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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亂中日記의 현장을 가다<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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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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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ntv |
등록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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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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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답사기]亂中日記의 현장을 가다<3>
―板屋船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배의 밑면이 평탄한 平底船(평저선)이죠. 평저선은 尖底船(첨저선)에 비해 물 속에 잠기는 吃水(흘수)
가 깊지 않고 선회반경이 작아 배의 움직임이 자유로운 것이 특징입니다』
―판옥선의 핵심부분인 板屋의 구조는 어떠했습니까.
『갑판 위에 上粧(상장)갑판을 설치하
고 그 좌우에 女牆(여장: 성가퀴)을 설
치한 겁니다. 이 구조는 戰船에 승선한
전투원과 非전투원을 구분하여 전투원
은 上粧갑판 위에, 非전투원은 上·下 갑
판 사이에 위치하도록 함으로써 적의 공
격에 노출되지 않는 장점이 있었죠』
―판옥선의 크기는 얼마쯤 되었을까요. 『壬亂 당시 사용된 戰船의 크기에 관
한 기록에 의하면 일반 판옥선의 경우
底板(저판)의 길이가 15∼21m였습니다. 승선인원은 100명 안팎이었죠』
―일본의 주력 軍船(군선)인 安宅船(안택선: 아타케)이나 關船(관선: 세키부네)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판옥선은 일본의 아타케나 세키부네에 비해 선체가 높아 왜구 이래 일본 수군의 자랑인 登船肉薄戰術
(등선육박전술)을 어렵게 한 것이죠. 또 판옥선은 일본 軍船에 비해 강한 구조를 가졌어요. 外板(외판)의
겹이음 구조와 木釘(목정; 나무못)을 이용한 결과, 강도에서 일본 軍船을 압도한 거죠』
―일본 군선은 구조물의 이음새 부분을 凹凸로 만들어 서로 끼우고 「ㄷ」자 형 꺾쇠로 양쪽을 이었죠. 건
축가들은 그걸 우리말로 「사춤 넣기」, 영어로 Dove-tail join이라고 하더군요. 일본 함선은 우리 판옥선
과 부딪치기만 하면 깨져 버렸죠.
『난중일기에 「中船」이라고 표현된 關船은 壬亂에 참전한 일본 군선들 중에 가장 많았는데, 조선의 판
옥선보다 크기와 높이가 모두 작았죠. 이 때문
에 일본 수군은 판옥선에 뛰어올라 그들의 장기
로 삼는 칼싸움을 벌이는 데 실패했고, 오히려
높은 위치에서 날아오는 판옥선의 화살 공격에
고전했던 겁니다』
―난중일기에 「大船」이라고 표현된 安宅船은 어떠했습니까.
『크기는 대체로 조선의 판옥선과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택선은 대개 大將船이거나 指揮船(지
휘선)이었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고, 특히 갑판 위의 2·3층 누각은 화포 공격의 타깃이 되
었어요』
火砲에서 日本水軍 압도
―판옥선과 安宅船, 어느 쪽의 속력이 빨랐다고 보십니까.
『당시 양국 軍船 간에 속도 차이는 별로 없었
습니다. 선박의 속도는 櫓役(노역) 방법과 帆裝
(범장)에 의해서도 좌우됩니다. 판옥선은 돛이
두 개인데, 일본 군선은 대개 하나였어요. 또 판
옥선의 경우 櫓 한 자루에 4∼5명이 배치되었는
데, 일본 군선에서는 한 명이 원칙이었습니다』
―일본 수군은 해적 집단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겠죠. 예컨대 히데요시의 직속 水軍을 대표하는 구키
(九鬼嘉隆),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와의 전투에서 사살된 구루시마(來島通之) 형제, 그 밖에 스가(菅達長),
호리우치(堀內氏善) 등 다수의 수군장들이 해적 출신이었거든요.
『일본의 해적 집단들은 戰國시대를 지나면서 통일정권 휘하의 직속 수군, 혹은 지방 다이묘에 속한 수군
으로 재편되었죠.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는 壬亂에 참전한 수군 편성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이것이 일본
수군이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확립하지 못한 한계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왜군은 이미 3교대에 의한 연속사격 등의 전술에 숙달해 있었죠. 일본은 1543년 種子島(종자도)로 표류
한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鳥銃(조총)을 입수한 이래 꾸준히 개량하여 實戰(실전)에 사용하면서 대량생산
체제에 들어갔어요. 임진왜란 도발 당시 조총은 세계에서 가장 명중률이 높은 소총이었습니다. 조총을 가
진 왜군은 육상전투에서 연전연승했는데, 왜 이순신 함대와의 해전에선 연전연패했을까요.
『조총의 명중률이 높다지만 물결 때문에 흔들리는 해상에선 조준사격이 어렵고, 유효사거리도 50m여서
조선의 화포에 비해 위력과 사정거리가 뒤졌거든요. 조선은 1555년 을묘왜변 이후 1563년(명종 18년)까
지 화포 제조에 거국적인 노력을 기울여 적어도 10만 근 이상의 銅鐵(동철)을 소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특히 명종 12년부터는 해전에 사용할 天·地·玄·黃字 등의 대형 화포를 제작했는데, 이때 만든 총통류가 임
란 해전에서 사용되었어요』
―그런데도 임란의 초전에 경상좌수사 朴泓(박
홍)과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 싸워보지도 않고
戰船들을 불태우고 도주했을까요.
『700여 척의 왜선이 새까맣게 몰려오니 박홍
과 원균은 싸우기기도 전에 워-포비아(war-
phobia: 전쟁공포증)에 걸린 것입니다』
―박홍과 원균의 함대는 기습을 받고 휘하의 僉使營(첨사영)·萬戶營(만호영)의 戰船을 한 번 집결시켜 보
지도 못한 채 궤멸했어요. 만약 이순신이 임란 발발 당시 경상좌수사 혹은 경상우수사였다면 상황이 어떠
했을까요.
『적어도 박홍이나 원균 같지 않았을 거예요. 이순신은 7년 전쟁기간을 통해 적 함대의 동향을 항상 먼저
알고 있었습니다. 기습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名將의 조건이죠. 그리고 이순신은 신중하여 불가피한 경우
가 아니면 이길 만한 곳으로 적을 끌어들여 싸웠어요. 특히 임란 초년도인 1592년의 전투에서 이순신의 전
공은 눈부셨어요. 10전10승을 했습니다. 특히 한산해전에서는 일본의 정예함대와 싸워 완승을 거두었죠
. 그 결과 南海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곡창 전라도 방어와 局面 전환을 달성할 수 있었어요』
7월24일 오전 7시 해군부두에 도착하여 30분 만에 「비로봉함」에 승선을 완료했다. 배수톤수로 2660t
이라니까 상선이라면 5000중량톤쯤 되는 상륙함(LST)이다. LST는 자동차 전용선처럼 船首를 열고 그 통
로로 사람이나 차량 등을 실어 흔히 「아가리」라고 불린다.
출처:월간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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