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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12)] 고종황제, 역술가에게 푹 빠지다
글쓴이 tntv 등록일 [2019.10.28]

▎고종황제는 적극적이지도 과감하지도 못했던 탓에 늘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했다. 고종이 외국공사를 접견하는 모습을 재현한 장면. / 사진·중앙포토



[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12)] 고종황제, 역술가에게 푹 빠지다 

자신감·결단력 부족 탓, 을미사변 이후 의존도 더 심해져… 인간적인 노력으로 위기 극복할 생각보다 운명론에 심취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고종은 12세이던 1863년 12월 13일 왕위에 올랐다. 어린 고종을 대신해 생부 흥선대원군이 섭정했다. 고종은 23세가 되던 1874년이 돼서야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왕권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친정(親政)한 지 2년째 되던 1876년 고종은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힘입어 정치·외교·군사·사회·경제 등 각 방면에서 개화파의 영향력이 급증했다.

이 과정에서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기까지 20여 년 동안 개화파와 위정척사파 사이의 대립이 격화됨에 따라 격변이 계속됐다. 고종의 광무개혁은 그 같은 시행착오를 반성하면서 추진됐다. 그런 면에서 광무개혁은 고종이 친정 이후 추진한 개화정책의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광무개혁의 기본노선은 ‘구본신참(舊本新參)’ 또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이었다. 옛것을 근본하고 새것을 참조한다는 ‘구본신참’이나,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은 공히 과거와 현재의 창조적 융합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구본신참’이나 ‘법고창신’이 성공하려면 과거와 현재에 두루 통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에서 버려야 할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취해야 할 것은 과감하게 취하는 판단력과 결단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광무개혁을 추진하는 고종은 적극적이지도, 과감하지도 못했다. 1895년 을미사변 이전까지 고종은 항상 누군가에 의지해 살았다. 12세에 왕이 됐을 때는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그 후로는 흥선대원군이 10년간에 걸쳐 섭정했다. 대원군 하야 이후로는 명성황후 민씨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동안 결정적인 판단력과 추진력은 고종 자신이 아닌 신정왕후 조씨,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등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황제가 된 후 고종에게 더 이상 그럴만한 사람이 없었다. 고종이 총애하는 엄 상궁은 명성황후에 비견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고종은 이제 스스로 판단하고 결단해야 했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신 스스로가 져야 했다.

이것이 두려운 고종은 결정적인 판단을 내려야 할 때마다 무당이나 역술가에게 의지했다. 자신감이 약한 고종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고종은 황제가 되기 전에도 무당이나 역술가를 좋아한 왕이었다. 그런 성향은 을미사변 이후 더욱 심해졌다. 이런 고종이라 황제가 돼서도 사기꾼들에게 어이없이 당하는 일도 있었다. <매천야록>에 이런 일화가 전한다.

“충주에 사는 성강호라는 사람이 귀신을 잘 본다고 하므로 고종이 그를 불러 명성황후의 혼령을 보여달라고 했다. 하루는 경효전에서 다례(茶禮)를 행하고 있는데 성강호가 갑자기 계단 아래에 엎드렸다. 고종이 그 까닭을 묻자 그는 ‘황후의 신령이 오셔서 지금 자리에 오르고 계십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고종은 자리를 어루만지면서 대성통곡했다. 이때 성강호는 ‘그렇게 요란하게 애통해하시면 신령이 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고종은 억지로 눈물을 거뒀다. 이때부터 궁전이나 능에 일이 있으면 고종은 ‘황후가 오고 있느냐? 안 오느냐?’라고 물었다. 그는 ‘유명(幽明)이 달라 혹 강림하기도 하고 강림하지 않기도 합니다’라고 했다. 고종은 언제나 명성황후가 생각나면 반드시 그를 불러들였으므로 그는 1년 사이에 협판(協辦)이 됐다. 그의 문전은 항상 시장처럼 붐볐다.” -황현 <매천야록> 광무 3년

“내 대(代)에서 조선왕조가 멸망할 것인가”


▎덕수궁 함녕전의 황제 거처. 고종은 아관파천 1년 뒤인 1897년부터 함녕전에서 기거했으며 1919년 이곳에서 승하했다. / 사진·중앙포토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고종을 사로잡은 역술가는 정환덕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경상도 영양 사람으로 40세가 되도록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다. 과거공부를 포기한 정환덕은 어려서부터 공부한 역술로 출세할 생각을 했다. 그는 서울에 올라와 아는 사람들을 통해 인사청탁을 했다.

이렇게 해서 당시 경운궁의 전화과장이던 이재찬이 정환덕을 고종에게 추천하게 됐다. 이재찬은 정환덕을 ‘국가의 흥망성쇠와 인생의 길흉화복’에 통달한 사람이라고 했다. 요컨대 정환덕의 역술점괘가 잘 맞는다는 뜻이었다.

광무 5년(1901) 11월 27일 고종과 정환덕은 경운궁의 함녕전 서온돌에서 첫 대면했다. 당시 정환덕은 40세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미 머리가 허옇게 세었다. 고종은 첫 질문으로 ‘어쩌다가 40세에 벌써 백발이 됐는지’를 물었다.

이 물음은 인사차 던진 것이었다. 이어서 고종은 자신이 정말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질문했다. 그것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500년으로 한정했고 종묘의 정문 이름을 창엽(蒼葉)이라 썼다. 창(蒼)이라는 글자는 이십팔군(二十八君)이 되고 엽(葉)이라는 글자는 이십세(二十世)를 형상한 듯하다. 국가의 꽉 막힌 운수가 과연 이와 같은가?”라는 질문이었다.

고종의 질문은 자기 대에서 조선왕조가 멸망할 것인지 아닌지를 물은 것이었다. 조선후기에는 왕조의 생명이 500년이라는 예언들이 횡행했다. 그 증거가 종묘의 정문 이름인 ‘창엽’이라는 것이었다. ‘창엽’이라는 글자에는 조선이 태조 이성계 이후 20세대가 되거나 28대째 되는 임금 때에 망한다는 예언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고종이 정환덕을 만난 1901년은 조선왕조가 세워진 지 이미 509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또한 고종은 조선의 26대 임금이었지만 세대로 치면 철종이 20세대였다. 예언대로라면 조선왕조는 철종 대에 망했거나 아니면 고종 당대 또는 늦어도 손자 대에서 망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은 강화도조약 이래의 온갖 풍파가 혹 왕조멸망의 징조는 아닐까 두려웠던 것이다.

정환덕은 “폐하의 운수로는 정유년(1897)부터 11년의 한계가 있습니다. 이 운수는 모면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1907년까지는 고종이 황제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고 대답한 것이었다. 그 이후는 황태자가 계승할지 아니면 왕조가 멸망할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자 고종은 “그렇다면 혹 기도한다면 꽉 막힌 운수를 피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고종은 어떻게 해서든 황제 자리를 연장하고 왕조의 운수도 연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고종이 가장 알고 싶어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정환덕은 “인재를 얻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고종은 뭔가 신통한 방법이 있을까 질문했는데 정환덕은 원론적으로 대답하고 만 셈이었다.

그래도 이날의 첫만남은 고종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무엇보다도 고종의 황제 운수가 1907년에 끝난다는 말 때문이었다. 고종은 11월 29일 다시 정환덕을 불러봤다. 이날 고종과 정환덕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첫날과 비슷한 대화가 오간 듯하다.

고종은 계속해서 어떻게 하면 왕조의 운수를 연장할까 묻고 정환덕은 덕을 닦아야 한다느니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느니 원론만을 되풀이했을 것이다. 이런 대답은 고종을 전혀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정환덕은 마지막으로 “12월 그믐쯤에 화재의 염려가 있습니다”라는 예언을 하고 물러났다.

정환덕 “대한제국 운명은 1905년까지입니다”


▎짧게 머리를 깎고 서양식 군복을 입은 고종의 사진(왼쪽 사진)과 곤룡포를 입은 고종의 어진. / 사진·중앙포토
이날 이후 고종은 더 이상 정환덕을 부르지 않았다. 고종이 정말로 원하는 대답을 정환덕이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아예 정환덕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12월 그믐에 정말로 화재가 발생했다. 고종은 정환덕의 신통한 예언에 감탄했다.

해가 바뀐 광무 6년(1902) 1월 7일에 고종은 함녕전 침실에서 정환덕을 만났다. 당시 그곳에는 오직 황태자와 엄비만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전에 딱 두 번밖에 만나지 않은 정환덕을 침실에서 만난다는 사실은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그만큼 고종은 운수 또는 운명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고종은 “네가 그렇게 미리 알 수 있었던 것은 확정적인 운수가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우연히 맞은 것인가? (중략) 장래 종묘사직이 편할지 아니면 위태로울지, 국가가 보존될지 아니면 망할지 임금인 나도 알지 못하겠다. 이런 것을 들을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고종은 명색이 황제인데도 나라가 보존될지 아니면 망할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했다. 고종은 내우외환에 휩싸인 대한제국을 살릴 자신도 없었으며 어떻게 해야 살릴 수 있는지도 잘 몰랐던 것이다. 고종은 어떻게 해서든 인간적인 노력을 통해 내우외환을 극복할 생각보다는 혹 그런 내우외환이 운명은 아닐까 하고 의심한 것이었다.

그것이 운명이라면 인간적인 노력보다는 운명 자체를 바꿀 수 있는 어떤 신통한 방법에 매달리고 싶었던 것이다. 정환덕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였다. 자신은 신기한 예언력으로 고종에게 부름받았으므로 대한제국의 미래를 예언해야 했다. 그렇다고 망한다고 예언할 수는 없었다. 그때 정환덕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신의 계산으로 본다면 다가오는 광무 9년 을사 11월 갑자일에 일계(日計)가 건괘(乾卦)의 초구(初九)로 옮겨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옛것을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로 나가는 시기입니다. 초구는 하루 종일 씩씩하고 저녁까지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이런 시국을 당해 국가의 형세는 날이 갈수록 위태하고 어렵습니다. 충신과 열사가 서로 죽기를 다투며 조정과 재야가 함께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밖에도 허다한 변란을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궁중의 법을 엄숙히 맑게 하시고 씩씩한 용단을 확고히 하시어 어진 신하를 친근히 하시고 소인을 멀리 하소서. 그렇게 하면 화란에서 벗어나 복록이 되며 꽉 막힌 운수는 가버리고 태평의 운수를 맞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일이 어느 지경에 이를지 알 수 없습니다.” -정환덕 <남가몽(南柯夢)>(1905)

정환덕은 대한제국의 미래를 광무 9년(1905)까지라고 예언했던 것이다. 주역으로 본다면 그때가 건괘 초구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묵은 것이 끝나고 새것이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묵은 것이 끝난다는 의미는 망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거듭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종의 입장에서는 나라가 망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인데, 정환덕은 망한다고 하지 않고 잘하면 더 좋아질 수 있다고 희망적으로 이야기했다.

지존의 측근이 되는 역술가


▎고종황제의 어차(御車)로 1903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도입된 자동차다. / 사진·중앙포토
정환덕의 신기한 역술에 감탄한 고종은 이 말도 믿었다. 정환덕의 말대로라면 대한제국은 1905년에 결정적인 전환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 전환기를 반전의 기회로 삼아야 했다. 그러려면 정환덕처럼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후 고종은 정환덕이 하는 말은 거의 들어줬다. 그런 면에서 정환덕은 대한제국기 황제의 측근 자문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자문관이 역술가였다는 점이다. 역술가의 현실 판단과 미래 비전은 말 그대로 현실보다는 역술에 기초했다. 그런 면에서 고종의 광무개혁은 적어도 역술만큼 근대 합리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한편 고종은 경운궁에서 어진(御眞)도 자주 그리고 사진도 자주 찍었다.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어진과 사진이 제법 된다. 그런데 특이한 사실은 이런 어진과 사진에 드러난 고종 황제는 철저하게 전통적인 이미지로부터 완전히 근대적인 이미지까지 다양한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느 이미지가 고종황제의 진면목일까 하는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고종은 광무 5년(1901) 11월 7일에 명령을 내려 자신의 어진을 그리게 했다. 이유는 다음해가 자신의 즉위 40주년이라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에 따라 광무 6년(1902) 2월(음력)부터 어진을 그리기 시작해 4월에 완성했다. 고종은 경운궁의 정관헌(靜觀軒)에 나가 직접 모델 역할을 했는데 그때 면복본(冕服本), 익선본(翼善本), 군복본(軍服本) 등 세 가지의 어진을 그렸다.

당시에 그려진 익선본의 어진은 현재 원광대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는 익선본 어진을 통해 추정해볼 수 있다. 이 어진은 1900년쯤 그려졌는데 1902년에 그려진 어진과 유사할 것이라 생각된다. 원광대에 소장된 어진은 전통적인 이미지를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다.

어진 속의 고종 황제는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은 상태로 용상에 앉아 있다. 익선관이나 곤룡포는 조선시대 왕들이 평상시 근무할 때 입는 복장이었다. 고종 황제가 착용한 익선관이나 곤룡포는 그 형태가 조선시대 왕들의 것과 동일하다. 배경에 쓴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도 조선시대의 이미지와 다를 것이 없다. 신고 있는 신발도 마찬가지다.

다만 조선시대의 왕들은 제후 왕이라 붉은색이나 푸른색 곤룡포를 입었던 것에 비해 고종 황제는 노란색 곤룡포를 입었다는 점이 다르다. 색깔만 제외한다면 고종황제의 이미지는 조선시대 왕들의 전통적인 이미지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전통인도 근대인도 아니었던 황제


▎고종황제의 가족사진으로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황제,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 셋째 아들 영친왕, 고종황제, 순종황제의 왕비 순종효황후 윤대비, 의친왕의 왕비 덕인당 김비,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 / 사진·중앙포토
이렇게 그려진 어진은 전통시대와 마찬가지로 진전(眞殿) 속에 깊숙이 비장되었다. 그런 면에서 이런 어진들은 고종이 황제가 돼서도 조선시대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했음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짧게 깎은 머리를 드러낸 상태에서 서양식 군복을 입고 가슴에는 주렁주렁 훈장을 달고 옆구리에는 칼까지 찬 고종황제의 사진에서는 전통적인 이미지를 찾기 어렵다. 구두를 신은 모습에서는 전통과의 완전한 단절을 느끼게도 된다. 이 이미지가 사진이라는 점에서도 비전통적이다.

사실 짧게 깎은 머리를 드러낸 이미지 자체가 전통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고종은 을미사변 후 단발령을 반포하기에 앞서 머리를 깎았는데, 대한제국 때도 머리를 기르지 않았다. 단발령이 반포됐을 때, 전통을 지키려는 양반유생들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극단적으로는 ‘내 목을 자를 수는 있어도 내 머리칼을 자를 수는 없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했다.

그런 사태를 겪었지만,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도 고종은 머리를 기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부분에서 ‘광무개혁’을 추진한 고종의 근대성을 찾아볼 수 있다. 짧은 머리와 마찬가지로 서양식 군복과 훈장도 근대문물을 상징했다.

본래 조선시대의 왕이 공식적으로 입는 전통복장은 크게 면류관과 구장복(九章服), 원유관(遠遊冠)고 강사포(絳紗袍), 익선관과 곤룡포(崑龍袍), 그리고 군복이었다. 면류관과 구장복은 신에게 제사할 때 입는 예복으로 왕의 최고 예복이었다.

그래서 대례복(大禮服)이라고도 했다. 원유관과 강사포는 면류관과 구장복보다 품격이 낮은 예복으로서 일본이나 유구에서 온 사신들을 접견할 때 입는 복장이었다. 이에 비해 익선관과 곤룡포는 평상시 근무할 때 입는 복장이었다. 물론 군복은 군사훈련이나 대궐 밖으로 행차 때 입는 복장이었다.

이 중에서 군복을 제외한 왕의 복장은 대한제국시기 때도 색상이나 일부 문양만 빼고 그대로 사용됐다. 예컨대 면류관과 구장복의 경우, 면류관에 드리우는 9줄의 류(旒)가 12류로 늘었으며 구장복에 사용된 아홉 가지 문양이 12가지 문양으로 늘어났다.

원유관과 강사포의 경우, 조선시대의 원유관은 주름을 아홉 개 잡았지만 대한제국 시기 때는 주름이 12개로 늘었다. 익선관과 곤룡포는 조선시대 청색 또는 붉은색의 곤룡포가 황색으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는 조선시대의 제후 왕이 대한제국기의 황제로 변했음을 상징하는 것일 뿐 근대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즉 황제를 상징하는 색이나 문양은 근대문물이 아니라 동양의 전통문물이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군복은 철저하게 근대화됐다. 고종황제가 착용한 군복은 전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모자도, 복장도 철저하게 서양식 군복이었다. 가슴에 붙이는 훈장도 전통시대에는 없던 근대문물이었다. 허리에 차고 있는 칼도 발에 신은 구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모습만 보면 고종황제는 전통과 단절된 근대인으로 느껴진다.

그렇다면 대한제국 시기 고종황제의 본 모습은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어진과 전통과는 단절된 군복 중 어느 이미지에 가까울까? 만약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어진이 고종의 본 모습이라면 고종은 전혀 근대화되지 않은 황제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전통과는 단절된 군복사진이 고종의 본 보습이라면 고종은 철저하게 근대화된 황제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고종이 추구한 본 모습이 아니었다. 고종은 완전한 전통인이 되는 것도 또 완전한 근대인이 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고종 자신은 전통을 계승하는 근대인이 되고자 했다. 고종은 그런 이미지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했다.

법고의 핵심이 ‘금척’에 지나지 않았으니

1902년 말 고종은 경운궁의 중화전에서 서양화가 조셉 드 라 네지에르(Joseph, de la Neziere)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적이 있었다. 네지에르가 얼굴을 스케치하는 작업이 끝나자 고종은 다시 들어가 정복을 갖춰 입고 나와 용상에 앉았다.

당시 고종은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었는데 거기에 더해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이라고 하는 훈장을 착용했다. 고종이 전통적인 익선관과 곤룡포 위에 더한 금척대수장은 고종의 근대화를 상징했다. 이 금척대수장은 대한제국기 최고의 훈장으로서 황족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고종황제가 서양식 군복을 입었을 때 착용한 훈장도 바로 금척대수장이었다.

그런데 금척대수장은 태조 이성계가 꿈에서 받았다는 금척(金尺)을 상징하는 훈장이었다. 훈장은 정 중앙의 태극을 중심으로 열십자 형태의 금척과 백색광선 그리고 오얏꽃 문양으로 조각됐다.

중앙의 태극은 하늘의 태양, 금척은 태조 이성계가 꿈에서 받은 황금 자, 백색광선은 태양 빛 그리고 오얏꽃은 전주 이씨를 상징했다. 이 훈장을 황색의 띠에 달아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에 드리웠는데 훈장은 왼쪽 허리부분에 위치했다. 또한 왼쪽 가슴에도 이 훈장을 달았다. 띠에 매단 훈장을 정장(正章), 왼쪽 가슴에 다는 훈장을 부장(副章)이라고 했다.

고종황제는 꿈속의 금척을 바탕으로 근대문물을 수용하고자 했다. 광무개혁의 기본노선인 ‘구본신참’ 또는 ‘법고창신’에서 ‘구본’이나 ‘법고’의 핵심은 바로 꿈속의 금척이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고종황제가 의지한 역술가는 또 하나의 꿈속의 금척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대학연의>는 요임금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위대한 성군 요임금이 왜 위대한 성군이 될 수 있었는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대학연의>에 의하면 요임금이 성군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근본적으로 ‘극명준덕(克明俊德)’에 있었다. ‘인간 내면의 위대한 덕성을 최대한 발현하는 것’이 ‘극명준덕’이다.

‘인간 내면의 위대한 덕성’이란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천명을 받은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 나아가 그런 천명 앞에 떳떳해야 함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런 자각에서 사명감과 자신감이 가능해지고 위대한 성취도 가능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금에 걸쳐 수많은 인간 군상이 내면의 위대한 덕성보다는 외부의 감언이설에 쉬이 기울어지니 슬픈 일이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원문보기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09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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