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활자의 나라였다. 문치주의를 표방해 유교 이념과 법전 등을 토대로 나라를 다스렸고, 왕은 통치의 근간이 되는 책을 간행하기 위해 활자를 만들었다. 태종이 1403년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든 이후 조선 국왕들은 수백만점의 활자를 만들었다. 금속활자와 목(木)활자를 30여회씩 만들었고 한 번 활자를 제작할 때마다 최소 수만 점을 생산했다.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이영훈)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시대 활자는 무려 82만여점. 15세기에 주조된 한글 금속활자 30여점을 비롯해 17~20세기에 만들어진 금속활자 50만여점, 목활자 32만여점, 도자기 활자 200여점이 있다. 대한제국까지 실제 인쇄에 사용되다가 일부 흩어진 상태로 조선총독부로 넘겨졌고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이관된 것이다.
이미지 크게보기전시장 한복판에 조선 활자 5만여점이 펼쳐져 있다. 실제 활자를 보관했던 서랍에 어른 손톱만 한 금속활자들을 빽빽하게 넣어 진열했다. /조인원 기자
박물관이 21일 상설전시관 1층 고려3실에서 개막하는 테마전 '활자의 나라, 조선'은 활자 강국 조선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활자 82만여점의 전모를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다. 특히 전시장 한가운데 펼친 조선 활자 5만여점이 장관이다. 가로 1.5m, 세로 8m 면적에 어른 손톱만 한 금속활자들을 서랍에 넣어 빽빽하게 진열했다. 이재정 학예연구관은 "한 왕조에서 일관되게 사용하고 관리한 활자가 이처럼 많이 남아있는 예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중국에는 근대 이전에 주조된 금속활자가 남아있지 않고 일본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만든 금속활자 3만여점이 전해온다.
현존하는 금속활자 중에는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와 관련 있는 유물이 많다. 정조는 직접 많은 책을 저술하고 출판했으며 책을 간행하기 위해 활자 제작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탄생 60주년 되는 해에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화성에 행차한 기록을 담은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는 활자로 인쇄된 최초의 의궤이다. 박물관은 "이 의궤를 찍은 금속활자인 정리자(整理字)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정조의 치밀한 계획 아래 만들어진 활자"라고 했다.
활자를 보관해왔던 활자장(活字欌)의 전모도 처음 공개했다. 박물관은 전시를 위해 지난해부터 활자장 3점을 수리 복원한 결과, 장의 제작연대와 활자 보관 방법을 밝혀냈다. 정리자를 보관했던 장에는 안쪽 깊숙한 곳에 소목장(小木匠) 이름 과 제작 연대가 써있어, 1858년(철종 9)에 정리자를 다시 주조할 때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재정 연구관은 "한자 자전(字典)과 달리 부수를 줄여 효율적으로 보관 관리했고 획수가 아니라 자주 쓰는 글자와 그렇지 않은 글자로 나누어 보관했다"며 "조선시대 활자를 다루던 사람들의 독창적인 방식"이라고 했다. 9월 11일까지. (02)2077-9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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