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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희양산문(曦陽山門)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
글쓴이 tntv 등록일 [2020.10.27]

희양산문(曦陽山門)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


신라말 교리적인 교종 불교에 신선한 충격을 주며 전파되어 새로운 사상으로 유행처럼 번져나간 선종(禪宗). 구산선문으로 자리 잡아 전해져온 이야기의 세 번째는 희양산문 봉암사이다. 그런데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의 봉암사는 우리가 가고 다고 가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입지적인 위치도 교통이 불편한 곳이지만 그보다는 지금도 참선과 수도에 정진하는 수행도량으로 지정되어 그 일대가 성역화 되었으며 연중(초파일 하루를 제외하고는) 일반인은 물론 재가불자의 출입도 금하고 있는 곳이다.

지금까지 방방곡곡 산속이나 대처 가까이에 위치한 절집들을 다니면서 입장료가 있거나 없거나 할 뿐 사찰 내에서 어느 지역에 한하여 출입을 제한하는 경우는 보았지만 아예 못 들어간다는 절은 처음이다. 일 년 내 산문을 걸어 잠그고 속세의 발걸음을 거절하는 절집이라면 왠지 더 궁금한 법. 구산선문의 희양산문 봉암사가 그 대표적이니 학수고대 가볼 날만 기다리다가 부처님오신 날에 가본 이야기이다.


희양산문(曦陽山門)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

그런데 나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초파일만 기다렸다가 몰려드니 이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린이날 대공원 앞 못지않은 교통체증과 넘치는 인파에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아예 전날 근처에 와서 일박하고 새벽에 들어서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니 그래도 봉암사는 절집 문고리만 만져도 성불하고 소원을 이룬다는 소문에 감지덕지 다녀왔지만 그 덕에 차분한 답사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평시 폐쇄된 영역 탓인지 방문객을 위한 안내판이나 표지, 설명판 등은 태부족하여 곱절로 어려운 답사였다. 그래도 365일 중 하루, 유일하게 허락한다니 즐거운 마음으로 다녀온 희양산 봉암사 이야기이다.

▲절집까지 내 차로 가는 건 불가능하다. 희양초등학교 앞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십 리길은 가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청정수행도량에다 삼엄하게 지키는 성역화된 절집이라 하여도 자본주의는 이길 수 없는지 절집 앞으로 흐르는 개울을 따라 그 주변에는 흔한 모습의 식당들이 줄지어 있었다. 초파일 방문객만을 보고 차린 것은 아닌 듯, 평소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절집 바로 앞까지 와서는 놀다 가는 듯하였는데 어째 소문에 듣던 청정함이나 경외심 같은 것이 무시되는 풍광이다.

▲개울가를 따라 흔한 모습의 음식점들이 평상을 깔고 장사중이다. 커다란 너럭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夜遊岩(야유암). 낮도 모자라 '밤에도 노는 바위?'라는 뜻으로 최치원의 글씨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평상시 출입이 통제되고 초파일 하루만 열리다 보니 다행인지(?) 입장료는 받지 않는다. 알고 보면 이곳 봉암사는 최치원의 사산비명중 하나가 있는 곳으로 매우 다양한 국보와 보물 등의 문화재가 있는 곳이다. 우리 같은 평범한 답사꾼들에게 수행도량의 무게는 잘 전해오지 않으나 그 안에 담겨진 문화재와 그들이 안고 있는 역사와 문화, 관련 인물들의 이야기가 더욱 실감나고 소중한 법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절집으로 들어서니 첫 관문이 일주문이다.

▲봉암사 일주문. 세운 지 오래된 것 같지는 않다. 내부에는 용 무늬를 화려하게 그려놓았고, 뒤쪽에는 '봉황문'이라는 현판이 있다.

조금 더 오붓한 분위기를 즐기며 걸어 올라가니 절집으로 건너가는 시멘트 다리가 나온다. 속세를 벗어 불국(佛國)으로 들어서는 피안교인지? 일주문 앞에 있었으면 좋으련만 선후야 아무려면 어떠랴 성큼 건넌다. 이 다리를 건너지 않고 물줄기를 따라 계속 올라가면 백운대 마애보살좌상으로 직접 갈 수 있다.

▲다리에는 龍湫洞天(용추동천)이라고 쓰여 있다. 洞天(동천)사상은 도교에서 온것인데….
다리를 건너니 거대한 건물이 앞을 가로막는데 2층 누문(樓門) 형식의 남훈루(南薰樓)이다. 대부분 절집의 누각이 오르막 지형에 누문을 두어 그 아래로 올라서는 형국으로 금당으로 가게끔 되어있는데 이곳은 평지에 울타리처럼 세워진 모습이다. 남훈루 너머로 멀리 햇빛에 밝게 빛나는 바위산 희양산이 보인다.

▲다리를 건너면 관문처럼 거대한 2층 누문 南薰樓(남훈루)가 앞을 막는다. 새로 지은 티가 역력하다.
▲남훈루를 비켜 뒤쪽을 보니 멀리 희양산이 보이고 대웅전 앞마당에는 초파일을 맞아 하얀 등이 가득 걸려있다. 하얀 철쭉과 어우러진 하얀 백등이 특이한데 왜 유독 백등을 다는지 미처 묻지 못했다. 일설에는 수행하기도 모자라는 언제 갖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알록달록 다양한 등을 만들어 매달겠느냐는 말인데 수긍이 가는 이야기이다.
봉암사(鳳巖寺) 역사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879) 도헌 지증대사가 창건하였다. 당시 심충거사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는데 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을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훑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싸여있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고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지었다고 한다.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개산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 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그 후 후삼국의 대립 갈등으로 절이 전화를 입어 폐허화되고 극락전만 남았을 때인 고려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다. 조선조 세종대왕 때 험허당 기화 스님이 절을 중수한 뒤 머물면서 원각경소를 저술하였고. 1674년 다시 소실된 절을 신화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703년 다시 중건하였으나 이후 크게 쇠퇴하였다.

구한말 1907년 의병전쟁 때에 다시 전화를 입어 극락전과 백련암만 남고 전소되었다. 1915년 윤세욱 스님이 요사와 영각, 창고 3동을 신축하였고, 1927년에는 지증대사의 비각과 익랑을 세웠다. 근래에 들어 당시 조실을 지낸 전 조계종 종정 서암 스님과 주지 동춘 스님 후임 원행, 법연 스님 등의 원력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여 수행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지증대사 적조탑, 지증대사적조탑비, 정진대사 원오탑, 정진대사 원오탑비, 봉암사 삼층석탑 등의 국보 및 보물급 문화재가 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봉암사는 오래되긴 하였으나 수차례 불타고 피폐해져 온전하게 전해지는 건물은 극락전뿐이며, 중앙의 대웅보전은 1992년에 중창불사로 새로 지은 건물이고 오래전에는 금색전 자리가 금당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일체의 개방 없이 산문을 닫아걸고 수행에 정진한다는 절집이라면 응당(?) 고색창연할 줄 알았는데 이곳도 역시 최근의 중창불사에 힘입어 크고 화려한 건물들이 많아 내심 실망한 것도 사실이다.

▲대웅보전. 초파일을 맞아 큰스님이 설법 중인데 앞마당에는 봉암사 특유의 흰색 등이 가득하다.
▲앞마당에는 좌우로 2개. 밤에 관솔불을 밝히는 노주석이 보인다. 제법 오래된 석물이다.

대웅보전 오른쪽 뒷편으로는 정사각형 2층건물처럼 보이는 극락전이 있다. 네모 지붕은 사모지붕이라고 하며 그 위로는 탑의 상륜부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절병이라고 한다. 정면과 측면 모두 세 칸이나 가운데 한 칸만 방을 들였기에 그야말로 단칸방 전각이다. 17세기에 불타서 다시 지으면서 두겹지붕을 지닌 1층으로 지었다고 한다. 그래도 봉암사에서는 가장 오랜 건물이다.

▲목탑 자리에 다시 세웠을 것으로 보는 극락전. 변형된 목탑일 것이다. 경순왕이 견훤에게 쫓겨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봉암사에는 국보 하나, 보물 5개가 있는데 가장 먼저 지증대사 탑(보물 제137호)과 탑비(국보 제315호)를 찾았다. 지증대사 탑은 부도를 말하며 봉암사의 유래와 지증대사 일대기를 새긴 탑비와 함께 한 세트로 보호각을 지어 관리중이다.

지증대사(知證大師) (824~882년) 이름은 도헌(道憲), 자는 지선(智詵), 속성은 김 씨로 경주사람이며 심충거사의 희사로 이곳에 절을 지은 창건주이다. 경문왕의 부름에도 나아가지 않고 879년에 봉암사를 창건하였으며 3년 뒤인 882년 12월 18일, 저녁 공양을 마치고 제자들과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하던 중 가부좌로 열반하니 세수 59세, 법랍 43년이었다.

대사의 열반 이틀후 현계산에 임시빈소를 차리고, 이듬해 봉암사에서 다비 후 부도를 세웠다. 3년 뒤, 헌강왕은 대사에게 시호를 지증(智證), 부도 명칭은 적조(寂照)라고 내려주었으며, 최치원에게 대사의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최치원은 무려 8년 후에야(그때는 헌강왕이 죽고, 진성여왕 6년인 892년) 일대기를 작성하였고, 33년이 지난 924년에 부도비가 세워졌다.

▲대웅보전 왼쪽에 보호각을 세워 적조탑과 비를 관리하고 있다.
▲건립 연대와 주인이 분명한 적조탑 모습. 보기 드문 명품이다.
승탑 옆에 탑비는 몸체가 많이 손상되어 지지대로 받쳐 놓았는데 측면과 뒷면은 그 정도가 심하였다. 이 비석은 원래 보물 제138호였으나 그 중요성을 인정하여 국보로 승격됨으로써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 중 훼손된 경주 숭복사비를 제외한 나머지 3개가 모두 국보로 지정되게 되었다. 비록 이곳 봉암사 지증대사비가 가장 늦게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모든 글자를 알아볼 정도로 온전하게 남아있다 하여 남한에 현존하는 최고의 금석문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다. 반가운 마음에 들여다본다.

비석은 최치원이 지은 비문을 芬黃寺 釋慧江 書幷刻字 歲八十三 (분황사 석혜강 서병각자 세팔십삼), 즉 분황사 스님 혜강이 83세에 쓰고 새겼다고 씌여져 있으며, 비문 정식명칭은 有唐 新羅國 故鳳巖寺 敎諡 智證大師 寂照之塔碑銘 (유당 신라국 고봉암사 교시 지증대사 적조지탑비명)이다. 조선시대 비문 첫머리가 有明(유명)으로 시작하는것에 대비하여 有唐(유당)으로 시작함이 눈에 띈다. 고운 최치원은 지증대사가 열반에 듦에 嗚呼 星廻上天 月落大海(오호 성회상천 월락대해) '오호라!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로 빠졌다'라고 표현하여 비석에 새겼다고 한다.

▲국보 제315호 적조탑비. 파손 방지를 위해 철제 테두리를 두르고 철봉으로 뒷면을 받쳐 세웠다.
적조탑과 적조비 아래로는 금색전(金色殿)이 있고 그 앞마당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금색전은 금당의 부처님은 대개가 금색을 입히는 개금불사를 봉행하게 되는데 그래서 부처님이 계신 전각을 금색전이라 불렀으니 즉, 금색전은 대웅전과 같은 말이다. 그 증거로 금색전의 뒷면에는 생뚱맞게 '대웅전'현판이 걸려있다.

▲금색전 앞마당에 서있는 삼층석탑(보물 제169호). 국내에서 몇 안 되게 상륜부가 온전하게 남아있는 탑이다.
▲금색전 뒤에는 대웅전 현판이 걸려있다.
▲비로전도 아닌데 전각안에는 석가모니 대신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화엄종 사찰의 정전이었던것일까?
재미있는 이야기로는 봉암사 개창 당시에 이곳에는 철불 2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중 한구는 땅속에 묻혀있다고 하며, 실제로 얼마 전에 파괴된 철불이 있었으나 부서진 것이라고 고물로 팔아버렸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온다.

봉암사 경내에서 볼 수 있는 지증대사 탑과 탑비 (적조탑, 적조비), 금색전 앞 삼층석탑, 대웅전과 앞마당의 노주석 2개, 그리고 극락전까지 둘러보았다. 이제 나머지 볼 것들은 절 밖으로 나가야 한다. 물론 절집을 둘러싼 완고한 담장은 없었지만 아무 곳에도 안내 간판 하나 없어서 탐방객들이 찾아다니기가 매우 불편하였다. 우리가 보려고 하는 것은 절집 좌측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볼 수 있는 마애보살좌상과 절집 오른쪽 능선을 따라 보물찾기처럼 감춰져(?)있는 승탑과 탑비들이다.

일 년에 겨우 하루, 초파일에만 개방을 한다는 것은 평상시에는 외부인이 찾지 않는다는 뜻이어서인지 봉암사에서 가장 불편한 것은 상세한 시설 배치도나 방향과 거리, 위치 등을 알려주는 표지판, 그리고 각종 문화재에 대한 설명판들이었다. 아쉬운 점이다.


백운대(白雲臺) 마애보살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마애보살좌상은 범종각 옆으로 선원을 지나 왼쪽으로 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 만날수 있었다. 애초 일주문을 지나 올라올 때에 용추동천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속 숲길로 올라가도 만날 수 있다.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커다란 너럭바위에는 수백 명이 모여 앉아도 될 만큼 충분히 넓었고 그 왼쪽 편에 보살님이 오붓하게 앉아 계셨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장관이었다.

▲최근에 준공한 듯한 대형건물은 스님들이 정진하는 선원(禪院)으로 여전히 외부인 출입금지다.
▲계곡옆 숲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니 먼 발치로 어마어마하게 넓은 너럭바위와 마애불상이 보인다.
▲마애불 앞에는 참배객과 구경꾼이 뒤섞여 복잡하다.

마애불좌상은 바위의 넓은 면을 조금 파내어 감실 효과를 냈으며, 두광 효과도 함께 조성하였다. 백호에 유리알은 나중에 별도로 박은 듯하며 코 부분 역시 따로 성형을 한 듯하다.  양손에 연꽃 가지를 쥐고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으며 옷고름을 맨 모습이 뚜렷하다. 육계나 나발, 백호 등 여러가지 특징을 볼 때 석가여래로 보인다.

▲마애불을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여러 개의 큰 바위가 있는데 그중 하나에 白雲臺(백운대)라고 새겼다.
마애불좌상과 백운대 각자(刻字)를 보았으면 다시 절집으로 내려와 오른편 산등성이를 뒤져서 승탑을 찾아야 한다. 한번 둘러보았던 절집을 관통하여 동쪽으로 향하는데 초파일인지라 봉암사를 찾은 사람들에게 점심공양 줄이 길에 이어져있다. 자원봉사자들이 애쓰면서 배식하고 설거지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는 공양에 열심이다.

▲오른쪽 종무소 앞 마당에서 공양중인 모습. 비빔밥에 미역국, 흰떡 한 조각씩 얹어 준다. 절로 감사 인사가 나온다.

공양간을 지나 해우소 옆에 산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그다지 높지않은 계단을 올라서면 동암(東庵) 현판이 걸린 건물 한동이 보이고 그 옆으로 바닥을 잘 정리한 장소에 오래된 승탑과 최근 새로이 세운 깨끗한 승탑 2기가 나란히 서있다. 여기서부터 승탑과 탑비 여러 개를 찾아야 하는데 그 위치가 정확하지 않아 이 골짝 저 산 등을 오르내리며 많이 힘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자세한 안내판 하나쯤 있어야 할 것이다.

▲동암 바로 옆에는 오래되어 식별이 어려운 승탑과 최근에 세워 깨끗한 월봉당 탑비 2개가 있다.
▲조금 더 오른쪽으로 나가면 서암 종정의 탑비와 승탑이 제법 규모있게 서 있다. 여기까지는 찾기 쉽다.
▲다시 동암쪽으로 되돌아와 처음 만났던 오래된 승탑과 최근 조성된 월봉당 탑비의 윗쪽으로 올라가면 함허당부도가 나온다. 비교적 늘씬해보이는 승탑의 전면에 함허당 득통지탑이라고 새겨져 있고, 주변에 탑비는 보이지 않는다.

함허당 탑비는 바닥과 주변이 잘 정리되어 찾기가 쉬웠으나 바로 그 옆에 있는 환적당 승탑은 주변정리 없이 자연스런 풀밭에 있어서 무심코 지나가면 못 보고 지나치기 쉬웠다. 환적당 승탑은 함허당 승탑과 비슷한 모양이다. 왼쪽의 종형부도는 잘 모르겠다.

▲환적당 지경지탑.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3호이다. 역시 탑비는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봉암사를 중창하였다는 정진대사의 부도와 부도비를 찾는 일이다. 아무 곳에도 안내나 설명이 없어서 우리는 산능선을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숲길을 따라 이리저리 다녀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서암종정 탑비가 있는 오른쪽으로 다시 가서 더 바깥쪽으로 나가 보기로 하였다. 다행이 숲속에 길이 보여 따라갔다. 골짜기로 내려섰다가 능선으로 올라서기를 반복하면서도 시선은 계속 윗쪽으로 하여 두리번거리다 보니 아- 저 윗쪽 나무숲 사이로 멋진 탑비 하나가 보인다. 정진대사의 부도 원오탑(圓悟塔)이었다. 결국 찾았다. 마치 인디아나 존스 영화처럼….

▲서암종정 탑비에서도 더 오른쪽 바깥 쪽으로 나가서야 찾아낸 정진대사 원오탑. 보물 제171호이다.
▲원오탑의 모습. 지증대사의 적조탑과 닮은 꼴이다. 옥개석이 많이 파손되어 귀꽃은 하나가 남았다.
그런데 어렵게 원오탑을 찾았으나 탑비가 보이지 않는다. 통상 승탑(부도)과 탑비는 함께 있는 것이 정상이데 또 어디가서 찾아야 하나? 산길을 따라 구비구비 조금 더 갔더니 탑비는 없고 역시 또하나 알 수 없는 부도탑이 보인다. 근처에는 무슨 암자를 지으려는지 평탄 작업에 바닥 콘크리트까지 마친 상태로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글자가 식별이 어려워 누구의 부도탑인지 읽지 못했다.
정진대사 부도비는 못찾겠다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원오탑 바로 아래로 직하향하여 내려가보기로 하였다. 산길을 빠져나오니 커다란 건물 2동이 거의 완공 단계에 이르러 마무리 중인 듯한데 그때까지 탑비는 없다. 허전한 마음으로 건물 아래로 내려서니 대웅전 왼쪽에 적조탑과 적조비를 모신 보호각과 동일한 모습의 전각아래 탑비가 서 있다. 얼마나 반가운지…. 봉암사에서 찾은 마지막 보물 제172호. 정진대사 부도비이다.

▲원오탑의 직하방에 넓직한 터를 닦아 커다란 건물 두동을 짓고 있었고 그 건물 아래쪽 보호각 안에 정진대사 부도비가 있었다.
▲원오탑이 지증대사의 적조탑을 닮았듯이 탑비도 적조비를 닮았는데 나중에 세워져서인지 파손 정도는 덜하였다.
이제 다 둘러본셈이다. 설명에 나온 것 중에 설봉선사의 부도와 부도비를 못 찾아 아쉽지만 정진대사 부도와 부도비를 찾았음에 위로삼아 발길을 돌리려는데 보호각 왼쪽으로 작은 암자가 하나 보인다. 휴휴암이다. 그 앞으로 가 보기나 하자고 향하였더니 암자 왼쪽에 탑비가 하나 보인다. 설봉선사의 부도비로 조선 시대 명필 백하 윤순이 썼다는 비석이다. 그런데 승탑은 어디 있다는 말인지? 처음에 만났던 월봉당 탑비 옆이나 환적당 탑비 옆의 오래된 종형부도가 그것인가? 설명판도 부실하고 안내표지판도 없고 참 답답한 마음으로 돌아본 하루였다.

▲정진대사 부도비 왼쪽에 있는 휴휴암.
▲휴휴암 왼쪽에 덩그랗게 서있는 탑비. 설봉선사의 탑비다. 부도는 어디 있는지 결국 찾지 못하였다.
일 년에 단 한 번, 초파일 하루만 개방해주는 절집 봉암사를 이렇게 둘러보았다. 아무리 평상시 외부인이 찾지 않는 곳이라 하여도 절집을 설명하는 배치도와 요소마다 안내간판, 표지판 등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국보 1점과 보물 4점을 갖고 있는 절집에서 소중한 문화재를 생각해서라도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문화재청이나 해당 관청에서도 관심을 가져 협조해야 할 것이다. 답답한 일이다.

불교에 문외한이라서인지 수행도량이라해서 일 년 내 방문객을 막는 일이 꼭 좋아보이지만 않는다. 막상 방문해 보면 그다지 신비로워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잘 정비된 절집만 못하다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에 따르듯이 절집 법을 따를 밖에…. 진지한 답사객을 허용하기를 바랄 뿐이다.

지역 단체들이나 기관에서 문화재지킴이 활동을 전개하여 이날만이라도 문화재를 안내하고 설명해 주는 활동이 병행되었으면 참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내년이라도 다시 봉암사를 찾는 사람들이 이 답사기를 참고로 하면 좋겠다. 아무튼 9산 선문 중 세 번째 희양산문 봉암사를 둘러볼 수 있어 다행이며 소중한 답사 경험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출처:시니어조선

http://senior.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2/27/201502270341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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