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얼 어숙권의 '패관잡기' 조선사회 그린 소중한 책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19] "아녀자의 깊숙한 방에 몇 번이나 몸을 숨겼는가(縫羅深處幾潛身), 치마와 비녀 벗기니 정체가 드러났네(脫却裙釵便露眞), 물건이 본래 모습으로 변환하니(進物從來容變幻), 세상에는 양성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보다(世間還有二儀人)."

조선 초 서얼 출신 문인인 어숙권은 세조대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방지(舍方知) 스캔들을 소재로 이 같은 시를 지었다. 조선 초 천문학자로 역법서 '칠정산외편'을 지은 이순지(1406~1465)는 과부가 된 딸을 한 명 두고 있었다. 이순지의 딸은 과부로 살면서 사방지라는 노비를 데려다 10년간 함께 거처했다. 사방지는 그 어미가 어려서부터 여자 옷을 입혀 연지와 분을 칠하고 바느질을 시켰다. 사방지는 성장하자 사대부집에 드나들면서 여자 종들과 동침하는 일이 빈번했다. 사헌부에서 그와 사통한 여승을 심문하니 여승이 "그의 남경이 장대하더라"고 실토해 여의사 반덕에게 시켜 확인해 보니 과연 그러했다. 사헌부의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세조는 웃었다.

그러면서 "이순지의 가문을 더럽힐 염려가 있으니 따지지 말라"고 특명을 내린 후 처분을 이순지에게 맡겼다. 이순지는 곤장 10대의 가벼운 처벌을 내렸다. 그러나 이순지가 죽고 나서 과부 딸이 또다시 사방지를 불러들이자 그제야 조정에서는 사방지를 잡아다 매질하고 충남 아산으로 귀향을 보냈다.

워낙 파격적인 사건이라 조선 초 문인들 저서 속에 사방지의 일화가 자주 소개된다. 조선 사림파의 사표로 추앙받는 점필재 김종직(1431~1492)마저 사방지의 충격적인 일화를 문집에 언급했다.

어숙권이 저술한 '패관잡기'도 사방지 얘기를 자세히 기술한다. 어숙권은 책에서 "사방지의 불알은 늘 살 속에 간직되어 있어서 양성인(兩性人)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했다. 패관잡기는 중종(재위 1506~1544)과 명종(재위 1545~1567) 시기 민간에 떠돌던 패관 문학작품들을 모아 수록한 수필집이다. 조선 초·중기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여러 잡록집 중 하나로 총 6권으로 구성돼 있다. 설화적 소재가 풍부하며 서술 방식이 간결하면서도 진솔하다.

책에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중 기생이 여럿이다. 서울 기생 소춘풍은 자태와 용모로 이름을 떨쳤다. 젊은 시절 선비 이수봉과 연인관계였고 성종의 손자인 흥원군과도 염문을 뿌렸으며 중년에 접어들면서는 최국광의 첩이 됐다. 소춘풍은 하지만 곧 병이 들었다. 최국광은 그녀가 죽기 전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소춘풍은 "이수봉이 보고 싶다"고 고백했다. 최국광은 화를 내기는커녕 그녀가 죽은 뒤 고양의 선영에 고히 묻어줬다. 장사가 끝나자 이번에는 흥원군이 제물을 갖춰 그녀에게 제사를 지내고 싶다고 청해왔다. 역시 최국광은 담담하게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했다. 도량이 넓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역시 서울의 기생이었던 상림춘은 최고 거문고 명인이었다. 상림춘이 어느덧 일흔두 살이 됐지만 거문고 솜씨는 전혀 쇠하지 않았다. 다만 거문고를 타다가 옛일을 떠올리며 눈물을 떨어뜨리곤 했다. 그녀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이름을 남기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그려줄 것을 노비 출신 화가 이상좌에게 부탁했다. 이상좌가 자신의 옛 애인인 참판 신종호가 지어준 시까지 적어준 그림을 들고 사대부들에게 시를 구하러 다녔다. 정호음이 "아리따운 꾀꼬리 같은 노래가 비 지난 뒤에 꽃 사이에 매끄럽다"는 시를 지어주고 여기에 많은 선비들이 화답해 그림은 큰 시축(詩軸·여러 시를 적은 두루마리)을 이뤘다.

▲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 조선여인들을 후궁으로 삼았다.

원나라는 고려 여인을 데려다 후궁으로 삼았다. 원나라를 초원으로 쫓아내고 중원을 차지한 명나라도 초기에는 원나라의 전통을 이어받아 조선 여인을 뽑아갔다.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재위 1402~1424)는 태종 8년(1408) 사신을 보내 권씨(權氏), 임씨(任氏), 이씨(李氏), 여씨(呂氏), 최씨(崔氏) 등 조선 여인 5명을 선발해 후궁으로 뒀다. 영락제는 고려인인 공비의 아들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영락제는 5명의 조선 여인 중 권씨를 특히 총애해 현인비(顯仁妃)로 제수했고 나머지는 미인(美人), 소용(昭容) 등에 임명했으며 그녀들의 아버지, 오빠 등 가족들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여씨가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권씨를 시기했다. 1411년 조선의 내시 김득(金得), 김량(金良)과 명나라 내시 2명과 결탁해 독약인 비상을 권씨가 마시는 차에 넣어 죽게 했다. 권씨를 아꼈던 황제가 이런 사실을 전해듣고 크게 분노했다. 가담자들을 잡아들여 심문해 자백을 받아내고 모두 처형했다. 황제는 모든 일을 꾸민 여씨를 달군 쇠로 한 달 동안 지져 죽였다.

▲ 조선최고 여류화가인 신사임당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초충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전기 사대부들은 여류 문인을 어떻게 대접했을까. 가부장적 체제하에서 여성이 글과 글씨를 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어숙권은 고려 이후의 여류 문인들을 소개하면서 신사임당도 거론한다. 그러면서 "지금은 동양 신씨(東陽 申氏)가 있는데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포도와 산수는 절묘해 사람들이 안견(安堅) 다음간다고 평했다"며 "아, 어찌 부인의 필치라 해서 소홀히 해서야 되겠으며 또 어찌 부인이 마땅히 할 일이 아니라 하여 책망할 것인가"라고 했다.

걸출한 남성 화가들이 많았을 텐데도 당대 평론가들은 그녀의 이름을 당당히 안견 다음에 위치시키고 있다. 저자 역시 신사임당을 얘기하면서 그녀의 아들이자 대학자 율곡 이이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신사임당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 노비화가 이상좌의 불화첩 속 그림.

노비 화가인 이상좌 부자의 얘기도 패관잡기에서 담고 있다. 그는 노비였지만 어릴 때부터 그림 솜씨가 널리 알려져 중중의 특명에 의해 양민으로 신분이 격상돼 도화서에 배속됐다. 중종이 승하하자 중종의 어진을 그렸다. 1546년에는 공신들의 초상화를 제작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칭호도 받았다. 그의 재주를 물려받은 아들 이흥효도 명종의 어진을 그려 군직(수문장)을 하사받았다.

조선 전기 사회상도 전해준다.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여자의 숫자가 남자보다 훨씬 많았다. 어숙권은 음양오행에 의해 동방의 숫자는 하늘(남자)이 3인 반면 땅(여자)은 8이어서 그렇다고 했다. 이로 인해 남자가 첩을 2~3명씩 거느리기까지 하며 재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천한 여자라도 과부로 늙는 사람이 많다. 모든 관청이나 일반 민가에서 밥을 짓고 각종 물건을 공급하는 사람도 모두 여인이다. 중국 사신이 올 때도 길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은 죄다 여자들이어서 중국인들이 괴이하게 생각한다. 심지어 어숙권은 조선 조정이 중국 통역관도 여자를 내세워 중국 측에서 불만을 제기했다고 밝혀 우리를 어리둥절케 한다. 중국 사신 공운강은 조선이 옛 풍속을 따라 여자 통역관으로 응대하는 것은 예의를 따르지 않는 일이라며 조선 임금에게 여자를 남자 통역관으로 바꿔야 한다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행이 고쳐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 원각사지 10층석탑. 창건당시 원각사에는 거대 입상도 있었지만 중종때 절이 폐쇄되면서 여러절을 전전하다가 사라졌다.

서울 한복판인 종로2가의 탑골공원에는 원각사지10층석탑이 우뚝 세워져 있다. 원각사에는 석탑 외에도 대리석대불 입상이 있었음을 책은 증명한다. 어숙권은 "세조가 원각사를 창건하고 서 있는 부처를 만들어 모셨다. 어떤 일본 사신이 이를 보고 모든 부처는 앉아 있는데 원각사 부처는 걸어다니는 형상이어서 절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결국 연산군 때 절이 허물어지고 부처는 밖으로 내쫓기어 서너 절을 돌아다니니 걸어다닌다는 말이 과연 맞았다"고 서술했다.

원각사는 잘 알려진 대로 연산군 때 절 안에 기생들과 악사를 관리하는 장악원을 설치했고 중종반정 이후에는 공신들이 절터에 집을 지어 영원히 사라졌다. 원각사 불상은 조선 최대 크기의 입상이어서 멀리 일본에서도 많은 사람이 참배하러 왔던 것으로 전해져오고 있다.

패관잡기의 저자 어숙권. 그는 서얼이었다. 그런 만큼 서얼을 차별하는 세태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1415년(태종 15) 적서(嫡庶)를 구별하는 법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서얼 자손도 높은 벼슬을 할 수 있었다. 성종 때 법전인 경국대전이 편찬되면서부터는 서얼의 벼슬길이 원천 봉쇄됐다. 어숙권은 "(경국대전이 나온) 이후로 지금까지 100년이 채 못 된다"며 "세상 천지에 자리 잡고 있는 나라가 셀 수도 없겠지만 여태까지 벼슬길을 막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아직 들어본 바 없다"고 탄식했다. 그는 "높은 관직의 아들이면서 재주가 뛰어난데도 오직 외가가 하찮아 벼슬길이 막히고 남에게 머리를 숙이고 끝내 들창 밑에서 죽으니 불쌍하도다"라고 울분을 토했다.



▶어숙권(생몰년 미상)=조선 중종대 문인. 집안은 명문가로 조부가 좌의정을 지낸 어세겸(1430~1500)이다. 하지만 외가가 미천했다. 1541년(중종 36) 문과의 일종인 한리과(漢吏科)에 합격했지만 출신이 미천해 높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문장과 시평론에 탁월한 실력을 보였다. 중국어에도 능숙해 사신단의 일행으로 중국을 수차례 다녀왔다. 저서로 패관잡기와 함께 백과사전인 고사촬요가 전해진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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