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았다’ 것은 시간을 품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낡음을 오히려 문화예술의 모티브로 삼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다.    
2012년 5월 25일 오후 3시. 낡은 시장에서 ‘컨퍼런스’가 열렸다. 상권 활성화 혹은 상인들과 관계있는 컨퍼런스가 아니었다. 오히려 복장이 다소 튀는 외국인들의 등장은 주변 장소와 약간은 이질적인 분위기였다.

이날의 장소는 남구 제물포시장. 행사는 인천시 남구와 유네스코 인천광역시협회 부설 UNESCO. A.poRT(유네스코 에이포트)가 주최하는 국제컨퍼런스였다. 컨퍼런스의 주제가 눈에 확 들어왔다. ‘폐허에서 페어까지(PEHUH(Ruin) to the Fair)’
폐허가 된 건물 공터에서 아시아권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홍콩, 대만, 싱가포르, 방글라데시, 중국의 비영리 전시공간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시 공간의 예술창작 운영프로그램 사례들을 소개했고, 갖가지 퍼포먼스 공연도 진행되었다.

제물포시장은 1972년에 개설되었다. 남구 수봉공원과 제물포역 사이, 인천남중 정문 건너편에 있다. 시장이 있다는 것은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증거다. 1970~1980년대 수봉산 자락을 중심으로 단독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인근에 선인재단을 중심으로 15개 초중고 학교가 있었다. 제물포 지하상가와 연결돼 유동 인구가 많은 제물포시장은 ‘특급상권’이었다.
2층 건물로 지어져 도로변과 사방으로 접하고 안으로는 작은 광장을 형성한 제물포시장은 청과물과 수산물, 만두집, 떡볶이집, 방앗간, 간이음식점 등 100여개 점포가 있어 학생들과 주민들이 많이 찾는 시장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주안, 연수지구 등으로 인구가 이동하고, 건물의 노후화, 지역 주민 연령의 고령화 등으로 제물포시장을 이용하는 주민이 줄어들면서 상권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사람이 빠져 나갈 때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이 시장이다.
1997년 인천광역시 재개발 사업지구로 지정되었으나 사업자가 나서지 않아 가게는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폐허’가 되었다.

“불야성이었지. 빈 점포가 하나도 없었어. 무슨 장사를 해도 장사가 잘되었는데... 하루아침에 이렇게 됐지”
시장 내부에서 유일하게 가게 문을 열고 있는 방앗간 주인 할아버지의 설명이다.
간혹 포장마차가 시장 안에서 불을 밝히지만 그것도 반짝했을 뿐 사람들이 발걸음은 점점 뜸한 편이다.  

건물을 일부러 무너뜨린 건지 아니면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허물어졌는지 곳곳이 마치 폭격을 맞은 듯하다. 한쪽은 오래된 쓰레기들이 쌓여 있고 반 토막 난 건물은 내장이 흘러내린 듯 철근이 고스란히 보이는 등 을씨년스럽다. 그나마 온전한 벽에는 그래피티 길거리 화가들의 화폭이 되었다.   

이 스산하고 무질서한 분위기를 영화 관련자들은 놓치지 않았다. 영화 <써니>, <신세계>, SBS 드라마 <황금의 제국> 등이 이곳을 촬영지로 선택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상가 건물들과 낡고 오래된 간판, 쌓여있는 쓰레기더미 등은 그들이 원하는 실제 세트장이다.
영화 <신세계>에서 홍콩에서 찍은 게 아닐까하는 장면이었던 형사반장 최민식이 이중스파이 이정재와 접선을 하던 실내낚시터 씬은 바로 이곳 폐건물에서 촬영했다.

영화 <써니>도 주 촬영지는 인천의 구도심인 남구였다. 특히 써니파와 소녀시대파가 맞닥뜨리는 장면은 바로 제물포시장 안에서 잡았다. 이밖에 제물포성당 일원 주택가 등 작품 속에서 1980년대 시대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영화 로케이션은 구도심의 재정비로 사라져 가는 도심의 기록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갖는다.

김민영 I-View기자 gem07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