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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11)] 공포심에 찌든 중종, 강제이혼 당하다
글쓴이 tntv 등록일 [2019.10.14]


성종의 아들이자 제11대 왕 중종의 무덤인 정릉(靖陵). 선릉과 합쳐 선정릉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11)] 공포심에 찌든 중종, 강제이혼 당하다 

이복형 연산군 폐위 이후 반정공신 박원종 등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돼…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눈치보다 조강지처와 생이별, ‘천추의 한’ 남겨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조선 제11대 임금인 중종은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으나 공신들의 기세에 눌린 나머지 조강지처를 버려야 했다. 뮤지컬에서 중종 역을 맡은 배우(왼쪽)가 열연하고 있다.
조선시대 왕비 중에는 남편이 왕위에서 쫓겨남에 따라 덩달아 쫓겨난 왕비도 적지 않았지만 남편에게 이혼 당해 쫓겨난 왕비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성종에게 이혼당한 폐비 윤씨, 중종에게 이혼당한 폐비 신씨 그리고 숙종에게 이혼당한 장희빈 등이 그랬다. 이들 중에서 윤씨와 장씨는 남편인 왕에게 미움을 받았기에 이혼당했다.

그러나 폐비 신씨는 남편 중종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음에도 이혼당해야만 했다. 중종반정을 성공시킨 공신들의 강압 때문이었다. 중종반정은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 이른바 반정 3대장이 주도했는데 특히 박원종의 역할이 컸다.

박원종은 박중선이라는 사람의 외아들이었다. 박중선은 무과에 장원급제할 정도로 무술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세조 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해 적개공신 1등이 된 이후에도 남이 장군의 옥사 이후 책봉된 익대공신 3등과 성종의 즉위를 찬조하고 책봉된 좌리공신 3등에도 연이어 책봉됨으로써 세조 대에 형성된 훈구공신의 일원이 됐다. 게다가 그의 두 딸이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의 부인이 됨으로써 왕실과 가까운 인척이 되기도 했다. 그런 박중선의 외아들인 박원종은 아버지의 기질과 유산을 모두 물려받았다.

세조 13년인 1467년에 태어난 박원종은 연산군보다 9세 위였고 중종보다는 21세 위였다. 박원종은 9척 장신의 거구에 뛰어난 외모를 가진 사나이였다. 실록에서는 박원종을 ‘풍자(風姿)가 아름다웠다’고 했는데 ‘모습과 자태가 멋있었다’는 뜻이다.

박원종은 훤칠한 키에 잘생긴 얼굴까지 겸비한 ‘몸짱’, ‘얼짱’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박원종은 아버지를 닮아 무술에도 재능을 보여 무과에 합격하기까지 했다. 가문·인물·무술실력 등등 모든 면에서 탁월한 박원종은 성종 대와 연산군 대에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박원종이 연산군 대에도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본인의 실력 이외에 누나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가 있었다. 박중선에게는 아들이 박원종 한 명뿐이었지만 딸은 일곱이나 됐다. 그 딸들 중에서 첫째 딸이 월산대군에게 시집갔고 막내딸이 제안대군에게 시집갔다. 혼처로만 보면 이 두 딸이 시집을 잘 간 것 같지만 시집살이는 만만치 않았다. 특히 월산대군에게 시집간 박씨의 시집살이가 파란만장했다.

박원종의 자형(姊兄)이 되는 월산대군은 인수대비 한씨의 큰아들로 성종의 형이다. 예종이 승하한 후, 월산대군과 성종 중에서 서열대로 후계자를 골랐다면 왕이 될 사람은 월산대군이었다. 월산대군이 왕이 됐다면 부인 박씨는 왕비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월산대군은 동생 성종에게 밀려 왕이 되지 못했다. 부인 박씨도 왕비가 되지 못했다. 왕이 되지 못한 월산대군은 부인과 함께 조심조심 여생을 보내다가 1485년(성종 20) 35세의 젊은 나이에 동생 성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누이에게 자진(自盡) 권유한 뒤 거사 일으킨 박원종


▎서울 마포구 합정동 강변북로변에 있는 ‘망원정’은 당초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이 별장(희우정)으로 지었다. 이후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고쳐 지으며 이름을 망원정으로 바꿨다.
딱하게도 젊은 나이에 청상과부(靑裳寡婦)가 되고만 박씨 부인에게는 자녀가 한 명도 없었다. 홀로 된 박씨 부인은 남편의 무덤 옆에 흥복사라는 절을 짓고 가끔 절에 들러 명복을 비는 것으로 소일했다.

이런 박씨 부인의 인생이 1497년(연산군 3)을 기점으로 크게 변했다. 왕이 된 지 3년 만에 큰아들을 본 연산군은 자신의 큰어머니가 되는 박씨 부인에게 아들의 양육을 부탁했다.

연산군의 아들을 기르던 박씨 부인에게 또 한 번 큰일이 닥쳤다. 1498년(연산군 4)에 박씨 부인의 넷째 여동생이 8세 된 딸을 남겨놓고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박씨 부인은 그 여동생의 딸을 데려다가 기르기 시작했다. 비록 친자식은 아니라 해도 어린 조카 두 명을 키우면서 박씨 부인은 나름대로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 1503년(연산군 9)부터 연산군이 박씨 부인을 궁궐로 불러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연산군은 입궁한 박씨 부인을 자주 찾았다. 어떤 때는 박씨 부인과 함께 밤을 지내는 일도 있었다. 당연히 연산군과 박씨 부인을 두고 온갖 추문이 난무했다. 그런 와중에 박씨 부인의 남동생인 박원종은 승승장구했다.

박원종은 40세이던 1506년(연산 12) 6월에 종1품의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종1품의 숭정대부는 정승이 받는 정1품의 숭록대부(崇祿大夫) 바로 아래 품계로서 정승급이었다. 무과 출신의 박원종이 40세의 젊은 나이에 정승급의 품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누나인 박씨의 도움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실록에는 ‘박원종의 누이는 월산대군의 아내로서 연산군이 간통해 늘 궁중에 있었는데 연산군이 특별히 박원종에게 숭정대부의 품계를 줬다’는 기록이 있다. 숭정대부를 받은 직후 박원종은 함경도 관찰사가 돼 떠났다. 박원종의 묘지명(墓誌銘)에 따르면 이때 박원종이 연산군에게 직언하다가 화를 당할까 두려워 급하게 도모해 함경도 관찰사가 됐다고 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7월 3일 연산군은 박씨 부인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므로 박원종에게 간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17일 후인 20일에 박씨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이 기록만 보면 박씨 부인은 병을 앓다가 죽은 듯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실록에 ‘박원종이 분하게 여겨 그 누이에게 말하기를 왜 참고 삽니까? 약이나 먹고 죽으세요’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박원종은 왜 중병이 든 누나에게 약이나 먹고 죽으라는 악담을 했을까?

그것은 당시 박씨 부인을 두고 온갖 추문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실록에는 ‘사람들은 박씨 부인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은 사실 여부를 떠나 박씨가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으며, 나아가 그 때문에 별의별 소문이 돌았음을 알려준다.

나약하기 그지없었던 진성대군


▎JTBC 사극 <인수대비>에서 어린 성종에게 수라를 권하는 인수대비.
이런 소문이 치욕스러웠던 박원종은 참을 수 없는 모욕과 분노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박원종이 누이에게 ‘약이나 먹고 죽으세요’라는 극단적인 악담을 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박씨 부인이 죽은 직후 박원종은 연산군 축출에 몰두해 채 2개월도 되지 않은 9월 1일 한밤중에 거병해 성공했다. 이런 사실로 보면 중종반정을 성공시킨 박원종은 과감하고 냉정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반면 중종은 나약하고 공포심이 많았다. 중종은 1488년(성종 19) 3월 5일에 성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복형인 연산군보다는 12세 아래였다. 중종은 7세 되던 해 초여름에 진성대군(晉城大君)에 책봉됐는데 그해 연말에 부왕 성종이 승하했다.

이후 5년 동안 이복형 연산군과 함께 같은 궁궐에서 살다가 12세 때 한 살 연상의 신씨와 혼인해 출궁했다. 출궁한 지 7년 만인 19세 때 반정이 발생해 왕위에 오르게 됐다. 따라서 왕위에 오르기 전 19년 동안 중종에 관련된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져야 정상이다. 창업 또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왕들은 보통 즉위 이전의 이런저런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회자되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즉위하기 이전의 중종에 관한 이야기들은 거의 없다. 야사에 전하는 이야기는 겨우 두 가지 정도이다. 이 두 가지 모두 중종의 공포심을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특이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김시양의 <부계기문(涪溪記聞>이라고 하는 책에 전하는 이야기다. 어느 때인가 연산군은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데리고 사냥을 갔다. 사냥이 끝나자 연산군은 진성대군과 말달리기 시합을 제안했다. 사냥터에서부터 궁궐까지 누가 먼저 가는가 하는 시합이었다.

하지만 불공정한 시합이었다. 연산군은 준마(駿馬)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연산군은 무시무시한 협박까지 했다. 만약 진성대군이 자신보다 늦으면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했던 것이다.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협박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연산군은 진성대군을 죽일 작정이었던 듯하다.

그때 진성대군은 ‘크게 두려워(대구·大懼)’했다. 어느 정도나 두려워했는지는 모르지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보기 딱할 정도였다. 아마도 어쩔 줄을 모르며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보다 못한 영산군이 몰래 진성대군에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말이 주상의 말보다 훨씬 빠릅니다’라고 말하고는 진성대군을 태우고 달렸다.

결국 진성대군은 연산군보다 먼저 궁궐에 도착해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영산군과 그의 말은 모두가 진성대군을 위해 때를 맞춰 났다’고들 했다. 이 에피소드는 겉으로만 보면 진성대군이 하늘의 천명을 타고 나서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듯하다.

물론 진성대군에게는 그런 면이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진성대군은 절박한 위기상황에서 냉정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생사를 가르는 위기 상황에서 진성대군은 ‘크게 두려워’만 할 뿐, 어떻게 그 상황을 헤쳐나갈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역시 진성대군에게 공포심이 많아서였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두려움에 질리게 될 때 진성대군은 정상적인 판단력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두 번째 야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야사는 첫 번째 야사보다도 더 적나라하게 중종의 나약함과 공포심을 보여준다. ‘국조기사’를 인용한 <연려실기술>은 그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반정군 들이닥치자 두려움에 자결하려 했는데


▎조선 제9대 왕 성종과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인 선릉(宣陵).
“반정하던 날 먼저 군사를 보내 임금(중종)이 살던 궁을 에워쌌다. 이것은 혹 해칠 자가 있을까 염려해서 호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임금은 놀라 자결하려고 했다. 그러자 부인 신씨가 말하기를, ‘군사의 말머리가 이 궁으로 향하고 있으면 우리 부부가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말꼬리가 궁으로 향하고, 말머리는 밖으로 향해 섰다면 분명 공자를 호위하려는 뜻일 것입니다. 알고 난 후에 죽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며 소매를 잡고 굳이 말리면서 사람을 내보내 살펴보게 오게 했다. 과연 말머리가 밖을 향하고 있었다. 임금과 부인 신씨는 일찍부터 부부간의 애정이 매우 두터웠다. 이때 이르러 반정공신들이 의논하기를 ‘이미 부인의 아버지 신수근을 죽였는데 딸을 왕비로 놓아두면 우리에게 무슨 보복이 올는지 모른다’ 하고는 마침내 폐비(廢妃)를 청했다. 임금이 하는 수 없이 내보내기는 했지만 별궁에 두고 매양 모화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으러 거둥할 때는 꼭 말을 모화관에서 멀지 않은 그 별궁에 보내어 먹이게 했다. 그러면 신씨 부인은 흰죽을 쑤어 손수 들어서 말을 먹여 보냈다고 한다.”-<연려실기술> 중종조고사본말, 왕비신씨손위복위본말(王妃愼氏遜位復位本末)

반정 군사들이 집을 포위하자 진성대군은 연산군이 보낸 군사들이라 지레 짐작하고 자결하려고 했는데 그것을 부인 신씨가 막았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진성대군은 절박한 위기상황에서 판단력을 상실한 반면 부인 신씨는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한 것이 된다.

특히 진성대군의 판단력 상실은 사소한 정도가 아니라 자살까지도 생각하는 극단적인 정도였다는 점에서 그 증상이 아주 심각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진성대군은 왜 자결하려고 했을까? 그것도 역시 공포심 때문이었다.

연산군은 사람들을 죽일 때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잔인한 고문을 가한 후에 죽였다. 실록에는 그 이름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손바닥 뚫기(搾掌)’, ‘벌겋게 달군 인두로 지지기(烙訊)’, ‘가슴살 도려내기(斮胸)’, ‘마디마디 자르기(寸斬)’, ‘뱃살 도려내기(刳腹)’, ‘뼈 갈아 바람에 날리기(碎骨飄風)’ 등의 고문이 전한다. 이런 고문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쭈뼛하게 만드는데 연산군 대에는 이런 고문들이 실제로 행해지고 있었다.

집을 포위한 군사들을 본 진성대군은 죽음에 더해 이처럼 무시무시한 고문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고문을 받는다면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 이왕 죽을 판인데 끔찍한 고문까지 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훨씬 좋다. 진성대군은 분명 공포에 질려 이런 상상을 하면서 차라리 자결하겠다고 했을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야사에서 드러나는 중종의 특징은 극도의 공포에 질렸을 때는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중종은 절박한 상황에서는 냉정하고 과감하게 상황에 맞서기보다는 공포에 질려 도피하기에 급급했다. 이런 점은 그의 천성이기도 하고 19년간의 인생 경험에서 양성된 것일 수도 있다.

중종의 생모는 성종의 세 번째 왕비인 정현왕후 윤씨였다. 정현왕후는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사사(賜死)된 이후에 왕비가 됐다. 당연히 거의 모든 면에서 정현왕후 윤씨와 폐비 윤씨는 대조적이었다.

폐비 윤씨가 억세고 자기주장이 강한 반면 정현왕후 윤씨는 부드럽고 순종적이었다. 정현왕후 윤씨는 시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와 시어머니 인수대비 한씨가 부녀자의 도리를 가르치면 그대로 받들어 순종하고 어기지 않았다.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거나 저항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정현왕후 윤씨는 정희왕후 윤씨와 인수대비 한씨의 눈에 들어 왕비가 될 수 있었다. 정현왕후 윤씨와 마찬가지로 그의 아들 중종도 부드럽고 순종적인 면이 강했다. 이런 점은 천성적이라 할 것이다.

반정공신 무서워 조강지처 버리고


▎성종의 아들이자 제11대 왕 중종의 무덤인 정릉(靖陵). 선릉과 합쳐 선정릉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중종의 이복형 연산군은 폐비 윤씨를 닮아 억세고 자기주장이 강했다. 연산군은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을 제외한 성종의 유일한 적자 진성대군을 경계했다. 그런 경계심은 연산군이 점점 인심을 잃어가고 진성대군은 더욱 장성해지면서 커져갔다.

10대 후반쯤 되면서 진성대군은 늘 이복형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살았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몇 년을 살아온 결과, 천성적으로 부드럽고 순종적인 중종은 공포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도리어 공포심에 짓눌리게 됐다.

박원종·성희안·유순정 등 이른바 반정 3대장은 1506년(연산군 12) 9월 1일 한밤중에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신수근·임사홍 등을 척살하고 연산군을 폐위시켰다. 반정 3대장에게 추대된 중종은 9월 2일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갑자기 왕위에 즉위했다. 중종의 부인 신씨도 남편을 따라 입궁했다. 비록 공식적으로 왕비책봉을 받지는 않았지만 신씨는 남편이 왕이 됐으므로 당연히 왕비가 될 상황이었다. 9월 2일부터 신씨는 사실상 왕비로 행세했으며 또 그렇게 대접받고 있었다.

9월 3일 대신들은 중종에게 왕비책봉을 어떻게 할지를 물었다. 중종은 ‘속히 마련해 보고하라’고 명했는데 물론 부인 신씨를 왕비로 책봉할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다. 이에 따라 신료들은 신씨를 왕비로 책봉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런데 반정 3대장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그들은 신씨가 신수근의 딸이라는 점을 우려했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자 측근이었기에 반정 당일 척살됐던 것이다. 반정 3대장은 신씨가 왕비에 책봉된 후 친정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설까 두려워했다. 9월 9일, 반정 3대장을 위시한 조정 중신들은 신씨를 출궁할 것을 중종에게 요구했다. 그들의 강압에 의해 중종은 그날 밤으로 신씨를 출궁시켰다. 이때의 상황이 실록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박원종·유순정·성희안 (중략) 등이 아뢰기를 ‘거사할 때 먼저 신수근을 제거한 것은 대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신수근의 친딸이 대궐 안에 있습니다. 만약 신수근의 친딸이 정식으로 왕비가 된다면 인심이 위태롭고 의혹될 것이고 인심이 위태롭고 의혹되면 종묘사직에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청하건대 사사로운 은정을 끊고 궐 밖으로 내치소서’ 했다. 중종이 전교하기를 ‘아뢴 것은 매우 합당하다. 그렇지만 조강지처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였다. 모두들 아뢰기를 ‘신들도 이미 생각해 봤습니다. 그렇지만 종묘사직을 위한 대계이니 어쩌겠습니까? 청하건대 속히 결단하소서’ 했다. 전교하기를 ‘종묘사직이 지극히 중하니 어찌 사사로운 은정을 생각하겠는가? 마땅히 여러 사람의 논의를 따라 궐 밖으로 내치겠다’ 했다. 잠시 있다가 전교하기를, ‘하성위 정현조의 집을 속히 수리하고 청소하라. 오늘 저녁에 옮겨 나갈 것이다’ 했다.”-<중종실록> 권1, 1년(1506) 9월 9일조

부인 신씨를 출궁시키라는 반정 3대장의 강압에 중종이 보인 저항은 ‘조강지처’라는 한마디 말뿐이었다. 그것도 한 차례뿐이었다. 공포에 질린 중종은 자기 입으로 ‘조강지처’라고 했던 부인 신씨를 곧바로 출궁시켰다. 젊어 고생을 함께 한 ‘조강지처’는 유교의 이른바 칠거지악으로도 쫓아내지 못하는 특별한 부인이었다.

그런 조강지처를 중종은 반정공신들의 강압에 눌려 쫓아내고 말았던 것이다. 겉으로는 ‘종묘사직’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는 공포와 두려움에 굴복됐다고 봐야 한다. 중종은 명색이 왕이었지만 제 부인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형편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반정공신 때문에 강제 이혼당한 신씨는 사실상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궁궐에서 쫓겨났다. 이후 신씨는 인왕산 아래에서 중종을 그리며 홀로 살았다. 중종 역시 신씨를 잊지 못했다.

단경왕후, 사후 180여 년 후에야 복위돼

이와 관련한 전설이 이른바 ‘치마바위 전설’이다. 경복궁에 살던 중종은 신씨가 그리워질 때마다 경회루에 올라 인왕산 쪽을 바라봤고 이를 알게 된 신씨는 예전에 입던 붉은 치마를 인왕산 바위에 걸었다는 것이 전설의 요지다. 이런 전설은 듣는 이의 마음을 애잔하게 만들지만 이 전설 역시 중종의 나약함과 공포심을 드러낼 뿐이다.

강제 이혼당한 신씨는 홀로 살다가 71세에 세상을 떠났다. 신씨의 억울한 사정은 중종 당시부터 사람들의 동정을 불러일으켜 복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을 일으키곤 했으나 사후 180여 년이 지난 영조 15년(1739)에야 단경왕후로 복위될 수 있었다. 만약 중종이 반정공신들의 강압에 굴복하지 않았다면 신씨가 억울하게 이혼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을 타고난 인간 내면의 심층에는 너나없이 나약함과 공포심이 깃들어 있다. 그런 나약함과 공포심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특히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떻게 나약함과 공포심을 극복할 것인가? 이와 관련해 <대학연의>에서는 ‘규경잠계지조(規敬箴誡之助)’를 제시한다. 나약함과 공포심 같은 인간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옛 성현의 잠언과 경계의 도움을 받으라는 것이 바로 ‘규경잠계지조’다.

<대학연의> ‘규경잠계지조’에서 첫 번째로 제시한 옛 성현의 잠언과 경계는 탕왕의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다. 은나라를 건국한 탕왕은 자신의 목욕통에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일신우일신’을 써서 스스로를 경계함으로써 뛰어난 성군이 될 수 있었다.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꼭 탕왕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나약함·공포심을 비롯해 교만함·방자함·게으름·어리석음 등등의 약점을 나날이 노력해 극복하면 누구나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대학연의>의 가르침이지만 이런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뿐더러, 설사 믿고 실천해도 성공하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니 슬프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원문보기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08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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