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마추어에 내맡겨진 한국 사업총괄 전문 컨트롤타워 없어 장기 연구·복원계획은 꿈도 못꿔
- 100년 大計 추진 일본 8세기 왕성터 발굴전담기관 지정… 60년간 35% 발굴, 건물 3채 복원
"천년 고도(古都)의 미래를 결정지을 마스터플랜을 발굴 법인 두 곳에서 짠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됩니까."
지난 5월 11일 열린 문화재위원회 합동분과회의. 사적·건축·세계유산분과 문화재위원들 앞에서 신라문화유산연구원 팀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신라 왕경 핵심 유적 복원·정비사업 종합 기본 계획(마스터플랜)'을 만든 실무 담당자다. 문화재위원들에게 나눠준 마스터플랜 자료 첫 장에는 계획안을 작성한 두 기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재단법인 신라문화유산연구원과 재단법인 계림문화재연구원이다. 둘 다 경주에 있으며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은 경주시가 출연(出捐)한 기관이고 계림문화재연구원은 주로 이 도시에서 대형 건물을 짓거나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공사에 앞서 업체 예산 지원을 받아 유적·유물 매장 여부를 확인하는 '구제(救濟) 발굴' 사업을 해온 기관이다.
쪽샘유적 등 경주 곳곳이 발굴장 - 지난 19일 경주 대릉원지구 쪽샘유적 44호에서 조사단원들이 무덤을 발굴하고 있다. 경주는 지금 도시 곳곳이 거대한 발굴 현장이다. 신라 천년 왕성인 월성은 중앙 C지구와 함께 해자(垓字) 발굴이 한창이고, 황룡사 터 남쪽 담장과 중문이 파헤쳐지고 있다. /김종호 기자
이날 회의에 참석한 문화재위원 A씨는 "국내 문화재·건축·도시환경·토목 전문가들이 모여 축적된 노하우를 짜고 짜내도 어려운 백년대계를 발굴 기관 두 곳에서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며 "더구나 경주시 출연 기관인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은 당연히 경주시가 요구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헤이조쿄처럼 100년을 내다보라
전문가들은 일본 고도(古都) 나라(奈良)의 8세기 왕성 터 헤이조쿄(平城京)를 발굴·복원의 모범 사례로 꼽는다. 헤이조쿄는 74년간(710~784) 일본의 도성이었다. 궁궐인 헤이조큐(平城宮) 유적을 포함한 방대한 규모의 도성 터로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일본 당국은 이 유적을 발굴·복원하면서 100년을 내다본 장기 계획을 꾸준히 실천해왔다. 19세기 중반 조사를 시작해 1955년부터 본격 발굴에 들어간 뒤 체계적으로 발굴 조사를 진행 중이다. 1952년 유적지 인근에 설립된 나라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를 전담해왔다. 60년 동안 발굴한 게 전체 면적의 35%밖에 안 된다. 헤이조큐 남쪽 정문인 주작문 외에 건물 두 채가 복원됐을 뿐 여전히 허허벌판이고, 언제 발굴이 마무리될지 알 수 없다는 것. 지난해 12월 경주에서 열린 '경주 월성 조사와 세계유산의 발굴·정비 사례' 국제 학술대회에 참석한 이노우에 가즈토 메이지대 대학원 특임교수는 "1960년대 이후 순차적으로 나라에서 토지를 매입하고 발굴 조사 성과를 적극적으로 주변 주민에게 공개하는 등 유적의 중요성에 대해 지역사회에 꾸준히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옛 모습 그대로… 60년 넘게 복원 중인 日 세계유산 - 일본 나라의 8세기 왕성 터 헤이조쿄(平城京). 지난 2013년 488차 발굴 현장 모습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문이 궁궐인 헤이조큐(平城宮)의 남쪽 정문인 주작문으로 60년 동안 주작문 외에 건물 두 채만 복원됐다. /나라국립문화재연구소 2013년 연보
◇컨트롤 타워가 없다
반면 경주에서 진행 중인 신라 왕경 핵심 유적 정비·복원사업은 장기간 발굴·복원을 책임질 컨트롤 타워가 없다는 게 학계의 지적이다. 최병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나라국립문화재연구소는 헤이조쿄 전체를 총괄하면서 일본 문화청 직속 기관이라 실행력도 있다. 장기적인 연구·조사 계획을 짜고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하면서 직접 발굴·복원 정비까지 책임지고 있다"며 "반면 신라 왕경 사업은 경주시가 주도하고 있지만 지자체는 실행력이 없기 때문에 발굴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주로 하면서 여러 민간 기관을 동원해 용역을 주는 상황"이라고 했다.
지난 2014년 문화재청, 경주시, 경북도에서 파견된 공무원 12명을 모아 '신라 왕경 핵심 유적 복원·정비사업 추진단'을 만들었지만 전문가들은 "일하는 사람은 없고 감독만 자꾸 만들어놓은 꼴"이라고 지적했다. 최병현 교수는 "경주처럼 중요한 역사 도시 복원사업은 지자체가 아니라 국가가 맡아 관리해야 한다"며 "일본 나라국립문화재연구소처럼 조사, 연구, 정비 복원을 계획하고 추진할 수 있는 총괄 컨트롤 타워 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미륵사지 서탑 하나를 15년 넘게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해체·복원하고 있다. 사람들은 꾸물대고 있다고 하겠지만 아마 민간 법인에 넘겨줬으면 괴물 하나 올라가고 복원이 서둘 러 끝나버렸을 것"이라며 "하룻밤 만에 졸속으로 끝난 무령왕릉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고 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헤이조쿄는 74년간 도성이었기 때문에 시대가 한정돼 있지만 신라는 천년 동안 수도를 한 번도 옮기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시기의 유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헤이조쿄보다 몇 배의 시간과 노력, 더 많은 토론과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