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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서 유물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박물관 측으로부터 매우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받는다. 그러나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만여 점의 유물들은 각각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제 박물관에서는 좀처럼 듣기 어려운 유물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그것은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며, 가슴 저린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박물관을 다시 찾아 전시장 속 유물의 이야기들을 곱씹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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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배성수 인천시립박물관 전시교육부 부장

무덤은 죽은 이를 위한 공간이다. 망자가 이승에서와 동일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생전에 사용했던 물건을 함께 묻는다. 이를 ‘껴묻거리’ 또는 ‘부장품(副葬品)’이라 부르는데 생활도구에서 의복, 동전까지 다양한 것들이 있으며, 망자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그 종류도 달라진다. 오랜 세월 땅 속에 묻혀있다 발굴을 통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껴묻거리는 매장 당시의 사회모습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도로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무덤
2004년 11월 2일 인천광역시 서구 석남동 118-5번지 일명 ‘봉수대로’ 건설공사 현장. 왕복 8차선의 도로를 내기 위해 포크레인으로 낮은 산자락을 절개하던 중 능선부위에서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무덤 1기가 노출되었다. 시행청인 인천광역시 종합건설본부는 이를 문화재청에 신고하였고, 문화재청은 관련 연구기관 및 연구자가 조사를 실시하도록 통보하였다. 그리고 무덤을 발견한지 40일이 지난 12월 22일 시립박물관에서 현장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견 당시의 회곽묘 모습

현장에서 마주한 무덤은 마치 군부대의 콘크리트 초소처럼 보였는데 절개된 구릉의 정상부에 두터운 회벽이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앞쪽과 윗부분의 회벽 일부가 떨어져 나간 채 내부의 목곽(木槨)이 드러나 있었는데 공사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무덤의 봉분은 이미 없어진 상태였고, 땅 밑 약 2m 지점에서 두께가 30cm에 달하는 회벽이 발견되었다고 하였다. 회벽 안쪽에 놓인 목곽의 뚜껑을 제거하자 나무관이 드러났다. 목관 내부에는 염습한 시신과 옷가지가 물에 잠겨 엉겨 붙어있었는데, 발견 당시 회벽 일부가 떨어져 나가면서 그 틈으로 빗물이 유입되었던 것으로 보였다.

회관묘 단면

매장 당시의 진공 상자, 회곽묘(灰槨墓)
양식적으로 보아 이 무덤은 나무관이 안치된 목곽 둘레를 두터운 회벽으로 감싼 뒤, 다시 그 주위를 숯으로 보강한 회곽묘에 해당한다. 회격묘(灰隔墓)라고도 불리는 이러한 무덤양식은 조선 전기 부유한 양반 계층에서 유행하였다. 당시로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회를 사용하여 묘곽을 두르는 등 많은 공력을 들여 조성하였기 때문이다. 불에 구운 석회(石灰)를 빻아서 가루를 낸 다음 물에 개어 사용하였는데, 강력한 접착력 때문에 전통시대 건축물에서 기와나 벽돌을 붙이는데 쓰였던 건축자재이다. 이렇듯 접착력이 강한 회벽을 무덤 안쪽에 둘렀기 때문에 무덤 내부는 바깥의 공기와 완전히 차단된 진공상태가 되어버린다.
따라서 회곽묘에서는 시신의 부패가 진행되지 않으며, 껴묻거리도 완전한 상태로 발굴된다. 우리나라 미이라의 대부분이 조선시대 회곽묘에서 출토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화학처리를 통해 시신의 부패를 방지했던 고대 이집트의 미이라와는 달리, 우리나라의 미이라는 회곽묘의 진공구조 때문에 만들어졌다. 그런 이유에서 망자의 사인(死因) 뿐만 아니라 앓고 있던 병명이나 마지막으로 먹었던 식사의 종류까지도 밝혀낼 수 있어 의학사 및 생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매장 당시의 회곽묘는 망자를 위한 신성한 공간으로 조성되었겠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당시 생활상을 그대로 담아놓은 진공 상자인 셈이다. 석남동 회곽묘 역시 부패되지 않은 시신과 껴묻거리가 발견되어 당시의 모습을 담고 있는 진공 상자였다.

염습상태(염습을 벗겨내자 미이라 상태의 시신이 나타났다)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
석남동 회곽묘에 안치된 시신은 부패가 진행되지 않은 미이라 상태로 수습되었다. 모발이나 치아, 손톱과 발톱은 그대로 남아있었고, 피부도 탄력이 느껴질 만큼 생생한 모습이었다. 다만, 발견 당시 떨어져 나간 회벽의 틈새로 스며든 빗물 때문에 약간의 변색만 있을 뿐이었다. 무덤의 주인은 신장 150cm의 작은 여성으로 모발의 색깔과 피부 상태로 보아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부인이나 할머니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보통 조선시대 무덤은 죽은 이의 이름과 관직 등을 적어놓은 명정(銘旌)을 관 위에 덮어놓기 때문에 묘비나 묘지명 등이 없어지더라도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석남동 회곽묘의 경우 발견 당시 스며든 빗물 때문에 명정의 금박 글씨가 벗겨져 버렸다. 이 여성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를 잃어버린 것이다.

▲공작흉배를 수놓은 장저고리
조선 전기, 길이 77cm 뒷품 63cm
옆트임이 있어 활동에 용이한 장저고리로 석남동 회곽묘에서 처음 출토된 지금까지 보고된 적이 없는 양식의 저고리이다. 매우 고급스러운 비단재질의 앞뒤에 금실로 공작과 모란꽃을 수놓은 34×40cm 크기의 흉배가 부착되어 있다. 흉배가 부착된 장저고리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으로 중국에서 명대의 복식이 발굴된 사례는 있다. 중국 명대의 영향을 받은 의복이라는 점에서 무덤 주인의 신분을 짐작할 수 있다.

▲말군
조선 전기, 길이 117cm 허리둘레 126cm
석남동 출토복식에서 가장 특별한 복식이 말군이다. 말군은 말을 탈 때 겉옷 위에 입는 뒤가 터진 바지로 그동안 문헌자료와 풍속화에서만 볼 수 있었던 것을 유물로는 처음 확인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남녀모두 착용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양반집 부녀자 외에 평민이나 기생은 입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무덤 주인의 신분을 알 수 있게 하는 생생한 자료이다.

무덤에서는 시신과 함께 33점의 옷가지를 포함하여 모두 49점의 껴묻거리가 수습되었다. 옷가지의 경우 고려시대의 양식을 간직한 조선 전기, 대체로 15세기 전반의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무덤의 주인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어렴풋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무덤에서 출토된 옷가지 중 단령(團領)이라 부르는 것은 관복이나 혼례복으로 사용되었던 옷인데 단령의 가슴부위에 공작 1쌍을 금실로 수놓은 흉배(胸背)가 부착되어 있다. 흉배에 들어가는 사물은 국가에서 법식으로 규정하였는데 조선 전기에는 문관 1품직만이 공작을 수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무덤의 주인은 조선 전기 중앙관직을 지낸 인물의 가족이었을 것이며, 상당한 부를 축적한 집안의 안주인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집안은 당시 부평도호부에 속했던 이 일대에 세거하고 있던 가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관 속의 단령 수습 장면(위), 단령의 흉배(아래)

무덤은 죽은 자의 공간이지만, 역사학자에게 있어 그 공간은 당시의 사회모습과 생활상을 파악 수 있는 살아있는 공간이다. 10여 년 전 석남동 도로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회곽묘를 통해 조선 전기 명예와 부를 가졌던 한 집안의 여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여성이 생전에 입었던 장옷, 저고리, 치마 등 각종 옷가지에서 조선 전기를 살았던 여성들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이 모두가 공사 현장에서 발견한 무덤을 그대로 훼손하지 않고 절차를 밟았던 당시 공사 관계자들 덕분이다. 지면을 빌어 당시 공사 관계자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 도로가 되어 없어져 버린 회곽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