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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다방, 100년 전 커피 한 잔의 추억을 더듬다
글쓴이 tntv 등록일 [2011.01.11]



     
커피를 사랑한 고종과 호텔식 다방

커피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약 1890년 전후로 추정된다. 1895년에 발간된 유길준의 『서유견문』에 의하면, 커피는 1890년 경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한다. 특히 고종이 커피를 즐겨 마셨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 커피를 마신 고종은 그 맛에 매혹되었고, 이후 덕수궁에 돌아와 ‘정관헌靜觀軒’이라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놓고 여기에서 서양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를 마시곤 하였다. 1898년에는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된 역관 김홍륙이 고종에게 앙심을 품고 공홍식 등을 사주하여 고종이 마실 커피에 독약을 타게 하였다. 다행히, 커피 맛이 이상한 것을 안 고종은 바로 뱉어서 별 일 없었으나 독이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세자는 이후 18개의 의치義齒를 하였다고 한다. ‘정관헌’이 고종이 다과를 들거나 연회를 열고 음악을 감상할 목적으로 만든 공간이라면, 당시에 새롭게 등장한 호텔은 다방보다 먼저 커피를 팔았던 공간이다. 즉 우리나라의 다방은 호텔식 다방에서 시작하였던 것이다. 1884년 경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掘力太郞가 인천에 설립한 ‘대불호텔’과 러시아 공사 웨베르(Karl Waever)의 처형인 손탁(Sontag)이 고종에게 하사받은 사저私邸를 허물고 1902년에 지은 ‘손탁호텔’은 호텔식 다방의 시초에 해당할 것이다. 손탁호텔에 이어서 서울에 등장하였던 ‘청목당靑木堂’은 일층에서는 양주를 팔고, 이층에서는 차와 식사를 겸할 수 있게 하였다. 당시 청목당은 최고급 식당이자 찻집이요, 장안의 명물이었다. 그러나 1914년 최고급 호텔 겸 다방의 역할을 한 ‘조선철도호텔’이 등장하면서 그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커피의 보급과 다방의 출현

‘다방’이라는 용어는 이미 고려시대에 사용되었으나, 커피와 차를 파는 공간으로서의 다방은 커피가 들어오면서 출현한 근대 공간이다. 찻집, 티룸(tearoom), 다점, 끽다점喫茶店 등으로 불린 본격적인 의미의 다방은 주로 일본인이 거주하였던 남촌에 먼저 등장하였다. 1923년경에 충무로 3가(당시 본정 3정목)의 ‘후다미二見’와 충무로 2가의 ‘금강산’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다방은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던 곳에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여 운영하던 곳이다. 이와 달리, 우리나라 사람이 처음으로 창업한 다방은 1927년 봄에 영화감독 이경손이 하와이에서 데려온 묘령의 여인과 종로구 관훈동에 개업한 ‘카카듀’이다. 그러나 경영이 미숙하고 손님도 많지 않아서 이경손은 수개월 만에 ‘카카듀’의 문을 닫고 상해로 갔다고 한다. 이어서 1929년경에 심영沈影이, 일본 미술학교 도안과를 졸업하고 영화배우를 하던 김인규金寅圭와 함께 지금의 종로 2가 YMCA 근처에 ‘멕시코’를 열었다.

『동아일보』 1927년 10월 27일자에는 「커피차 끓이는 법-커피의 분량은 얼마, 용기와 우유의 사용방법」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다. 여기서는 커피의 장점이 풍부하고 윤택한 향기에 있다는 것과 따뜻한 우유나 연유(evaporated milk)를 넣어 마시면 좋다고 하고 있다. 또한 미국에 유행하고 있는 블랙커피도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커피의 보급과 향유는 1920년대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방이란 공간은 1930년대에 가서야 제 구실을 할 수 있었다. 1930년대 이전에 개업한 다방이 적자를 면하지 못한 것과 달리 1930년대 초반에 이순석이 소공동에 문을 연 ‘낙랑파라’는 거의 처음으로 수지맞는 경영을 하였던 다방이다. 다방은 누가 어디에 다방을 개업하느냐에 따라서 각기 다른 특색을 드러냈다. 당시 다방을 경영하던 사람 중에는 예술가들이 많았다. 그 덕분에 다방은 유흥 공간이면서 동시에 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차를 파는 다방과 분위기를 파는 다방  

‘낙랑파라’를 개업한 이순석은 동경 우에노上野 미술학교 도안과를 졸업하였고, 여러 차례 다방을 경영하였던 이상李箱도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기사를 거쳐 시인이자 소설가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상이 결핵 때문에 요양 차 갔던 황해도 배천 온천에서 만난 기생 금홍과 종로 1가에 다방 ‘제비’를 개업한 것은 1933년경이다. ‘제비’는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밖의 풍경을 내다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영난에 빠지면서 금홍과도 헤어진 이상은 ‘제비’의 문을 닫았다. 이후에도 이상은 카페 ‘쯔루鶴’를 비롯하여 종로에 ‘식스·나인(69)’과 명동에 ‘무기麥’를 개업하려 했었다. 별 생각 없이 ‘식스·나인’의 개업을 허가했던 종로경찰서는 나중에 ‘식스·나인’이 성 체위를 뜻하는 것을 알고 영업 허가를 취소했다. 한편, 그 사이에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은 소공동에 ‘프라타나(플라타너스)’라는 다방을 개업하였고 영화배우로 활동하였던 복혜숙은 인사동 입구에 ‘비너스’라는 다방을 열었다. 처음에 차만 팔았던 ‘비너스’는 나중에는 ‘바(bar)’를 겸해서 이른바 ‘주간 다실 야간 살롱’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그 밖에 음악평론가 김관金菅이 명동에 명곡名曲 다방으로 유명하였던 ‘에리제’를 열었다가 후에 ‘모나리자’로 이름을 바꾸었다. 영화감독 방한준方漢駿이 명동에 개업한 ‘라일락’을 비롯하여, ‘오리온’, ‘허리우드’, ‘백룡白龍’ 등과 소공동의 ‘나전구羅甸區’와 ‘미모사(ミモ-ザ)’, 서울역 앞의 ‘돌체’ 등이 194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 현민은 「현대적 다방이란」(『조광』 1938.6)이란 글에서 다방을 ‘차를 파는 다방’과 ‘차를 마시는 기분을 파는 다방’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면서 ‘명과’, ‘금강산’, ‘아세아’ 등은 차를 파는 가게이지 다방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 차를 마시는 기분을 파는 다방은 찻값이 다소 비싼 대신에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등의 고전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일종의 문화공간이었다.  


문화 공간, 혹은 무기력한 지식인의 집합소

다방은 문인, 예술가, 학생들의 안식처이자 일탈의 장소였다. 1930년대는 여러 다방을 전전하는 ‘다점 순례’가 일종의 취미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방은 “지식인의 무기력, 무의지, 무이상, 권태, 물질적 결핍, 진퇴유곡의 처지를 나타내는 곳”(현민, 「현대적 다방이란」, 『조광』 1938.6)이기도 하였다. 차 한 잔을 시켜 놓고 몽상적인 표정을 지으며 예술가인 체 하는 사람을 일러 ‘체병 환자’라고 하였고, 온종일 다방을 돌아다니면서 물만 마시는 사람을 ‘금붕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다방에서 두세 시간씩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사람을 ‘벽화壁畵’라고 하기도 했다. 이처럼 다방은 실업자 지식인들의 집합소였다. 그러나 다방이 단순히 ‘게으른 몽상가들’의 안식처만은 아니었다.

다방은 문화인과 예술인의 집합장소였다. 예를 들어, ‘멕시코’는 ‘카카듀’가 종로에서 사라진 뒤 거의 유일한 종로의 다방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문사, 음악가, 배우, 신문 기자들을 위시한 문화인이 모여드는 중심 공간이었다. 이봉구의 증언에 따르면, 이광수, 변영로, 김석송(김형원), 안석영, 구본웅, 도상봉, 김정항, 김을한, 이승만, 서월영, 홍종인 등이 이곳에 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멕시코 맞은편에 서양식 술집인 카페 ‘낙원회관’이 들어서고 나서, 1930년대 중반에 ‘멕시코’는 배우, 여급, 기생들이 가장 많이 출입하는 곳으로 변하였다.



‘낙랑파라’는 당시 예술가들의 안식처이자 창작의 산실이었던 대표적인 다방이다. 영화배우 김연실이 ‘낙랑파라’의 마담이 되면서 이름을 ‘낙랑’으로 바꾸었는데, 이곳에는 안석영, 최정희, 정지용, 김상용 등과 함대훈, 이헌구, 김광섭과 같은 해외문예파가 주로 출입하였다. 특히 ‘낙랑’은 ‘구인회九人會’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이렇다 할 개인 서재를 갖출 수 없었던 시절에 ‘낙랑’은 서재 겸 공동 토론장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문인들은 다방에 모여 조용히 시상詩想을 닦거나 소설을 구상하다가 돌아갔고, 영화인들은 외국 영화나 외국 배우들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살롱문화를 지향한 우리나라의 다방은 일종의 문화 공간으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각 다방의 마담이 참석한 좌담회(『삼천리』, 1936.12)에서 사회자는 외국에서 발달한 ‘살롱문화’를 언급하면서 조선에서도 그러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다방의 운영자 중에 예술가가 많다보니, 다방의 특색에 맞게 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행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아래층은 차를 파는 곳이고 위층은 아틀리에로 이루어진 ‘낙랑’에서는 ‘시성詩聖 괴테 백주년기념제’, 구본웅의 개인전, 제국대학 학생들의 ‘만돌린 연주회’, 그리고 매주 금요일 빅타 음반 회사의 신곡 연주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커피, 여전히 우리를 매혹하다

이제 일제시대 문화공간의 역할을 하던 다방은 역사의 저편, 혹은 시골의 어느 구석으로 밀려났다. 시골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다방은 나이 드신 어른들이 소일 삼아 읍내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공간으로 변하였다. 대신에 일제시대 여급의 시중을 받으며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을 지칭하던 ‘카페’가 ‘다방’을 대체하는 용어로 사용되면서 도시의 문화 공간으로 자리하였다. 이제는 수많은 특정 상표의 커피숍이 등장하여 카페를 대신하고 있고, 차 한 잔 시켜놓고 책을 읽을 수 있는 ‘북카페’도 출현하였다. 또한 차나 음식을 먹으면서 회의나 세미나를 할 수 있는 공간도 생겼다. 최근에는 기존의 카페에 영화, 노래, 인터넷 등을 즐길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인 멀티 엔터테인먼트 카페(Multi-Entertainment-Cafe) 조차 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 모든 문화 공간의 기원에 일제시대 다방이 자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여전히 커피는 우리를 매혹한다. 어느덧 차가운 바람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가을이 왔다. 따뜻한 커피가 간절해지는 가을, 불현듯 떠오른 추억에 울렁거리는 가슴을 커피 한 잔으로 진정시켜 볼 일이다.   


글·사진 | 장유정 단국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사진제공·연합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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