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무대 누비는 대표 설치 작가, 16년 만에 국내 회고전 열어 관객이 찰흙 공 빚는 '마음…' 등 작품 세계 총 정리한 9점 선보여 "찰흙 공처럼 마음도 둥글어지길"
광주비엔날레가 열리는 해, 국내 주요 미술관들은 9월 초 비엔날레 개막식 무렵 여는 전시에 특히 신경 쓴다. 개막식에 오는 세계 미술계 VIP들 필수 관람 코스가 미술관이기 때문이다. 광주비엔날레가 열리는 이 기간 올해 국립현대미술관이 선택한 작가는 설치작가 김수자(59)다. 그의 개인전 '마음의 기하학'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지난달 27일 개막해 내년 2월 5일까지 열린다. 현재 한국 미술계에서 김수자가 지닌 상징성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오랜만에 고국에 작품 보따리를 풀게 됐어요." 길게 늘어뜨린 말총머리를 매만지며 김수자가 말했다. 2013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 지난해 메츠퐁피두센터,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 개인전 등 세계를 무대로 눈코 뜰 새 없이 활동하는 그가 한국에 이렇게 큰 보따리를 푼 건 2000년 로댕 갤러리 개인전 이후 16년 만이다. 이번 전시는 국내 전시 중 단일 작가에게 최대 후원(9억원)을 하는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의 세 번째 전시다.
‘마음의 기하학’ 앞에 작가 김수자가 섰다. 19m 길이 거대한 타원형 탁자에 관객이 둘러앉아 찰흙 공을 빚는 작품이다. 손이 바삐 움직이는 사이, 잡념은 사라진다. /이태경 기자
'보따리 작가' '바늘 여인'. 이 작가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1980년대 홍익대 서양화과 대학원 시절 자신만의 작업 방식을 고민하던 중 어머니가 이불보를 꿰매는 모습을 봤다. 바늘이 천에 닿는 순간, 우주와 자신이 연결되는 듯한 짜릿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후 직접 바느질로 보따리를 꿰매고, 꿰맨 보따리를 옮기는 설치·퍼포먼스 작업을 해왔다. 스스로 '바늘'이 돼 군중 속으로 들어간 영상 작 '바늘여인'도 대표작이다.
오랜 여정 가운데 잠시 들른 고국에서 작심한 듯 이전과는 사뭇 다른 결의 신작을 내놨다. 전시 제목에도 쓴 작품 '마음의 기하학'은 길이 19m 대형 타원형 원목 탁자에 관람객이 앉아 찰흙 공을 빚는 작품이다. 전시장에 비치된 촉촉한 찰흙을 떼내 손바닥으로 살살 비벼 공을 만들고 있노라면 근심으로 꽉꽉 찼던 마음이 텅 비고 고요가 찾아온다. 손안에 작은 우주를 품은 듯한 넉넉함이 밀려오고 모난 마음은 둥글둥글해진다. 김수자는 이를 '허(虛)의 상태'라 한다. "손이 찰흙이라는 '물질'을 감싸면서 '비물질'의 정신세계로 연결된다"는 설명이다.
오방색의 타원형 철 조각(사진 왼쪽). 관객이 빚은 찰흙 공이 탁자 위에 모여 있다(사진 오른쪽).
손을 거쳐 감싸는 행위라는 점에서 이전 보따리 작업과 연결돼 있지만, 형식은 확연히 다르다. 영상이든 퍼포먼스든 늘 작품 속에 등장했던 작가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대신 그 자리에 관객, 즉 사람이 들어섰다. 신작 9점 모두 작가는 등장하지 않는다. 숨소리의 파동을 따라 바느질한 작품 '숨'도 디지털로 한 자수다.
"그 사이 애써 엮고 묶고 하나로 연결하려는 작업을 참 많이 했어요. 나이가 드는 건지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단 생각이 들어요. 그저 자유롭게 두자, 알아서 연결되게 놔두자! '렛잇비(Let it be)'인 거죠."
미술관 중정(中庭)에서 메시지는 더 또렷해진다. 오방색을 두른 타원형 철 조각이 바닥에 깐 거울에 반사된다. 이 작품은 미술관 중정의 외벽에 특수 필름을 붙여 빛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무지갯빛 상(像)이 맺히도록 한 작품 '호흡'으로 감싸진다. "관객을 조각이 감싸고, 그 조각을 다시 빛이 감싸지요. 보따리 안에 보따리가 들어간 거라고나 할까요." 여기서 예술이란 보따리를 묶는 마지막 매듭은, 작가가 아닌 자연의 몫이다.
30여년간 예술과 사람을 잇는 '바늘' 역에 충실했던 그에게 물었다. 당신의 삶을 엮은 바늘은 무엇이었냐고. "글쎄요, 가족? 나와 예술을 지탱시켜준 힘이죠." 이번에 대형 탁자 제작을 도왔다는 아들 정재호(30·재미 건축가)씨가 곁에서 미소지었다. '바늘의 가르침'을 준 어머니는 이제 여든하나가 되셨다. "아, 그때 이불 깁던 어머니가 지금의 저보다 젊으셨네요." 희미하게 웃는 김수자의 이마 위에서 흰머리가 빛났다. (02)3701-95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