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 | 오카모토 다카시 지음｜강진아 옮김 소와당 | 268쪽｜1만5000원
1896년 2월 11일 광화문 밖. 성난 군중들이 총리대신 김홍집을 에워쌌다. 김홍집은 '천명'(天命)이라며 순순히 몸을 내맡겼고, 군중들은 그를 때려죽였다. 고종은 이날 새벽 왕궁을 벗어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가면서 김홍집을 역적으로 규정했다. 1895년 10월 있었던 명성황후 시해사건 처리에 김홍집이 미온적이었던 것을 의심한 것이다.
김홍집은 1882년 미국·영국·독일과 조약을 맺을 때, 사실상 조선의 전권대표로서 청나라에서 파견된 마건충(馬建忠)과 긴밀하게 협력, 원만하게 업무를 처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해 여름 임오군란으로 일본과 교섭할 때도, 마건충의 지시를 받아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다. 청조의 조선 정책을 맡은 마건충은 김홍집에 대해 "생각건대 조선에서 첫째가는 인물이다"라고 평했다. 이렇듯 '친청파(親淸派)'로 알려진 김홍집이 10년 뒤엔 '친일파(親日派)'로 몰려 맞아 죽은 것이다.
19세기 중국의 대외관계사를 전공한 오카모토 다카시(岡本隆司·44) 일본 교토부립대 교수는 한말(韓末) 러시아·일본·청나라·미국 등 열강에 둘러싸인 조선의 운명을 김홍집의 타살과 연관 지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왼쪽 위)고종황제, (오른쪽 위)1896년 아관파천 직후, 일본군은 러시아공사관 앞에 대포를 끌고 와 고종의 환궁을 요구했다., (왼쪽 아래)아관파천 직전 총리대신 김홍집, (오른쪽 아래)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
조선은 중국을 사대(事大)하는 조공국이었다.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 서양 열강들이 밀려오면서 기존 청나라와 일본, 그리고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를 통해 급속히 국력을 늘린 일본은 1879년 청나라의 속국이던 류큐를 합병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청나라는 조선과 서구 열강과의 조약 체결을 서둘러 일본이 조선에 손을 뻗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일본 정부와 교섭하기 위해 일본에 간 수신사 김홍집이 청의 주일공사관 직원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들고 귀국한 것은 1880년 10월 초였다.
'조선은 청의 속국으로, 내정 외교는 조선의 자주이다.' 중국의 북양대신 이홍장과 김윤식이 협의한 미국과의 조약 초안 제1조였다. 이홍장은 이 조문을 통해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서양 각국에게 인정받으려 했다. 조선은 왜 이 조문에 동의했을까. 김윤식은 일기 《음청사(陰晴史)》에서 열강의 주권 침탈을 막기 위한 울타리로 청나라를 활용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고 적었다. 내정·외교는 이제까지 해오던 대로 조선의 뜻대로 진행하면 되니 손해 볼 게 없다는 것이다. 오카모토 교수는 이를 '속국자주'(屬國自主)라는 말로 정리한다.
19세기 후반 근대적 조약체제와 전통적 중화질서가 부딪치며 새로운 지역 질서를 만들어가는 길은 이처럼 험난했다. 100년 전의 한반도는 자주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주변 열강들의 세력균형과 한반도의 비무장화를 꿈꿨다. 그러나 이런 대외의존적 노선은 세력균형이 깨지면 '자주'가 무너지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경쟁자를 물리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만 봐도 그렇다.
그렇다면 유럽처럼 스스로 군사력을 키워 세력균형을 만드는 길은 없었을까. 불행히도 조선은 유럽과 달리, 일본·중국·러시아라는 초강대국을 이웃으로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들과 겨룰 만큼 군사력을 키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 이다. 저자 오카모토 교수는 김홍집이 당시 조선이 이런 노선을 추구하는 것이 '환상'이라고 생각했기에 상황에 따라 청나라를 지지하고, 일본의 갑오경장에 협력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100년 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들여다본 이 책의 문제의식은 북핵(北核)을 비롯한 한반도 문제의 해결이 지금도 주변 강대국들의 지지와 협력 없이는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