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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중요무형문화재 제78호 입사장(入絲匠)홍정실 보유자
글쓴이 tntv 등록일 [2012.07.02]
우리 얼의 아름다움을 새겨 넣는 ‘은실박이[入絲匠]’, 홍정실 놋이나 쇠로 만든 그릇, 또는 함函의 표면에 은실로 문양을 새겨 넣는 것을 ‘입사’라고 한다. B.C 1~2세기경의 출토유물을 보면 이미 우리나라에는 고도로 발달한 입사기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유물만 보더라도 매우 정교하고 세련된 입사기교를 볼 수 있고, 고려시대에는 화려한 불교문화에 융합되어 향로, 향합, 정병에까지 입사 영역을 넓혀갔다. 특히 은입사 기법은 후에 상감청자기술과 나전상감칠기술로 발전하게 된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기물의 표면에 홈을 파고 끼워 넣는 기존의 입사기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거칠게 선을 낸 기면器面에 은실을 쪼아 넣는 입사기법이 등장한다. 조선 말기에 가면 입사장만하더라도 한양(서울)의 공조工曹에 2인, 상의원에 4인의 사금장絲金匠이 활동할 정도였다고 한다.

입사와의 인연을 맺기까지 중요무형문화재 전수관의 공방에서 만난 홍정실 교수(60세, 중요무형문화재 제78호)의 첫인상은 깐깐함, 그 자체였다. 단정한 개량한복 차림에 정갈하게 올린 머리형, 그리고 안경 뒤에 숨어있는 날카로운 눈매는 그의 투철한 작업관을 짐작게 했다. 공방에 작품은 별로 눈에 띄지 않고 유물과 전통작업도구가 전시되어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경국대전에 보면 ‘입사장’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순 우리말 명칭은 ‘은실박이’예요. 참 아름다운 이름이죠.” 대부분의 장인이 가업을 잇거나 대물림으로 탄생하는데 비추어 보면 홍정실 교수는 그 이력부터 특이했다. 1947년에 태어나 서울여대(미대)와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술교육을 전공한 그는 틈만 나면 인사동 등지를 돌면서 우리의 전통공예 중 특히 금속입사물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었다. 당시 한국일보 논설위원이자 문화재 위원이었던 고故 예용해 선생의 저서, ‘인간문화재’를 통해 전통입사의 맥이 끊겼다는 대목을 읽고 홍정실 교수는 기능보유자를 찾아 나서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미 전통입사장의 운명이 드리우게 된 건 아닐까. 1978년, 김정섭 선생(중요무형문화재 제53호, 조각장)으로부터 전통조각을 배우던 중 변유식(당시 고미술품 금속 감정위원) 선생으로부터 전통 입사장인 이학응 선생이 정릉에 살고 계신다는 말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선생은 당시 78세의 고령으로 홍교수의 심정은 더욱 급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부터 이학응 선생이 별세하신 1988년까지 만 10년 동안 홍교수는 정릉 집을 방문하며 전통입사기술을 익히게 된다. “화장을 해서 정릉 숲에다 뿌려달라는 유언 탓에 선생님이 생각나면 가끔 찾아뵐 수 있는 산소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워요.” 스승에 대한 홍교수의 그리움이 느껴졌다. 은실박이, 그 지난한 인고의 과정

일 년에 전시회는 몇 번이나 하느냐는 필자의 우문에 홍교수는 어림없다고 했다. 어떤 작품 하나는 꼬박 일 년이 걸리기도 한단다. 그러니 전시회 한 번 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과연 작업공정은 매우 복잡다단해 보였다. 은사銀絲를 꼬아 색을 낸 후 조이질(금속을 조각하는 일)한 은박지를 기물에 맞게 잘라 놓아 재료를 준비한다. 본격적인 작업으로 들어가면 기면에 5센티 정도의 정을 대고 마치(소형망치)를 두들겨 홈을 판 후 은실을 끼워 넣거나 기면 전체에 골고루 홈을 낸 후 쪼아 넣는 입사과정을 거쳐야 한다. 워낙 섬세한 공정이라 시력을 손상하게 되고 신경통은 기본이라고 했다. 작업대 위에는 오밀조밀한 작업도구들이 수십 개 정도 놓여 있었다. “연장은 장인의 분신이지요.” 이미 『한국의 연장』이라는 저서를 통해 우리 전통작업도구의 명칭과 그 쓰임새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홍교수는 자신의 작품만이 아니라 자신의 작업도구를 소중하게 다루는 모습을 통해 진정한 장인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1981년에는 미국의 G.I.A에서 보석 디자인을 전공했고 그 이후 중국과 스페인, 그리고 인도 등 다양한 나라의 전통공방에서 그들의 기법과 패턴을 연구한 홍교수는 자신의 분야에 매우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입사기술은 전 세계 어느 나라나 있습니다. 하지만, 각 나라의 민족성과 기후, 작업방식에 따라 달라지지요.” 홍교수는 전통 장인으로만 안주하지 않는다. 전 세계를 돌며 각 나라의 공예기술을 연구한 것도 그 때문이다. 즉 앞으로 나가야 할 공예의 미래를 탐색하기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지 않고 전통공예술에 현대적인 정신과 감각을 조화시키는 작업, 홍교수의 작품세계는 바로 그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미 1995년에 ‘길금공예연구소’를 설립하여 제자들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온 홍교수는 11월 10일부터 12일까지 미국 시카고에서 열리는 SOFA(국제 공예장식 미술박람회)에 작품을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전통장인의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의 정신입니다. 하지만, 국가의 문화행정은 기술로만 판단합니다.” 뼈있는 이 말 속에는 모든 것을 외양이나 기술로만 판단하는 경직된 우리 모습에 대한 질타가 숨어있었다. 국가나 우리 모두가 남의 것의 아름다움에만 현혹되지 말고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안목을 길러 진정한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보호하며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당부도 덧붙였다. 그렇게 되어야만 우리의 문화는 전 세계인에게 감동을 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홍교수, 그는 대학 강단과 길금공예연구소, 그리고 공방을 오가며 대중의 우리 것에 대한 무지를 깨뜨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이제는 그동안 해왔던 작업들을 정리하고 있어요.” 그리고 장인으로 살아오신 것에 대한 소회를 묻는 필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 배울 때에는 저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확신이 있었고 분명히 보였기 때문에 행복했어요. 글쎄요, 지금은 제가 짊어진 책무가 우선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그저 ‘정진’만이 있겠죠.” 인터뷰를 마친 필자의 가슴엔 그래도 한 가닥 안도감이 똬리를 틀었다. 그것은 바로 홍교수와 같은 장인이 있기에, 우리 전통문화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는 든든한 확신이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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