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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정암(鄭岩)을 찾아서(2)

인천의 공연 100년

본 연재에서는 1900년대에서 2000년까지 지난 20세기 인천에서 있었던 다양한 공연을 살펴보고자 한다. 연극, 음악, 무용 등 다양한 공연과 함께 울고 웃던 인천인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서 인천에서 있었던 공연으로 지난 세기 인천인의 삶은 물론 한국과 세계의 문화를 생각하는 기회로 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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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정암(鄭岩)을 찾아서(2)

복혜숙과 인천
1925년 조선배우학교에 재학하고 고려영화제작소를 창립하면서 정암은 서울지역의 연극인, 영화인과 폭넓게 교유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1925년 창립한 고려영화제작소의 이구영 감독, 이필우 촬영감독 등은 동업자였고 영화 <쌍옥루>에 함께 출연한 배우 조천성은 당시 토월회 소속, 1927년 <낙화유수>에서 함께 주연을 맡은 복혜숙도 토월회 소속이었다. 정암은 이들과 교유하고 함께 작업하는 과정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토월회 연극에 출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중 복혜숙은 현재로서는 고일 이외에 정암에 대한 회고를 남긴 유일한 영화인이다. 1976년 작고한 영화사가 이영일과 있었던 인터뷰에서 복혜숙은 조선배우학교 시절의 동기 ‘정암’을 언급하였고 <낙화유수>의 주연으로 함께 연기한 사실도 확인하였다. 복혜숙의 회고에 의하면 정암은 내리교회의 교인으로 기독교인이었고 한국전쟁 시기 우체국장으로 있었으며 이 때문에 이후 부역혐의로 고초를 겪고 복혜숙에게 신원보증을 부탁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복혜숙은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라 거절하였고 인천사람들 중에서 보증인을 구해보라 조언했다고 하였다. 1970년대 생존해 있으면서 ‘시원성’이라고 하는 단체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구술 정황에서는 일종의 종교적 커뮤니티로 추정된다. ‘시원성’은 채록오류로 판단되는데 무엇을 지시하는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정암의 셋째 아들은 경찰로 근무했다고 한다. 정암에 대해 사전정보와 궁금한 점을 갖고 좀더 질문했다면 훨씬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인데 오로지 아쉬울 뿐이다.

복혜숙은 1904년 충남 보령에서 출생하였는데 부친 복기업은 감리교 목사였다. 고향에서 서학도로 박해를 받게 되자 이민선을 타기 위해 인천으로 왔다. 인천 역사에서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내리교회의 존스 목사가 주선했던 하와이 등지의 이민사업을 같은 감리교단의 목사 복기업이 참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복혜숙의 모친이 신체검사에서 도라홈(트라코마, 눈 결막질환)에 걸린 사실이 확인되어 이민선 승선이 좌절되었고 복기업은 인천 지역에서 목회활동을 하게 된다. 복혜숙은 돌날, 아버지가 담뱅이-오늘날의 만수동 담방리를 의미할 것이다-로 설교를 가게 되었고 인절미를 사서 돌떡이라고 먹여주었었다는 어머니의 회고를 남기고 있다.

복혜숙, 영화 ‘세 걸인’(출처 : 「실록 한국영화총서(상)」에서)

이후 복혜숙은 이화학당, 일본 기예학교 등에서 수학하였고 1920년대 신극좌 등을 전전하다가 조선배우학교에서 본격적인 배우 수업을 받았다. 그녀는 토월회의 <장화홍련전>, <춘향전>, <카추샤> 등의 연극에 출연하였고 영화 <낙화유수>, <지나가의 비밀>, <삼걸인> 등 영화사에 길이 남을 주요한 작품에 출연하였다. 그녀는 몸을 아끼지 않는 용기가 있었고 지적이고 절제된 연기로 주목 받았다. 특히 정암과 함께 했던 <낙화유수>에서는 실제로 강물에 몸을 던져 사고가 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복혜숙의 이력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카페 비너스의 주인으로서 허다한 연극인, 영화인에게 감정적 물질적 보살핌을 베풀었던 점이다. 그녀의 카페 비너스는 운영되는 동안 내내 문화사랑방이었다. 가난한 연극인, 영화인들은 차값도 제대로 내지 못했고 복혜숙은 정기적으로 그들의 외상장부를 폐기하였다.
비너스의 구체적인 운영 시기는 복혜숙 자신도 기억의 혼선을 빚고 있어 불확실하지만 1927, 1928년 경부터 8년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시기는 그녀의 삶에서 참으로 복잡한 시기였다. 처음에는 중혼 관계이기는 했으나 김성진과 1928년 결혼하였고 서울에서 기생으로 연예활동에 종사하기도 하다가 1930년에는 인천 용동권번에서 800원의 이적료를 받고 화적(花籍)을 옮겨 활동했다는 시기와도 겹친다. 복혜숙은 비너스 운영 적자를 연극, 영화, 방송극 출연, 권번에서의 연예활동 등으로 메꿨던 것 같다.

‘기생’이라는 직업에 대해 대부분 사람들은 ‘수청’과 같은 매춘형태를 연상하지만 이 시기 ‘기생’은 연예인이나 행사 도우미에 가깝다. 권번은 다른 말로 기생조합으로 요즘식으로 표현하면 연예인 매니지먼트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기생들은 조합비를 납부하고 각종 연회, 행사 등을 소개받았다. 오늘날에도 어르신들의 수연(壽宴)에 가면 고운 한복을 입고 절하는 것을 돕거나 노래를 불러 흥을 돋우는 행사 도우미를 볼 수 있다. 그 같은 역할이 좀더 사적인 자리에까지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단한 존중까지는 아니었을지라도 정도 이상의 비인간적인 무례는 허용되지 않았다. 오늘날 접객업소의 여성보다는 훨씬 격식차린 예의가 필요한 업종이었다. 일부 연구에서는 복혜숙의 인기에 대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과장되게 전하기도 하지만 추정에 의한 구술은 학술적 판단에서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공교롭게도 복혜숙이 용동권번으로 이적한 딱 그 시기에 인천 용동권번은 횡령사건이 적발되어 권번의 조합장 등이 사법처리를 받았다. 일각에서는 복혜숙이 주도한 것이라는 풍설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어쨌든 복혜숙은 1931년까지는 확실히 인천 용동권번에 적을 두고 있었고 1932년 토월회의 재기공연이 인천에서 실패하였을 때 복혜숙의 방해 때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천에서는 영향력이 있었던 것 같다. 1933년 1월에는 인천에서 뛰어나와서 종로의 비너스에 있다는 소식이 잡지 󰡔삼천리󰡕에 전하고 있으니 복혜숙의 인천 권번 시기는 1931년, 1932년 만 2년 가량이었던 듯하다.
이 시기 정암은 인천에 있었다. 이 시기를 새로 질문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고 또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이 시기 정암이 인천에서 활동한 것은 분명하고 복혜숙과는 이미 1925년부터 교유하고 있었으므로 그 교유를 이어갔을 것은 자명하다.

1926년 2월 연극 <동도(東道)>의 아버지
고일은 정암이 토월회의 연극 <동도>에 아버지 역으로 출연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연극 <동도>는 박승희, 김을한의 회고와 윤심덕의 인터뷰 기사가 남아있을 뿐, 구체적인 상황을 적시할 자료를 현재로서는 찾기 어렵다. 다만 토월회에서 1926년 2월 윤심덕을 주인공으로 <동도>를 상연한 것은 명백하고 불과 6개월 후 윤심덕이 사망한 것이 당시에는 엄청난 충격적 사건이었으므로 고일이 잘못된 기억을 남기고 있을 가능성은 아주 적다.

1925년 12월 23일부터 4일간이나 인천에서 공연하면서 성황을 이루었던 토월회는 해를 넘겨 1926년 초, 재정난과 내분으로 안팎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 또 한 명 새로운 배우를 영입하여 활기를 찾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이었다. 윤심덕은 1926년 8월 극작가 수산 김우진과 대한해협에서 동반자살하면서 짧은 생을 마감하지만 이때는 배우로서 새로운 삶을 막 시작해보려던 참이었다.

연극 ‘동도’에 출연하는 윤심덕, 배우로서 나쁜 세평을 감수한다는 각오에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윤심덕이 연기한 안나와 사랑에 빠지는 데이빗 역은 이백수가 맡았고 데이빗의 ‘아버지’ 역이 정암이었다. 「동아일보」, 1926.2.6.

토월회 간부진은 새로운 의욕으로 윤심덕의 인기와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작품을 구상하였다. 그래서 고른 것이 로티 파커(Lottie B. Parker) 원작, 그리피스(D. W. Griffith) 감독의 영화 를 연극화한 <동도>(또는 <동쪽길>)와 메리메의 <카르멘>이었다. 이 카르멘은 정암이 연출로 활동한 <칠면구락부>의 레파토리이기도 했다.

영화 는 1920년 발표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동도>라는 제목으로 1923년 11월 조선극장에서 개봉되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전형적인 멜로드라마 형식으로 도시의 화려한 무도회와 조연들의 마임에 가까운 재미있는 코믹연기, 청춘남녀의 로맨틱한 연애 등 흡인력 강한 줄거리에 대규모 파노라마 컷을 사용하여 아름답고 낭만적인 도시와 전원풍경, 장려한 스케일의 폭포 등 볼거리가 풍부한 작품이다. 특히 대규모 유빙이 소용돌이치며 흐르는데 안나를 구하기 위해 얼음 위를 달려가는 데이빗의 영웅적인 액션은 관중을 압도한다.

이경손은 이 작품을 조선 현실에 맞게 번안, 각색하였고 윤심덕은 주인공 ‘안나’, 번안작의 ‘연실’ 역을 맡았다. 한 가지 짚어두고 싶은 것은 ‘Way Down East’에서 ‘way’는 부사이므로 명사 ‘길’로 번역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하나의 번역 해프닝이라 하겠다. 안나의 새출발, 인생 역전에 중심을 두고 안나가 떠나온 동부 뉴잉글랜드에서 샌더슨을 만난 보스톤까지 과거를 저 멀리 둔다는 의미로 <동부는 저 멀리>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영화 ‘Way Down East’의 포스터(DVD 자켓)

영화 는 순진하고 아름다우며 정숙한 처녀 안나 무어(Anna Moore)의 이야기이다. 안나는 부유한 바람둥이 샌더슨의 청혼을 믿고 그와 결혼한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거짓으로 샌더슨은 자신의 친구에게 거짓 목사행세를 부탁하여 안나를 속였던 것이다. 샌더슨에게 버림받은 안나는 홀로 출산하지만 결국 아기도 잃고 만다. 아버지가 없어 사생아 취급을 받으며 세례도 받지 못한 아기를 위해 스스로 세례식을 거행하는 장면은 토마스 하디의 <테스>를 연상케 한다. 방탕한 청년에게 속아 가짜결혼으로 수난을 겪는 것은 <오노가츠미>, <쌍옥루>의 기본 스토리와도 놀랄 만큼 비슷하다. 이 시기 세계는 여성의 새로운 출발이란 주제에 몰두하고 있었던 듯하다. 물론 경자와 달리 안나는 새로운 곳에서 일자리를 얻어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판사 바틀렛은 엄격하고 반듯한 청교도이다. 그에게는 현숙한 아내와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아들 데이빗이 있다. 이들에게는 케이트라는 아름답고 명랑한 친척아가씨가 있으니 바틀렛 부부는 데이빗이 케이트와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외에 그의 집에는 나비를 연구하는 교수가 하숙을 하면서 나비를 찾고 있었다. 여름을 맞아 케이트가 돌아오고 마침 길을 떠나온 안나가 완전히 지친 모습으로 바틀렛가를 찾아와 일을 구한다. 데이빗은 안나를 보는 순간, 사랑을 느끼고 안나에게 구애하지만 안나는 계속 거절한다.

▲ “우리 결혼반지가 여기 있잖아요”
결혼이 가짜라는 통보에 눈물 가득한 눈으로 호소하는 안나
안나 역의 릴리언 기쉬(Lillian Gish)는 당시 장안의 연인이었다.

공교롭게도 샌더슨이 바틀렛가의 이웃에 머물며 케이트를 유혹하고 나비연구밖에 모르던 교수도 케이트에게 매혹되어 케이트를 계속 따라다닌다. 이들은 케이트가 데이빗과 결혼할 것이라 생각하여 애태운다. 그러나 케이트는 데이빗이 안나를 사랑하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바틀렛 부부에게 자신들은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통보한다.
바틀렛 판사는 이웃 미르타에게 안나의 과거를 전해 듣고 믿지 않으면서도 안나가 있었다는 마을로 찾아가 직접 사실을 확인한다. 한편 샌더슨은 케이트를 유혹하기 위해 안나에게 떠나라고 위협하고 이때 바틀렛 판사가 돌아와 안나를 질책하며 당장 나가라고 한다. 안나는 절망하여 자신이 부정한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결혼한 것이었으며 가짜 결혼으로 자신을 속인 것은 샌더슨이라고 폭로하고 눈보라 치는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데이빗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안나라고 밝히며 안나를 찾아 달려나간다. 데이빗이 자살할 생각으로 유빙이 소용돌이치는 강에 뛰어든 안나를 구해서 돌아오고 전후 진실을 모두 알게 된 바틀렛 판사는 샌더슨을 축출하고 데이빗과 안나의 결혼을 허락한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데이빗과 안나, 명랑하고 발랄한 케이트와 숫기없는 교수, 코믹한 세스와 미르타, 세 쌍의 결혼으로 막이 내린다.
이 작품에서 윤심덕의 연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녀가 대단히 위축되어 있는 상태였던 데 한 원인이 있었을 것이고 청순가련한 릴리언 기쉬의 배역에 윤심덕이 그다지 어울리는 캐릭터는 아니었던 것도 이유일 것이다.

영화 ‘Way Down East’의 바틀렛 판사, 정암이 맡은 배역의 인물이다. 바틀렛 판사는 오해를 풀고 안나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암의 연기도 성공적이지 않았다고 볼 이유는 없다. 하녀 또는 고용인과 주인집 도련님의 결혼이 성사되는 것은 1923년 3월 󰡔동아일보󰡕에 당선된 진우촌의 희곡 󰡔개혁󰡕과 같다. 영화 <동도>가 개봉하기 이전에 발표된 작품이니 영향관계는 없지만 신분과 조건을 넘어 평등한 사랑을 꿈꾸던 칠면구락부 청년들 그 감수성의 궤적이 잡힐 듯하다. 무엇보다 바른 원칙에 따라 판단했으나 잘못을 깨닫고 이를 시정하는 바른 행동을 하는 판사 바틀렛을 열연한 정암의 내면에 아버지 정재홍이 있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지 않은가.

- 다음 편에 계속

글 윤진현 문학박사 wb42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