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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를 털어낸 소박한 정자 창덕궁은 조선왕조 태종 5년(1405년) 때 경복궁 동쪽에 이궁(離宮)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경복궁과 달리 언덕 지형에 지어졌는데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불규칙한 지형 지세를 이용해 경내 남쪽에 궁궐 건물을 배치하고 북쪽의 넓은 구릉에 후원을 조성했다. 후원 입구에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연못 부용지(芙蓉池)와 그 한가운데 떠 있는 둥근 섬을 만날 수 있다. 이 같은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론에서 비롯된 조화로운 형태를 의미한다.
부용지 바로 옆에는 주변 풍경과 자연스럽게 녹아든 부용정이 자리해 있다. 『궁궐지(宮闕志)』에 따르면 부용정은 숙종 33년(1707)에 지은 택수재(澤水齋)를 정조 17년(1793)에 고쳐 지은 뒤, 그 이름을 부용정으로 바꾸었다. 이때 정조는 직접 상량문(上樑文)을 지어 이를 기념 했는데 정조의 시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에 그 목적과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시문집 내용에 따르면 정조는 창덕궁 후원의 아름다운 경치에 비해 택수재가 낡고 기울어져 주위 경관과 어울리지 않아 새로운 정자를 지었다. 검소하고 소박한 규모로 하되, 신선이 살았다고 하는 중국 정원에 비추어 손색이 없도록 연꽃을 심어 군자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했다.
세상 만물과 조화하는 휴식 정조가 지향한 풍류의 뜻이 담긴 부용정은 정조와 그의 손자 효명세자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정조는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에 다녀오는 을묘원행(乙卯園幸)을 마치고 신하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부용정 부근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다산 정약용은 이 일을 자신의 문집에 「부용정시연기(芙蓉亭侍宴記)」라는 글로 남겼다.
「부용정시연기」에는 부용지에 둘러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잡는 이들, 그 옆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연못에 배를 띄우고 시 짓는 이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부용지에 새겨진 물 위를 뛰어오르는 잉어의 모습처럼 왕과 신하들은 부용정에서 함께 소통했다. 군신이 하나 되어 어울리는 모습은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부용정의 풍경과도 닮아 있다.
부용지에 새겨진 물 위를 뛰어오르는 잉어의 모습처럼 왕과 신하들은 부용정에서 함께 소통했다. 군신이 하나 되어 어울리는 모습은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부용정의 풍경과도 닮아 있다.
정리. 편집실 사진. shutterstoc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