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구례군 구례읍 신촌마을. 구례구(求禮口)역으로부터 200여 미터, 지리산과 섬진강을 가까이 둔 골짜기 농촌 마을입니다. 지금은 마을 앞에 작은 병원도 들어서 있고 매운탕 가게, 음식점도 자리잡은 소도시의 느낌을 풍깁니다. 1929년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80 평생을 여기서 살아온 김용현(81) 어르신께는 이런 광경이 극히 최근의 일이지요. 술 마시면 깽판 치기 일쑤였던 아버지 아래서 힘든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궁핍한 살림살이는 당대의 보편적인 생활 환경이었지요. 몇 뙈기 되지 않았던 논은 그나마 하늘의 처분을 바라보는 천수답(天水畓) 뿐이었습니다. 밭에서 하는 채소 농사가 살림 밑천이었지요. 이목구비 또렷하고 성품 방정한 청년으로 성장했지만 술꾼 아버지의 그늘이 짙었습니다.

*내심 마음에 들어했지만 시아버지 되실 분의 명정(酩酊) 인생 때문에 혼사를 망설였다는 임삼순씨(74) 친정. 막상 결혼해서 살아보니 신랑은 '버릴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60여 년을 함께 살았지만 지금도 영감님을 바라보는 눈빛에 정감이 듬뿍합니다. 영감님 역시 7세 연하의 배우자를 대하는 모습이 그렇게 지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모습을 일러 해로(偕老)라 하는 모양입니다. 이 노부부도 마을의 전략 종목인 감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집 뒤란에는 100평 남짓한 채전밭도 있습니다. 부부는 일터에서 홀로인 법이 없었습니다. 다정다감합니다.

*농민 김용현 어르신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은 따로 있습니다. 굿을 칠 때지요. 50여 년 만에 되살린 구례 잔수(潺水)농악입니다. 원래 신촌마을 풍물굿이었는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농악(農樂)이라는 왜색 이름을 얻었고 훗날 문화재 지정 종목이 되면서 농악이라는 명칭이 굳어져 버렸습니다. '잔수'란 마을 앞을 잔잔히 흐르는 물이란 뜻이라죠. 그렇다고 구례읍 신촌마을 어르신들이 터뜨리는 잔수농악이 잔잔한 물같진 않습니다. 오히려 뇌성벽력치는 듯한 박진감이 넘치지요. 흔히 서울에서 내려봤을 때 섬진강을 경계로 왼편을 호남 좌도굿(농악)이라 하고, 오른편 쪽으로 발달한 굿을 호남 우도굿(농악)이라 합니다. 구례 곡성은 호남 좌도굿의 전통을 이어온 곳입니다.

*이 마을굿의 우두머리(상쇠)가 바로 김용현 어르신이지요. 멋스럽게 연륜을 드러내주는 백발, 60명 가까이를 거느려야 하는 풍물패 지도자다운 넉넉한 성품, 패거리들끼리 놀게 놔뒀다가 한번씩 주도적으로 나서면 온 농악단을 감고가는 묵직한 통솔력, 그런 것을 가지셨습니다. 악쓰고 호령하지 않을 뿐입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소유자입니다. 부인 임삼순씨도 마을 굿패의 일원이지요. 먹고살기에 빠듯했던 마을 사람들에게 마을굿이 던진 신선한 자극과 충격은 특히, 여성들에게 순기능을 미친 것 같습니다. 굿을 한번씩 치고 나면 속상했던 일도 터지고, 마음에 갑갑했던 일들도 터진다는군요. 김용현 상쇠가 굿이 사라진 지 50여년 만에 이 마을굿의 역사와 잔기교를 내놓고, 복원하는데 솔선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