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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선비정신의 미학 (19)] 죽음을 마다 않는 춘추필법, 탁영(濯纓) 김일손
글쓴이 tntv 등록일 [2018.12.02]



 

[선비정신의 미학 (19)] 죽음을 마다 않는 춘추필법, 탁영(濯纓) 김일손 

문장과 절행으로 시대 으뜸을 이루다 

글 송의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세조의 왕위 찬탈 꾸짖는 ‘조의제문’ 사초에 올려 ... 단종 명예회복 요구하는 상소문은 정론직필로 남아

▎김일손 선생의 절행을 기리는 청도 자계서원. 후손인 김형수 모계중·고등학교 이사장이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519년 전인 1498년 7월 1일. 연산군 재위 4년째인 무오(戊午)년이다. 윤필상(尹弼商)·류자광(柳子光) 등 세조의 집권을 도운 훈구(勳舊) 공신들이 임금에게 비사(秘事)를 아뢴다며 들어섰다. 사관(史官) 이사공이 배석을 요청하자 도승지 신수근은 “그대는 들을 필요가 없다”며 출입을 막는다.

연산군은 그 무렵 문사들이 사사건건 간섭한다며 분풀이를 벼르던 차였다. <자계서원지>에 따르면 그래서 임금은 류자광 등이 고하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억지로 죄를 엮고 있었다.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간다. 의금부 경력(經歷) 홍사호와 의금부 도사(都事) 신극성이 명령을 받고 경상도로 달려간다. 목적지는 경남 함양의 청계정사.

모친상을 마치고 풍질(風疾)로 요양하고 있던 신진 관료가 느닷없이 체포된다.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는 실록청 기사관인 정6품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이었다. 사관(史官)이다. 닥쳐올 사태를 직감한 것일까. 그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내가 잡혀가는 것이 사초(史草)에서 비롯됐다면 반드시 큰 옥(獄)이 일어날 것이오.”

‘죄인’은 압송돼 같은 달 10일 의금부에 갇힌다. 임금은 류자광 등의 보고를 받고 사건을 직접 지휘한다. 11일 연산군은 김일손이 쓴 사초를 모두 들이도록 명했다. 사초는 사관들이 그때그때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둔 실록의 초고에 해당한다. 국법에 사초는 임금이 보아서는 안 되는 금기 자료다. 탁영의 직속상관인 책임자 이극돈(李克墩)이 묘수를 찾는다.

연산군이 김일손을 국문하다


“예로부터 임금은 스스로 사초를 보지 못하지만 내용이 종묘사직과 관계가 있으면 살펴보지 않을 수 없으니 신 등이 검토가 필요한 곳을 절취해 올리겠습니다. 그러면 일을 자세히 살필 수 있고 또 임금은 사초를 보지 않는다는 뜻에도 합당합니다.”

임금이 승낙했다. 여기엔 이극돈의 사심이 개입돼 있었다. 김일손의 사초에 자신의 비행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손은 이극돈이 세조 시기 전라도 관찰사가 된 것은 불경을 잘 외웠기 때문이고, 또 정희왕후 상(喪) 때는 장흥의 관기 등을 가까이했다고 사초에 적었다. 이극돈은 내용을 고쳐줄 것을 사사로이 청했지만 김일손은 들어주지 않았다. 마침내 연산군이 김일손을 국문(鞫問)한다.

“세조 당시 일을 어디에서 듣고 기록했는지 말하라.”

“들은 곳을 하문하심은 부당한 듯하옵니다. 꼭 물으신다면 실록이 아마도 폐하게 될 것입니다.”

“네가 들은 일을 쓸 적에 반드시 함께 의논한 사람이 있을 터이니, 말하라.”

“나라에서 사관직을 둔 것은 사(史)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신은 직무에 따라 감히 쓴 것입니다. 이미 본심을 털어놓았으니 (잘못이 있다면) 청컨대 신은 혼자 죽겠습니다.”

누구나 들었을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이렇게 시작됐다. 죽음을 마다 않는 춘추필법(春秋筆法) 신진사림(新進士林)과 부패한 훈구세력의 충돌이었다.

8월 21일 지식인의 책무를 떠올리며 탁영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나섰다. 먼저 들른 곳은 경북 청도군 화양읍 토평1리 백곡(柏谷)마을. 복숭아와 감나무 과수원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니 선생이 자란 탁영종택 유의당(維義堂)이 나왔다. 하늘이 500년 전 그날을 기억하는 걸까. 내리쬐던 뙤약볕은 간 곳 없고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폭우였다. 수십 분간 이어졌다. 모든 걸 멈추고 험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빗줄기가 약해졌을 때 종택으로 들어가 김상인(68) 탁영 18대 종손을 만났다. 그는 포항대 건축과 교수로 일하다가 3년 전 정년을 맞았다고 한다. 종손은 2012년 탁영선생숭모사업회(회장 김순곤)가 펴낸 <탁영선생문집>을 넘기며 선조(先祖)를 회고했다.

“종택에 유품은 전하는 게 없습니다. 선조가 압송되면서 할머니는 관계되는 자료를 모두 불사르게 했답니다.”

압송 직후에 가택 수색 명령이 떨어진다. 의금부는 자료를 뒤져 권오복의 편지 등 <성종실록>의 사초 작성에 관련된 몇 가지 증거를 찾아낸다.

심문에서 문제삼은 결정적인 사안은 사림의 신망을 얻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었다. 항우(項羽)에 시해당한 초(楚)나라 의제(義帝)를 추모하는 형식을 빌려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것이다. 그걸 왜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느냐는 추궁이었다.

류자광은 김일손을 체포하기에 앞서 연산군에게 조의제문이 세조의 단종 시해를 비판한 것으로 보고했다. 이극돈이 이 사초를 찾아내 류자광에게 일러준 것이다. 김일손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경위를 이렇게 밝힌다.

“신은 일찍이 ‘노산(魯山, 단종)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 쪼았는데, 밤에 한 동자가 나타나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사실을 기록하고 이어 쓰기를 ‘김종직이 과거하기 전에, 꿈속에서 느낀 게 있어, 조의제문을 지어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고, 이어 점필재의 조의제문을 실었습니다.”

김일손은 담담히 자백했다. 사관이 춘추필법에 따라 적었을 뿐임을 상기시킨 것이다.

공자가 춘추를 집필한 이유


▎자계서원 동재가 된 운계정사(사진 왼쪽). 김일손 선생이 1498년 세우고 독서하던 곳이다.
춘추필법. <춘추(春秋)>는 공자가 쓴 노(魯)나라 역사서다. 노나라 은공(隱公)부터 애공(哀公)까지 12공(公) 242년의 기록을 담았다. 본래는 노나라 사관이 기록했지만 공자는 독자적인 역사관으로 내용을 덧붙이거나 삭제했다. <맹자> 등문공(滕文公)·이루(離婁)편에는 공자가 <춘추>를 쓴 동기가 나온다. 군부(君父)를 시해하는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배출되는 혼란기에 명분을 세우고 인륜을 밝혀 세상을 바로잡고자 <춘추>를 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춘추>는 선비들의 필독서인 오경(五經)으로 분류된다.

연산군은 이어 류자광에게 심문을 넘긴다.

훈구파 류자광은 상소 한 장으로 세조의 부름을 받은 뒤 권부의 중심으로 진입한 인물이다. 그는 예종 시기 27세 병조판서 남이를 역모죄로 제거하고 성종 때는 당대 최고 권력자 한명회를 탄핵하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자계서원 강당 중수기. 서원은 현종 1년(1660)에 사액(賜額)됐으나 대원군 시기 훼철됐다.
점필재는 그런 류자광에게 치욕을 안긴다. 류자광은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최치원이 자주 올랐다는 함양 학사루에 시를 지어 건다. 점필재가 이후 함양군수에 임명되자 그는 류자광을 간신으로 보아 시판을 떼버렸다. 또 점필재의 제자 홍유손은 얼마 뒤 탁영의 낙향 송별연에서 류자광을 업신여기기까지 했다. 류자광은 그 치욕을 되갚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그런 때 이극돈이 조의제문 사초를 들고 온 것이다.

7월 26일 네 번째 국문은 선고(宣告) 공판 형식이었다. 판결문이 낭독됐다.

“김종직이 일찍이 화심(禍心)을 품고 무리를 지어 문자를 빙자해 선왕을 헐뜯었으니 용서 못할 죄라 대역으로 논해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할 것이며, 김일손을 비롯해 그 글을 칭미(稱美)한 권오복·권경유 등은 같은 죄과라 능지처사(凌遲處死)할 것이다. 그밖에 뜻이 같은 자, 난언자(亂言者, 어지러운 말을 내는 자), 알면서 고하지 않은 자, 나라 일을 비방한 자를 가려 베고 가산몰수 유배하라.”

신진 사림 수십 명이 중형을 받았다. 연산군은 승정원에 사건 처리를 일절 누설치 말라고 엄명을 내린다.

다음날인 7월 27일 정오 김일손은 광교에서 사지가 찢겨나가는 극형을 당한다. 체포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다. 그가 쓴 사초는 모두 불태워졌다. 왕조실록에는 그날 “대낮이 캄캄해 비가 물 쏟듯이 내리고, 큰 바람이 동남방에서 일어나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렸다”고 기록돼 있다. 김일손은 이렇게 비극적으로 생을 마쳤다. 불과 서른다섯이었다.

우암 송시열은 “선생은 문장과 절행(節行)으로 한 시대의 으뜸인데 불행히도 연산군을 만나 화를 입었고 그 화는 온 사림에 미쳤다”며 “지금도 당시 일을 말할 때면 기가 막히고 목이 메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추모했다.

탁영종택에 비가 그쳤다. 마을을 에워싼 동산이 선명하게 보였다. 종손은 “삼면이 토성”이라며 “잣나무가 우거져 이름 붙여진 백곡마을은 본래 고대 왕국인 이서국(伊西國)의 수도였다”고 설명했다. 이 마을은 50여 호 중 40여 호가 탁영 선생 후손 등 김해 김씨가 모여 산다. 종손과 함께 먼저 부조묘(不祧廟)에 들러 참배했다. 부조묘는 왕명으로 명현이나 공신의 종택에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부조묘는 선생 사후 80년에 세워졌다. 이곳에는 탁영 선생과 정부인 단양 우씨, 두 번째 부인 예안 김씨의 위패만 봉안돼 있다. 부조묘와 함께 문집 등을 보관한 영모각과 안채, 사랑채 등이 있는 종택은 임진왜란 당시 불탔다고 한다. 지금 건물은 복원한 지 1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절행은 부부가 하나같았다. 탁영 선생이 비명에 간 2년 뒤 부인 예안 김씨는 탈상하는 날 큰조카를 불러 양자를 부탁하고 자진(自盡)했다.

탁영의 기상 서린 듯한 500년 된 은행나무


▎청도군 화양읍 토평1리 백곡마을의 탁영종택 전경. 경북도 기념물 161호로 지정됐다.
김일손은 1464년(세조10) 경북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서 태어났다. 백곡마을 종택과는 3㎞쯤 떨어진 곳이다. 종손과 함께 이동했다. 할아버지 김극일과 아버지 김맹은 영남 사림의 맥을 이은 학자였다. 1661년 출생지에 현종 임금이 사액한 자계서원(紫溪書院)이 들어섰다. 서원 앞에는 청도천이 흘렀다. 대사성 김복한이 쓴 묘지명에 “선생이 화를 당했을 때 사흘 동안 핏물이 흘렀다”는 하천이다. 서원에는 1498년 탁영이 건립하고 독서하던 운계정사가 남아 있었다. 그 옆으로 탁영이 직접 심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청년처럼 푸르게 서 있었다. “수령 500년이 넘었는데… 지금도 열매가 많이 열려요. 저 나무를 볼 때마다 선조의 기(氣)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1480년 17세 김일손은 밀양에서 여묘(廬墓)살이 하던 점필재를 만나 수학한다. 운명이었다. 이때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생육신인 남효온(南孝溫) 등과 강론을 주고받으며 뜻을 함께 한다. 성리학에 바탕을 둔 나라를 만들자는 꿈이었다.

1486년(성종17) 김일손은 식년 정시 문과 초시와 복시에 연거푸 장원급제한다. 그의 첫 보직은 홍문관 정자 겸 춘추관 기사관이었다. 사관으로 관직을 시작한 것이다. 1490년 경연에서 단종의 후사(後嗣, 대를 이을 자식)를 세울 것을 주청하는 등 직언(直言)을 시작한다.

“끊어진 세계(世系)를 이어주는 것은 어진 임금이 행하는 매우 훌륭한 전례(典禮)입니다. 당초 노산군(단종)은 유약해 책무를 감당하지 못했을 뿐, 종묘사직에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종은 “참으로 가상한 일이나 가벼이 논할 일은 아니다”고 답한다. 김일손은 또 사초를 닦으면서 조의제문을 수록한다. 그때까지 빼어난 문장에 관운도 순탄한 편이었다. 1494년 성종 재위 마지막에 김일손은 병조 정랑, 홍문관 교리를 거쳐 이조 정랑에 오른다.


▎탁영 선생의 18대 종손인 김상인 씨가 종택의 사랑채인 유의당(維義堂)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탁영은 관직에 있는 동안 수많은 소(疏)를 올렸다. 정론직필(正論直筆)로 명문이 된 게 ‘노산군의 후사 세우기를 계청하는 글’과 소‘릉(昭陵) 복위를 청하는 상소문’ 등이다.

그해 12월 연산군이 즉위한다. 그때부터 삼사(三司)를 경계하는 등 분위기가 달라진다. 1495년 김일손은 소릉 회복을 주장하는 소를 올린다. 문종의 왕비며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의 지위를 회복하라는 것이다. 현덕왕후는 문종 사후 왕후로 모셔졌지만 세조가 단종을 시해한 뒤 평민으로 격하된다. 종묘에서 신주가 철폐되고 능은 파헤쳐져 물가로 옮겨지는 등 수난을 당했다. 이병휴(78) 경북대 명예교수는 “소의 이런 주장은 당대엔 금기였다”며 “그만큼 선생의 현실 대응 의식은 과감하고 강직한 면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전제적 왕권을 추구하던 연산군은 이 비판을 증조할아버지 세조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역린(逆鱗)이었다.

김일손은 붓으로 유교 이념을 지킨 강직한 선비였다. 사관직에 있으면서 왜곡된 사실(史實)을 바로잡고 시정(時政)의 비행(非行)을 직필해 후세의 거울로 삼으려 했으나 무오사화로 뜻이 꺾였다. 말과 행동이 가벼운 시대, 지식인을 숙연하게 만드는 삶이다.

창랑의 물이 흐린데도 갓끈을 씻다


▎탁영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자계서원 안의 은행나무. 수령 500년이 넘었지만 청년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
호는 탁영(濯纓). 갓끈을 씻는다는 뜻이다. 붙여진 유래는 분명치 않다. 갓끈은 선비를 상징한다. 초나라 시인 굴원은 ‘어부사(漁父辭)’에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고 했다. 탁영은 창랑의 물이 흐린데도 정론과 직필로 선비의 절의(節義)를 지켰다.

무오사화 8년 뒤인 1506년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축출된다. 그를 도와 사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모두 단죄됐다. 탁영의 죽음으로 사림은 절의라는 정신적 토대를 다진다. 다시 6년이 지난 1513년(중종8) 소릉도 탁영의 상소대로 복위된다. 죄인으로 죽은 탁영이 14년 만에 의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었다.

이후 조정과 유림은 명예회복에 공을 들였다. 중종 임금은 즉위 첫 해 선생의 죄를 사면하고 관작을 회복하는 교지를 내렸다. 서원은 사액되고 순조 임금은 1834년 ‘문민공(文愍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탁영 선생과 퇴계 이황을 사모해 모계(慕溪)라는 호를 붙인 후손(김용희)은 대원군 때 훼철된 자계서원을 복원하고 그 아들은 1947년 청도군에 정신을 잇는 모계중·고를 설립하기도 했다.

추모의 발길은 500년이 지나도 이어지고 있다. 1998년 순절 500주년 행사에는 전국에서 1500여 명이 자계서원에 모여 문학비와 추모비 등을 건립했다.

[박스기사] 거문고 마니아 탁영, 현존 최고 거문고를 만들다 - “금(琴)이란 마음을 단속하는[禁] 것”


▎탁영 선생이 탔던 거문고인 ‘탁영금’. 줄 아래 탁영의 거문고임을 밝히는 글이 새겨져 있다.
춘추필법의 선비 탁영 김일손은 거문고에도 조예가 깊었다.

1490년께 제작돼 탁영이 직접 타던 거문고는 보물 제957호로 지정돼 있다. 유일한 보물 거문고다. 그만큼 특별한 게 있다.

이 거문고는 오동나무로 까맣게 옻칠이 되어 있고 여섯 줄이 팽팽히 매어 있다. 거문고 중앙에는 ‘濯纓琴(탁영금)’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음각돼 있고 학(鶴) 그림이 아래에 그려져 있다. 크기는 길이 160㎝에 높이 10㎝, 가로 19㎝. 탁영 사후 옥강이란 선비가 탁영의 거문고임을 밝히는 글을 거문고 전면에 음각했다.

탁영은 거문고 마니아나 다름없었다. 그는 본래 집에 내려오는 오현금이 있었지만 유행하는 육현금을 구하고 싶어 했다. 그 무렵 탁영이 어느 집을 지나다가 대문은 패여 있는데 재목이 오동나무이고 재질 또한 좋은 걸 발견한다. 주인에게 물으니 “이제 100년이 지나 부엌으로 들어갈 때가 됐다”고 해 그걸 얻어 거문고를 만든다. 그래서 ‘문비금(門扉琴)’ 즉 ‘문짝 거문고’로 불렀다.

탁영은 거문고를 만들고 나서 “사물은 마땅히 짝이 있는 법인데… 오호라 이 오동이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사라졌을 것이니 누구를 위해 나왔다 하겠는가!”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알뜰히 간직하며 거문고 걸이에 명(銘)을 붙인다. “금(琴)이란 내 마음을 단속하는[禁] 것이니 걸어 두어 소중히 여기는 건 소리 때문만은 아니로다.”

탁영은 이렇게 거문고를 사랑했다. 학계는 이 거문고가 현존하는 최고의 거문고며 <악학궤범>보다 먼저 만들어진 악기로 학술적 가치도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탁영금은 탁영의 17대 종손(고 김헌수)이 보관해오다 공개했으며 1988년 문화재가 됐다. 기탁을 받은 국립대구박물관이 현재 이 거문고를 보관 중이다. 한편 영화 <서편제>로 친숙한 국악인 오정해는 오는 10월 14일 KBS <천상의 컬렉션>에서 이 탁영금을 선비의 거문고로 소개할 예정이다.

- 글 송의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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