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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국보 제19호 영주 부석사 조사당(榮州 浮石寺 祖師堂)
글쓴이 tntv 등록일 [2017.04.20]
▲겹처마 아래 조사당 현판.


공식명칭 : 영주 부석사 조사당 (한자 명칭 : 榮州 浮石寺 祖師堂)
지정일 : 1962.12.20
테마 : 유적건조물 / 종교 신앙/ 불교/ 불전
시대 : 고려
주소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문화재청 설명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처마 내밀기를 길게 하려고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며, 건물 자체가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세부양식이 경내에 있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보다 간결하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다.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이것들은 고려 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지금은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또한,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도 있다.

현재 소개 중인 국보 시리즈의 제17호(무량수전 앞 석등), 제18호(무량수전)에 이어서 제19호는 부석사 조사당이다. 17호부터 19호에 이르기까지 연거푸 3건의 국보가 부석사 문화재인데 무량수전에 모신 아미타여래와 조사당 벽화 역시 국보이다. 이 두 점의 국보는 제45호, 46호로 지정번호가 조금 떨어져 있어 나중에 따로 소개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조사당에 대하여 살펴본다.


조사(祖師)

조사(祖師)는 불교의 한 종(宗)이나 파(派)의 선덕(先德). 후세 사람의 귀의(歸依)와 존경을 받을 만한 승려, 또는 한 종이나 파를 세워서 그 종지(宗旨)를 열어 주장한 승려에게 붙여지는 칭호이다. 즉, 불교의 한 종파를 처음 개창한 승려를 이어 법통(法統)을 계승한 후대 승려들이 우리가 조상을 모시듯이 창시조 승려를 모시고 기리며 받드는 것을 말하는데 신라 하대에 이르러 구산선문이 개산하면서 산문별 개산조를 기리는 일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따라서 부석사의 조사당(祖師堂)은 부석사를 처음 창건한 의상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초상화를 모시거나 그와 관련된 불교적인 상징물 등을 모신 전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신앙은 선종(禪宗)에서의 신앙형태이지 의상의 화엄 사상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형태였으니 부석사에 의상을 기리는 조사당이 있다는 것이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에서는 아마도 의상 직후에는 없었으나 선종이 유행하던 시기를 지나면서 부석사에도 화엄종에는 맞지 않지만, 유행에 따라 이를 세운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조사당(祖師堂)

부석사에 들러 안양문에 올라서 무량수전과 앞마당의 석등, 무량수전 안에 있는 아미타여래좌상까지 국보 3점에 취하다 보면 그 위쪽에 또 다른 국보인 조사당과 그 안에 있는 벽화 등 국보 2점이 더 있음을 잊고 그냥 하산하기 쉽다.

그러나 조금 더 인내를 갖고 무량수전 동쪽에 서 있는 석탑을 지나 산길을 잠시 오르면 갑자기 속세를 벗어나듯 절집조차 번거롭다는 느낌으로 지금까지의 복잡함이 사라지면서 차라리 절집은 이래야 하지 않나 싶을 만큼 조용하고 차분하다 못해 오롯한 모습으로 서 있는 작은 건물이 나타난다. 바로 의상대사를 모신 부석사 조사당(祖師堂)이다.

▲무량수전 동쪽 언덕에 서 있는 삼층석탑과 그 앞의 석등, 석등은 화사창과 상대석이 없어진 채 중대석(간주석) 위에 옥개석이 올려 있어 언뜻 보면 마치 상원사 입구에 있는 관대걸이처럼 보인다. 이곳에 탑을 세운 연유는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이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와 마주하는 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무량수전 동쪽 언덕에 서 있는 삼층석탑과 그 앞의 석등, 석등은 화사창과 상대석이 없어진 채 중대석(간주석) 위에 옥개석이 올려 있어 언뜻 보면 마치 상원사 입구에 있는 관대걸이처럼 보인다. 이곳에 탑을 세운 연유는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이 서쪽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와 마주하는 자리에 세웠다고 한다.

때마침 눈이 내려 천지가 새하얀데 조사당으로 오르는 산길에는 좌우로 나지막하게 산죽이 푸릇푸릇 보이고 있었으며 원래 흙길이었을 텐데 바닥에는 돌을 깔아놓아 그닥 미끄럽지 않게 오를 수 있었으니 부석사 조사((祖師) 스님을 뵈러 오르는 길이 매우 아름다웠다. 산길은 한번 살짝 굽이쳐 감돌아 오르는데 눈을 들어보니 조사당 건물이 보인다.

▲하얀 눈을 이고 선 조사당 건물,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아주 작은 건물이다.
▲하얀 눈을 이고 선 조사당 건물,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아주 작은 건물이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봉정사 극락전은 중수기록으로 최고(最古)를 다투고 있지만, 조사전은 창건연도가 고려 우왕 3년(1377)으로 나와 있어 명확한 건축시기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고려 시대 건물로 아마 의상이 부석사를 세우고 수도하던 자리에 세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량수전 중수기 즈음에 세워진 건물인 셈인데 소박하고 간결한 맞배지붕 건물로 한 눈에도 목조건축의 미(美)를 느끼게 한다.

건물에 비하여 지붕이 전후좌우로 길게 나와서 지붕이 커 보여 엄숙함과 안정감을 주며, 기둥 위에만 포를 얹은 주심포 방식인데 포의 결구가 매우 간결하여 단순해 보이며 도리가 7개인 7량 규모의 아담한 규모로 조사당 건물로는 제격이다.

▲서까래가 길어 지붕이 크게 건물을 덮은 모양이다. 무거워 보이지만 그 때문에 엄숙 단정해 보이기도 한다.
▲서까래가 길어 지붕이 크게 건물을 덮은 모양이다. 무거워 보이지만 그 때문에 엄숙 단정해 보이기도 한다.
▲측면에서 보면 7개의 도리가 모두 보이며 앞뒤로 외목도리가 나와 있음을 알 수 있다. 귀공포도 매우 간결하다. 가운데 기둥(고주) 없이 앞 뒷기둥으로만 세운 모습에 종도리 아래 중보와 대들보가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측면에서 보면 7개의 도리가 모두 보이며 앞뒤로 외목도리가 나와 있음을 알 수 있다. 귀공포도 매우 간결하다. 가운데 기둥(고주) 없이 앞 뒷기둥으로만 세운 모습에 종도리 아래 중보와 대들보가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겹처마 아래 조사당 현판.
▲겹처마 아래 조사당 현판.

그러나 조사당을 둘러보는 가운데 이처럼 역사적이고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국보 제19호 고건축물에 철제 보호망을 둘러놓았는지 눈살이 찌푸려진다. 보호 철망 안에는 성장이 좋지 못한지 몇 년째 비리비리해 보이는 나무 한 그루가 보이는데 전설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평소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았다고 하는 선비화(仙扉花)나무라고 하며 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인듯하다.

그러다 보니 방문객들이 너도나도 만져보거나 조금씩 꺾고 가져가려는 시도가 있어 보호 목적으로 그랬나 싶지만 아무래도 적절한 조치는 아닌 듯싶다. 보호목적상 꼭 필요하면 나무를 옮겨 심어 잘 보호하고 성장케 관리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전설에 의지하여 국보 건물 앞 절반을 저렇게 쇠창살로 가두어 놓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적절해 보인다. 재검토를 했으면 한다.

▲전면 우측 칸에 보호 철망은 의상대사 지팡이가 자랐다는 선비화(仙扉花)나무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데 이해가 안 가는 일이다.
▲전면 우측 칸에 보호 철망은 의상대사 지팡이가 자랐다는 선비화(仙扉花)나무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데 이해가 안 가는 일이다.
▲학명으로 골담초(骨曇草)라고 한다는 선비화(仙扉花)나무를 들여다보았다. 겨울이어서인지 보잘것없어 보인다. 바닥에는 동전이 제법 떨어져 있고, 하도 사람들이 조금씩 꺾어가거나 만져보려 해서 보호망을 씌웠다는 것인데 전설에 너무 인위적인 조치인 듯하여 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학명으로 골담초(骨曇草)라고 한다는 선비화(仙扉花)나무를 들여다보았다. 겨울이어서인지 보잘것없어 보인다. 바닥에는 동전이 제법 떨어져 있고, 하도 사람들이 조금씩 꺾어가거나 만져보려 해서 보호망을 씌웠다는 것인데 전설에 너무 인위적인 조치인 듯하여 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이 조사당의 내벽에는 모두 6면의 벽화(국보 제46호)가 있었는데 지금은 떼어내 별도로 보관하고 있으며 조사당을 세운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하여 우리나라 절집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임의로 볼 수 없어 안타깝다. 이처럼 떼어내 별도 보관하는 벽화나 탱화, 괘불 등의 문화재는 원본을 쉽게 볼 수 없다면 사진으로 정리하여 설명을 곁들인 안내문을 탐방객들에게 나누어주면 좋으련만 아직 그런 절집을 못 보았으니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의상을 사모하여 용으로 변신 후 따라온 선묘 낭자는 무량수전 옆에 선묘각을 지어 모셔놓았는데 불교 교리에는 맞지 않는 일이다.
▲의상을 사모하여 용으로 변신 후 따라온 선묘 낭자는 무량수전 옆에 선묘각을 지어 모셔놓았는데 불교 교리에는 맞지 않는 일이다.
전해 듣기로는 큰 돌로 변하여 하늘에서 훼방꾼들을 위협하여 내쫓음으로써 의상대사가 절을 짓는 데 도움을 준 선묘 낭자는 그 커다란 돌을 무량수전 왼쪽에 내려놓고 다시 석룡(石龍)이 되어 머리를 무량수전 아미타불 불상 밑에 두고 앞마당 석등 아래에 꼬리를 둔 채 땅 아래 묻혀 있다고 하는데 일제 강점기 보수공사 때 땅을 파보니 과연 석룡이 있더라는 얘기가 전해 온다. 어느새 선묘 낭자 역시 부석사의 조사(祖師) 의상대사 못지않은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인가?
원문보기
http://senior.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2/17/20150217018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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