기념물 제69호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외성, 중성, 내성의 3중 구조로 축조되었다. 인근 여러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몽골군의 제3차 침입 때인 1236년 9월 죽주 방호별감 송문주(宋文)가 몽골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성 안 사람들은 송문주를 ‘신명(神明)’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송문주를 기리는 사당인 충의사(忠義祠)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군에게 큰 피해를 남기기도 했는데 선조 때 이덕형(李德馨)은 죽주산성을 가리켜 ‘단 한 명의 군사로도 적을 막을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오산 독산성(임진왜란) / 사적 제140호

백제가 쌓았던 성으로 알려져 있다. 1592년 12월 말 오산 독산성(禿山城)전투에서 전라도관찰사 겸 순변사로 임명된 권율(權慄) 장군은 장수와 의병 1만 명을 이끌고, 일본군 병력 2만 명을 상대로 5일간 싸워 승리했다. 한강 이남의 서로(西路)를 확보했을 뿐 아니라 조선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던 전투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 성의 중요성이 강조되자 1602년(선조 35) 변응성(邊應星)을 수축했고, 1796년(정조20) 수원성 축조와 함께 개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담양 금성산성(동학, 한말 의병) / 사적 제353호

전라남도 장성의 입암산성, 전라북도 무주의 적상산성과 함께 ‘호남 3처산성(三處山城)’으로 불린다. 동학농민운동을 이끌던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이 1894년 11월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에 패배한 이후 이곳에서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옛 친구이자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관군에 체포되고 만다. 이듬해 전봉준이 처형될 때 금성산성도 불태워져 성문터만 남았다.


6년 뒤인 1908년 정미의병 때, 이 산성은 일본군에 맞서 나라를 지키려 한 의병들의 구심점이 된다. 기삼연(奇參衍)이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이곳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고자 했으나 이를 눈치챈 일본군의 급습으로 의병 30여 명이 죽고, 많은 이가 부상했다. 기삼연도 현장에서 벗어나 순창의 재종제인 기구연(奇九衍)의 집에서 피신했으나 일본군에게 잡혀 재판도 거치지 않고 광주 서천교 백사장에서 총살당했다.


04.사적 제140호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 백제 시기에 축성된 고성(古城)으로 임진왜란때 권율 장군이 백마를 쌀로 세마시켜 식수가 풍부한 것으로 오인하게 해 퇴각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문화재청

전쟁은 나쁜 것, 평화는 좋은 것, 이것이 다는 아니다!

착한 전쟁, 나쁜 평화도 있을까?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 편에서 보면 모든 전쟁은 자국의 평화와 관련한 정당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느 한쪽의 평화가 언제나 진정한 평화, 모든 이의 평화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불가피한 전쟁, 즉 피의 냄새를 딛고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주는 전쟁이 있다. 그리고 전쟁이 가져다주는 성과도 있다. 식민지의 독립 전쟁이나 다른 나라의 침략에 맞서는 전쟁이 그러하다. 그런가 하면,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욕심을 위해 평화의 탈을 쓰고 치르는 전쟁도 있다.


우리가 역사 속의 전쟁사를 통해 강성함과 웅대함을 얻기 위해서는 엄청난 죽음과 고통을 경험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우리는 지난한 전쟁과 항쟁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지구상 유일한 냉전의 섬에 살고 있는, 전쟁 세대들 밑에서 교육받고 자란 우리에게 전쟁은 끔찍하고 억울한 ‘재앙’일 뿐이다. 마냥 평화의 절실함을 외쳐왔을 뿐, 전쟁의 참모습에 대해서는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판단을 유보해 왔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평화의 메시지는 달라야 한다.


역사 속에서 전쟁과 평화의 다면적인 모습을 통해 평화로 가는 길을 고민하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전쟁의 참 교훈일 것이다. 우리 앞 시대가 겪은 6·25전쟁은 점점 멀어져 간다. 그리고 우리 역사 속 그 옛날에 있었던 이민족과의 전쟁 참화 또한 무너진 산성처럼 그 흔적이 사라져 간다. 무너져 내린 산성과 복원된 산성 위에 서서 가족과 내 땅을 지켜냈던 관군과 의병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던 우리의 선조들을 기억해 봄직하다. ‘방어할 힘’이 있어야 하고, ‘방어할 힘보다는 공격할 힘’이 있어야 평화를 얻어낼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글. 홍영의(국민대 한국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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