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팔만대장경, 하루 네 번의 인연
[중앙일보] 입력 2016.05.09 00:02
2011년 9월, 문화재 담당인 후배가 ‘팔만대장경’에 관심이 있는지 물었다.
간혹 해인사에 들렀을 때, 장경판전(藏經板殿) 바깥에서 살창으로만 뚫어지게 본 적 있었다.
사진은 고사하고 아무리 기자라도 출입조차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속으로 애태우다 발 길을 돌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히 관심이 있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추진해보겠노라며 후배가 말을 이었다.
“고려대장경 발원 1000년을 기념하는 ‘대장경천년세계문화축전’ 취재 차 해인사를 가는데요.
아직 취재 허가가 난건 아닙니다. 우선 먼저 내려가서 설득을 해볼게요.”
다음날 해인사로 향했다.
‘팔만대장경’사진 촬영 허가 여부를 떠나 문화축전 취재차 어차피 가야 할 길이었다.
당도하니 다행스럽게도 촬영 허가가 나있었다.
그런데 딱 10분간만 출입하는 조건이었다.
팔만대장경 보존국장의 인도하에 장경판전에 들어섰다.
숨조차 함부로 쉴 수 없는 긴장감이 엄습했다.
천 년의 숨결을 단 10분 만에 사진으로 담아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먼저 보존국장에게 부탁을 했다.
팔만대장경 사진을 찍고 있을 동안 ‘心’이 새겨진 경판을 한 장 찾아달라고 했다.
그 부탁에 보존국장이 씩 웃으며 한마디 건넸다.
“그래도 공부는 좀하고 오셨나 봅니다. 팔만대장경 5200만 자를 한 글자로 응축하면 결국 마음 심(心)이 됩니다.”
“예전에 마음 心자만 사진 찍는 분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맞습니다. 찾아 놓을 테니 얼른 다른 사진 찍으세요. 딱 10분입니다.”
얼마나 정신없이 찍었는지 모른다.
쫓겨나듯 떠밀려 나와서야 정신이 들었다.
천 년의 숨결을 느끼는 것은 고사하고 눈에 띄는 대로 셔터 누르기에 바빴음을 그제야 알았다.
보존국장을 다시 찾아갔다.
“스님 한 번만 더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제가 무능하여 사진을 제대로 못 찍었습니다.”
“안됩니다. 곧 다른 방송국에서 취재차 오기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도 10분입니다.”
“그럼 스님 인터뷰 사진도 어차피 필요하니 방송 촬영 때 뒤에서 찍도록 해주십시오.”
그렇게 어렵사리 허락을 구해 방송 촬영 팀을 따라 들어섰다.
방송 카메라 뒤에서 인터뷰용 사진을 촬영했다.
여지없이 10분이었다.
다른 사진을 찍을 겨를이 없었다.
그 다음부터 스님을 따라다녔다.
보존국장으로서 지켜야 하는 게 스님의 소임이었다.
기자로서 독자에게 천 년의 숨결을 전달해야 하는 것은 나의 소임이었다.
그러니 스님은 나를 피해다니고 나는 스님을 따라다녔다.
그 와중에 또 다른 방송국 촬영 팀이 왔다.
고려대장경 발원 천 년을 기념하는 문화축전이니 취재진의 발길이 연이었다.
다시 부탁하여 그들을 따라 또 들어섰다.
세 번째였다.
그때야 팔만대장경의 숨결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여지없는 10분 후 바깥으로 이끌려 나왔다.
바깥에서 들어오지도 못하고 기다리던 취재기자가 내 팔을 끌었다.
보여줄게 있으니 따라오라고 했다.
보존국장의 사무실로 들어서더니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대장경을 위에서 부감해 찍은 사진이었다.
이거다 싶었다.
마침 세 번째 들어섰을 때, 봐둔 장소가 있었다.
그때 스님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천 년의 숨결은 고사하고 10분의 숨결도 못 찍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찍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딱 10분만 주십시오.”
“정말이죠? 그리고 그 사진을 우리 보존국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고 약속하십시오.”
약속을 하고서야 허락을 했다.
네 번째 장경판전으로 들어서며 미리 봐둔 장소로 향했다.
스님에게 살창을 마주보고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높은 곳에 올라섰다.
판가를 연결하는 나무 지지대 위였다.
몸 기댈 곳 없는 20cm정도 폭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카메라도 떨렸다.
떨리는 다리와 손을 진정시켜야 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넓은 위 살창과 좁은 아래 살창으로 오가는 바람이 느껴졌다.
남쪽에서 들어온 바람이 대장경을 감돌고 빠져나가는 북쪽 창이었다.
그 바람을 호흡하면서 다리와 손이 진정되었다.
살창을 통해 넘나드는 빛과 바람, 바로 천 년의 숨결을 잇게 한 그것이었다.
당시 해인사 팔만대장경 보존국장이던 분은 성안스님이다.
그날의 인연으로 시시때때로 안부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 2014년 4월 27일 불의의 사고로 입적하셨다는 뉴스를 접했다.
청천벽력이었다.
스스로 팔만대장경 지킴이를 자처하고 대장경이 품은 천 년의 지혜를 설파하는 소임을 다하고자 애썼던 모습이 여태도 선명하다.
성안스님! 부디 극락왕생 하십시오.
권혁재 기자 shotgun@joongang.co.kr출처: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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