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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주엽 문화부 선임기자

남쪽 끝자락, 영·호남 중간에 있는 통영(統營)은 유별나게 근·현대 예술인이 많이 나온 고장이다. 통영을 고향 삼아 사는 시인 강제윤에 따르면, ‘통제영 12공방’에서 비롯된 예술적 유전자와 신문물을 일찍 수용할 수 있었던 지리적 요인 때문이다.(문화일보 2015년 10월 8일자 ‘명작의 공간’ 통영편 참조)

‘통영’이란 이름은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통할하는 총사령부인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에서 나왔다. 3만여 명의 수군이 주둔하던 조선 최대 군사도시는 1603년(선조 36)에 세워진 뒤 1895년(고종 32) 없어질 때까지 300년 가까이 유지됐다. 많은 군사의 생필품과 군수품 제작을 위해 8도에서 뽑혀온 장인들로 소목방(가구 및 문방구), 야장방(무기를 만드는 대장간), 칠방(공예품에 옻칠을 하던 곳) 등 12공방이 꾸려졌으니, 이들이 사실은 당대의 예술가들이었다. 음악가 윤이상의 아버지도 소목장이었다. 통제영이 사라진 뒤에도 공방의 전통과 예술적 유전자는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과 가깝다 보니 어디보다 신문물이 먼저 들어왔다. 서울 원각사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근대식 극장인 ‘봉래좌’가 1914년 들어섰고, 1930년대에는 이 작은 고을에 영화사가 2곳이나 있었다.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정윤주, 소설가 박경리, 김용익, 시인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화가 전혁림, 연극인 유치진 등 통영 출신 예술가 중엔 ‘거목’이 많다. 청마문학관, 김춘수유품전시관, 박경리기념관, 윤이상기념관을 비롯해 통영전통공예관, 옻칠미술관 등 지금도 인구 14만 명에 불과한 이 작은 도시에는 예술의 향기를 풍기는 기념·전시관이 모여 있다. 또 이곳이 고향은 아니지만 화가 이중섭이 ‘소’ 연작과 ‘달과 까마귀’ ‘부부’ 등 대표작을 그린 곳이 바로 통영이다. 화가에게 영감을 준 예술적 분위기가 통영에 분명히 있는 것이다. 통영을 보면, 면면히 전해지는 예술적 유전자를 키우는 환경이 있으며, 그것을 키우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절감하게 한다.

통영시도 이를 모르지 않아서 ‘문화도시’에 방점을 두고 노력을 기울여왔다. 근래 아시아 2번째, 세계 10번째로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로 선정됐다든지, 아시아태평양관광도시진흥기구(TPO) 공동회장 도시로 뽑힌 것은 이런 노력의 결실이다.

그런 통영시가 120년 넘게 12공방의 맥을 이어온 추용호 중요무형문화재 제99호 소반장의 공방을 없애려 하고 있다. 200m도 채 되지 않는 자투리 도로를 짓는다는 명목이다. 현재 공방 건물을 중심으로 30m 정도를 제외한 좌우 양측 147m 구간의 공사는 끝났고, 시는 조만간 공방을 철거해 도로를 개통한다는 것이다. 문화예술도시를 앞세워놓고는, 면면히 이어온 문화예술 유전자를 잘라 버리는 한숨 나올 모양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진 12공방은 문화재청이 수백억 원의 예산을 들여 다시 지었지만 모조품일 뿐이다. 그런데 정작 남아 있는 ‘진짜’ 공방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셈이다. 통영시는 전시적인 ‘문화도시’보다 유무형의 자산을 어떻게 보존할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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