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밑 한국사-5] 조선 초에 김덕생(金德生)이라는 무사가 있었다. 숙종 때 그 후손인 김중태가 전 호조참판 송징은(宋徵殷)에게 찾아와 행장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행장이란 죽은 사람이 행한 일들을 기록한 일종의 전기집 같은 것이다. 그 행장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어느 날 태종이 가마를 타고 후원으로 행차를 했다. 그때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데, 호랑이는 거침없이 태종을 향해 달려들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김덕생이 번개처럼 뛰어나와 활을 쏘았다. 호랑이는 즉사했다. 김덕생 덕분에 태종은 목숨을 건졌다. 그런데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감히 임금님을 향해 화살을 날린 것이 가당하냐는 비난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김덕생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김덕생은 변명보다 실력을 보여주었다. 호랑이 그림을 그려 놓고 활로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임금님이 위태롭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이런 노력도 헛되어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목이 잘린 시신이 쓰러지지 않고 서 있었다.
대역죄인 김덕생은 정식으로 매장되지도 못하고 임시로 한양 근처에 묻혔다. 속절없이 세월이 흘러갔다. 억울한 한을 품은 김덕생은 귀신이 되어 세종대왕 앞에 나타났다.
"소신은 김덕생으로 황천에서 원한을 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부디 제 해골을 고향에 묻게 해주시고 자손에게 벼슬을 내려 이 원한을 풀게 해주십시오."
세종대왕은 김덕생에게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종2품)라는 벼슬을 내려주고 김덕생의 시신도 고향으로 보내주었다. 그 후에 김덕생의 귀신이 묻힌 곳에 개구리들이 시끄럽게 울어서 괴롭다고 하소연해서 근처에서 경작과 방목을 금하게 하고 대신 논밭 60결을 내려주었다.
행장의 내용은 이러했다. 조선 후기에 나온 행장에 따라 김덕생의 억울한 이야기는 여기저기 퍼졌다. 권력을 비판하는 일은 늘 달콤하다. 원래 나쁜 놈들이니까 이런 짓도 했을 거라고 여기며 같은 편을 확인하며 즐기게 된다. 하지만 역사의 칼날은 항상 냉정해야 한다.
사실 이런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된 큰 이유는 사료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일을 기록한 실시간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은 고위층 관리들만이 볼 수 있는 기밀자료였다. 더구나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양 때문에 그것을 뒤져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오늘날에는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자료가 되었다. 김덕생에게 과연 어떤 일이 생겼는지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김덕생의 진실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때는 태조 8년(1395년). 아직 태종이 임금이 되기 전의 일이었다. 연도부터 틀리니 뭔가 심상치 않다. 이때는 태종이라고 불리지 않고 정안군이라고 했다.
정안군이 사냥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성난 표범이 정안군을 덮쳤고, 정안군이 물려죽을 판이었다. 이때 호위무사 송거신(宋居信)이 말을 달려 따라갔다. 표범은 정안군에서 타깃을 송거신으로 바꿨다. 보다시피 김덕생이 잡은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표범이었다.
표범이 휙 몸을 날려 송거신을 덮쳤다. 송거신은 몸을 눕혀 간신히 표범의 공격을 피했다. 표범은 송거신 대신 안장을 콱 물었다가 나뒹굴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김덕생이 활을 쏘아 단발에 표범을 죽여버렸다.
정안군은 기사회생의 고마움으로 송거신과 김덕생에게 각각 말을 한 필씩 하사했다. 태조 이성계도 이 이야기를 듣고 송거신에게 말을 한 필 내려주었다.
김덕생의 이름은 태종 13년(1413년)에 다시 등장한다. 그 사건으로부터 18년이 지난 때였다. 김덕생의 사위 오치선을 봉례랑으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김덕생이 태종을 구했던 일에 대한 보답으로 사위를 관직에 임명한 것이다.
태종은 왕좌에서 물러나 상왕으로 있던 1420년에도 송거신과 김덕생의 아들이나 사위가 있다면 등용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처럼 오랫동안 송거신과 김덕생의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그런 태종이 김덕생을 죽게 내버려두었을까? 태조 때의 일이니까 죽인다면 태조가 죽였을 테지만, 태조가 그런 일을 할 까닭이 없다. 결정적으로 그 표범이 태종과 뒤엉켜 있던 것이 아니라 송거신과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덕생의 활이 태종을 위험에 빠뜨리게 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세종 18년(1436년)에 송거신이 올린 상소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난 을해년(1395년) 신이 김덕생과 더불어 태종의 잠저(왕이 되기 전에 평민으로 머물던 곳)에서 모시던 때의 공로로 말씀드리면, 김덕생이 소신보다 훨씬 월등한 공이 있는데도 소신만이 성상의 은혜를 입어 외람되이 공신의 칭호를 받고 벼슬이 1품의 자리에 이르렀사옵니다. 김덕생은 불행히 일찍 죽고 아들도 없이 두 딸만 있습니다."
송거신은 태종 1년(1401년)에 좌명공신 4등에 임명되었다. 공신이 된 이유도 표범으로부터 태종을 구한 공로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때 김덕생은 공신이 되지 못하였는데, 그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역모죄로 참수형을 당한 것이 아니다.
송거신은 김덕생의 무덤 앞까지 경작이 있어서 무덤을 침입하는 사람이 많으니 김덕생에게 높은 벼슬을 추증해서 그런 일을 막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고, 세종대왕은 이 상소를 받아들여 김덕생에게 동지중추원사의 벼슬을 내리고 송거신과 마찬가지로 좌명공신 4등의 자리를 내준다. 김덕생의 사위들도 장인어른 덕분에 벼슬을 지냈다.
세종 24년(1442년)에 우의정 신개(申槪)도 이런 말을 한다.
"김덕생은 위급한 순간을 맞이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분발하여 사나운 짐승을 쳐서 쓰러뜨렸으니 그 공이 매우 큽니다. 그러나 포상의 은전이 미치기 전에 사망하였고 그 자손도 없다 하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이렇게 실록에 세 차례에 걸쳐 이 사건이 되풀이되어 이야기된다. 뭔가 조작되거나 잘못 알려진 바가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김덕생은 태종의 목숨을 구한 대가를 대대손손 잘 받고 있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숙종 때 김덕생의 후손 부탁으로 쓰인 행장이 나오면서 김덕생의 억울한 사연이 널리 퍼졌다. 세종대왕 때의 일은 잊히고 만 것이다.
▲ 정조실록의 김덕생 관련 기사(정조실록 21권 10년 3월 14일 두번째 기사)
이리하여 정조 10년(1786년)에는 김덕생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상소가 올라오기까지 한다.
이에 대해 조정의 의론도 둘로 나뉜다. 한쪽에서는 이미 세종대왕 때 비와 사당을 세워주었으니 새로 관직을 내릴 필요가 없다고 한다. 또 한쪽에서는 김덕생이 모함 때문에 죽어서 너무나 억울하니 새로 높은 관직과 시호를 내려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세종대왕 때 비와 사당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그 행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즉 찬성 측과 반대 측 모두 행장만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이 훌륭한 기록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은 이런 때 쓰는 말인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