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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01(작은 언덕 위 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벤치는 마치 동화 속 삽화와 같은 풍경을 연출해 '명성산 가을동화'라는 부제를 붙여본다.)

17년을 사이에 두고 태봉국과 신라는 고려 왕건에게 차례로 나라를 잃었다. 비운의 두 사람인 태봉 국왕 궁예와 신라의 마지막 태자 김일(마의태자)의 구슬픈 울음소리에 산봉우리도 같이 따라 울었다는 명성산(923m). 아직 그 끝을 놓지 못하고 있는 맹렬한 여름의 끝자락에 명성산을 찾았다.

명성산 도처에서 만나는 궁예의 흔적
명성산 골골처처(谷谷處處)마다 펜션이요 캠핑장이 들어섰다. 언제부터 산중에 이렇게 잠자리 문화가 횡행하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반백의 머리로 보기엔 모든 것이 상전벽해다. 물질문명이 발전할수록 여가문화 역시 비례해 성장한다. 그런데 이런 좋은 곳에 와서도 스마트폰을 열심히 만지작거리는 캠핑촌의 저 젊은이들은 뭘까? 세상은 눈 깜짝하면 뒤처지고, 한숨 돌리고 나면 또 퇴보된 기분이다. 뭔가에 늘 쫓기는 기분, 따라 가고자 열심히 허덕인다고 해서 능히 따라잡을 수 있는 세상 또한 아닌 듯하다.

↑ 0007(등산로 초입의 캠핑카 펜션. 언제부터 산중에 이렇게 잠자리 문화가 횡행하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반백의 머리로 보기엔 모든 것이 상전벽해다.)

산안고개(山內峴)는 '산속에 있는 고개'라는 뜻인데, 많은 이들이 '신안고개'라고 오칭(誤稱)을 한다. 포천시에서 발간한 안내책자에는 '현재 신안고개라고 호칭하는 곳은 '산안고개 입구'이고, 입구에서 정상을 향해 가다가 만나는 삼거리 근방이 산안고개'라고 설명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산안고개는 포천과 철원을 넘나드는 산 속 고개였던 모양이다. 산안고개 입구에서 정상을 향해 오르다가 계곡과 조우하기 직전에 '심술바위'를 만난다. 산행객의 길을 막는 바위니 그런 이름이 붙었나보다. 하지만 사람들이 저 바위를 귀찮게 하는 것이지, 저 바위가 사람들의 갈 길을 막진 않았을 일이다. '남 탓'이 일반화되니 자연물에도 사람의 생각을 심는다.
산안고개를 통해 정상으로 가는 길은 내내 너덜길이다. 비가 오면 물길이 되고, 비가 그치면 산길이 되는 너덜길을 걷는 산행객은 무척이나 힘들다. 깡충 걸음으로 돌들을 건너야 하고, 신발이 바닥에 온전히 접지하질 못하니 심신은 이내 피곤해진다. 너덜을 '너설'이라고도 하는데, 산비탈에 돌들이 많이 깔린 곳을 의미한다. 낭떠러지에서 바위들이 굴러 떨어져 계곡을 이룬 곳을 흔히 '너덜지대'라고 하는데, 너덜은 우리 귀에 익숙한 '너덜겅'의 준말이다.

↑ 0005(산안고개 입구에서 만난 심술바위. '남 탓'이 일반화되니 자연물에도 사람의 생각을 심었다.)

떨어지는 물이 없으니 폭포라고 불러줘야 할지 난감한 작은 폭포 속에서 바닥을 드러낸 암반이 눈에 많이 익숙하다. 혹 예전의 TV 드라마 <태조 왕건> 마지막 회에 나왔던, 궁예가 숨을 거두는 바로 그 장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철원과 가까운 포천엔 유난히 애꾸눈 궁예의 이야기가 도처에 산재한다. 궁예가 왕건에게 쫓기며 쌓았다는 삼악산, 보개산, 명성산, 운악산 등지의 궁예산성들을 볼 때, 포천 일대를 떠도는 궁예의 얘기는 전설이 아니고 역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태봉국의 도읍지였던 철원이 옆 동네라, 포천 또한 궁예의 아성이었을 것이다. 포천 주민들에게 궁예왕은 역사가 읽어주는 혹평이 아니라, 전설이나 설화 속 호평과 동정의 대상이다.
궁예의 전기를 보면 영웅적이면서도 신화적 스토리로 가득하다. 태생의 비밀(진골 출신 김씨 또는 신라 헌안왕이나 경문왕의 서자라는 설), 유모와의 도피생활, 불우한 성장과정 등. 정상적인 삶을 상실하고 홀로 우뚝 서기까지 그는 시절의 주변인으로 살아왔으며, 오직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일국을 창업한다. 궁예는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고, 나라의 기틀을 다지다가 기득권 세력에게 참혹하게 무너졌다. 자수성가한 궁예가 태봉국의 기초를 굳건히 닦은 후 후사에게 나라를 물려주고 삶을 마감했어야 해피엔딩인데, 고생만 하다가 개 같은 죽음을 맞이했다는 스토리가 무척이나 아쉽다. 왕건이 비록 태봉국 개국공신이라지만 창업자인 궁예왕의 노력과 능력에야 어찌 비교할 수가 있으랴. 길가 돌들이 올려져 있는 소원바위 지붕에 작은 돌 하나를 얹으며 궁예의 속절없는 바람을 다시 되뇐다.
"옴마니 반메훔."

'첩첩산중'이란 말 외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산안폭포 또한 초입의 작은 폭포와 마찬가지로 낙숫물만 떨어지는 수준이다. 산안폭포인지 아니면 이름 없는 무명폭인지 알 수 없지만, 산안골에 있으니 산안폭포란 이름이 맞을 듯도 하다. 폭포 주위엔 단풍나무가 반, 참나무가 반이다. 단풍나무는 제철을 옹골차게 기다리고 있는 반면 참나무는 시듦병으로 시름시름한다. 이 모든 게 날씨 탓이란 생각이 든다.
산길 한 모퉁이 허물어진 곳에서 숯이 섞여 나온다. 옛 산불의 흔적인지 아니면 이곳이 옛 숯가마 터였는지, 혹 화전민가의 아궁이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세월이 흐르니 땅 밑 사정은 아랑곳없이 새 생명이 움튼다. 세상 속 인간들의 삶이나 산속 초목의 삶이나 다를 게 하나 없다. 1시간 이상 오른 끝에 마침내 능선 안부가 보인다. 나무들 사이로 하늘이 환하듯, 안부를 본 내 얼굴에도 안도감으로 밝은 미소가 가득하다. 이곳까진 골짜기 너덜길을 주로 따라 올라왔기 때문에 전망은 전혀 없었다. 저 안부에 올라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좋은 전망을 볼 수 있으리란 기대감으로 충만하다.
안부에서 다시 능선을 따라 정상을 향해 오르니 돌무더기가 나타난다. 산허리를 따라 길게 뻗은 가지런한 돌들로 보아 궁예산성과 연결된 성곽임이 틀림없다. 왕건의 군사들에게 쫓기면서도 상당한 세월 동안 궁예의 병사들이 저항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궁예가 밑바닥부터 어떻게 쌓아 올린 왕국인데 그렇게 쉽사리 패망하고 사라졌겠는가? 귀를 기울여 당시 궁예 병사들의 한숨 소리와 한탄소릴 들어본다. 세상은 진정 이긴 자만이 정의로운 걸까?

↑ 0003(능선에서 바라본 명성산의 주봉들.)

남동편 능선을 따라 정상을 향하는데 이제야 조망에 어울릴 멋진 전망대들이 나타난다. 남방(南方)은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여 '첩첩산중'이란 낱말 외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사향산(665m), 관음산(733m), 관모봉(584m), 곰넘이봉(600m), 금주산(569m) 등 포천의 산들이 겹쳐져 눈 속을 파고든다.
능선 전망대를 만나 제대로 한숨을 돌린다. 아래를 바라보니 올랐던 산안고개와 산골 안 골짜기(샘골 또는 돌산계곡)가 보인다. 저 아래 사타구니 골처럼 생긴 삼거리가 산안고개인 듯하다. 명성산 서편 강포리에는 벼가 누렇게 익었다. 누런 벼를 보니 몇 해 전 철원 금학산에서 고대산 종주를 할 때 보았던 철원의 황금벌판이 생각난다. 그 장관을 보러 가을이면 금학산에 또 오르려고 벼른 게 벌써 오래 전이지만, 미처 못 가본 산은 앞에서 몸을 잡아 채고 멋진 추억은 뒤에서 맘을 잡아끈다. 멀리 보개산 정상 지장봉(877m)과 남으로 연결된 화인봉(810m), 삼형제봉(724m), 향로봉(610m) 등이 잇대어 마루금을 잇고, 그 앞으론 관인봉(717m)이 손짓하며 넘실댄다.

↑ 0002(명성산엔 몇 번을 왔지만, 정상석을 제대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오늘은 여유를 갖고 요리조리 카메라 셔터를 눌러본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멋진 능선을 따라

명성산엔 몇 번을 왔지만, 정상석을 제대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항상 정상에 서면 하산길이 바빠 증명사진만 찍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그냥 지나쳤지만, 오늘은 여유를 갖고 요리조리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산을 여유롭게 즐기려면 혼자서 다니는 게 좋지만, 안전과 재미 등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 홀로 하는 산행 또한 불안한 건 사실이다. 남에 대한 배려를 위해 쫓기는 산행을 할 것인지, 아니면 내 스타일의 산행을 위해 홀로 산행을 강행할 것인지는 아직도 난이도가 높은 숙제로 남았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정상에서 삼각봉을 지나 팔각정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잡아본다. 정상에서 갈 길을 바라보니 멋진 곳을 걷게 될 거란 예감이 앞선다. 보채고 기다리는 요소들이 없으니 마음 편한 산행이다. 하지만 삼각봉인지 모르고 앞으로만 가는 바람에 삼각봉 정상은커녕 기슭에도 오르지 못했다. 뒤돌아보니 이름 모를 봉우리에 정상석 한 귀퉁이가 보이는 듯해 소리쳐 물으니 역시 "삼각봉"이란 응답이 메아리로 들려온다. 다시 돌아가 삼각봉에 오를까 말까 잠시 고민했지만, 명성산 정상에 오를 때 시냇물처럼 흘렀던 등골의 땀과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삼각봉으로의 발길을 저지한다. 참 이상하다, 산 중에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는 게 왜 그리 싫은 걸까.
삼각봉을 지나자 억새가 섞인 가을동화 속 꿈길이 나온다. '룰루랄라' 노랫소리가 자연스레 나오는 멋진 풀숲길이다. 높고 푸른 하늘, 반석 위로 솟아 큰 그늘을 만든 한 그루의 나무, 드라마 속 순수한 여주인공이 어디선가 곧 나타날 듯도 하다. 하지만 일장춘몽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른하고 감미로운 풍치에 푹 젖어 정신이 몽롱할 무렵, 포사격장이 보이면서 TV 속 전쟁의 공포가 눈을 퍼뜩 깨운다. 즐거움이 가득했던 마음이 군생활의 기억으로 움찔해진다.

↑ 0004(억새밭 가운데 나무 아래엔 궁예약수(천년샘)에서 솟은 샘물이 졸졸 흐른다. 왕건에게 쫓기던 궁예와 나라를 잃은 슬픔에 서라벌을 떠난 마의태자가 이곳에서 목 놓아 울었다는 전설이 있다.)

바람과 함께 풀잎들이 나부끼는 풍경이 마음을 편안케 한다. 하지만 명성산에 '울음산'이라는 별칭을 갖게 해준 태봉국 궁예왕을 회고한다면 정겹고 편안하단 생각은 사치에 불과하다. 궁예는 왕건의 쿠데타군에게 쫓겨 산골오지 명성산에 들어와 돌 위에 앉거나 누워 새우잠을 자며 절치부심했지만, 결국 이곳 명성산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전설이 있다. 한편 <고려사> 기록엔 "궁예가 북으로 도망치다가 평강 땅에서 배가 고파 보리를 훑어 먹던 중 도둑놈으로 몰려 농부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전하나, 그것도 흘러 다니는 풍문을 승자의 입장에서 옮겨 적은 것이니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다. 역사나 역사를 기반으로 한 전설은 때로 너무나 드라마틱하거나, 승리한 자의 과장이 심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길가 모퉁이에서 거북이가 흘린 등껍질을 하나 본다. 등판의 골이 이리 구불 또 저리 구불이다. 구불거려도 부드럽고 온화한 골로 보이니, 은나라의 거북점(갑골점)을 흉내 내 오늘 산행은 안전하단 뜻으로 해석해본다. 산행 중에 거북이 등껍질처럼 생긴 문양을 가끔 보게 되는데, 인절미바위 혹은 거북이바위 등 많은 별칭으로 불린다. 산정호수는 포천시 영북면 산정리 내 관개용 저수지로 1925년에 만들어졌다. 호수 위로 산안마을이 보이고, 좌로 망봉산(363m)이 우로는 망무봉(294m)이 보인다. 망봉산(혹은 망산)은 궁예군이 올라 왕건 군사의 동태를 살피던 봉우리고, 망무봉은 궁예가 군사들의 훈련을 지켜보던 봉우리란 이름유래를 갖고 있다.
작은 언덕 위 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벤치는 마치 동화 속 삽화와 같은 풍경을 연출해 '명성산 가을동화'라는 부제를 붙여본다. 가을동화 다음 장은 그림 페이지다. 빨간 우체통, 눈에 익은 팔각정, 책바위로 넘어가는 낮은 봉우리, 바람에 흩날리는 억새밭 그리고 궁예샘물 등 최고의 볼거리요, 명성산의 전설들 중 핵심을 품은 곳이다. 팔각정엔 지방에서 올라온 산행객들이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억새밭에선 서서히 흰색 손수건을 흔드는 억새들이 들쑥날쑥. 억새밭 중간 나무 아래엔 궁예약수(천년샘)에서 솟은 샘물이 졸졸 흐른다. 왕건에게 쫓기는 궁예와 나라를 잃은 슬픔에 서라벌을 떠난 마의태자가 이곳에서 목 놓아 울었다는 전설은, 혹 야심한 밤에 졸졸 흘렀던 저 물소리는 아니었을까? 110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울음소리는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로 대신한다. 산행 중 물 떨어진 산행객은 천년샘의 '음용불가' 꼬리표에 역시 목 놓아 울고 싶다.

↑ 0008(산행 중에 거북이등껍질처럼 생긴 문양을 가끔 보게 되는데, 이들은 인절미바위 혹은 거북이바위 등 많은 별칭으로 불린다.)

궁예왕과 마의태자의 울음소리가 흐르는 억새밭
명성산 이름유래와 관련된 궁예왕과 마의태자에 얽힌 여러 이야기가 떠돈다. 왕건의 쿠데타로 궁예는 한밤중에 동주(현 철원) 풍천원 도성을 빠져 나와 명성산에 은거해 재기의 기회를 노리며 궁예산성을 쌓는다. 왕건의 군대가 명성산을 포위해 급습하자 궁예의 군사들은 뒷걸음을 치다가 절벽으로 추락해 죽음을 맞거나 처참하게 살육을 당했다. 피난길을 따라 나섰던 궁예 군사의 가족들은 이 장면을 보곤 온 산이 떠나가도록 통곡을 한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북쪽으로 패주하던 궁예는 어느 산기슭에 앉아 한숨을 돌리다가 서러움에 옷깃을 풀어헤치고 대성통곡을 한다. 그 울음소리에 맞춰 산도 울고, 산짐승과 날짐승도 함께 따라 울었다고 하여 '울음산' 즉 '명성산(鳴聲山)'이란 이름이 붙는다.
산 곳곳엔 궁예와 관련된 지명이 전해 온다. 궁예가 왕건 군사의 급습을 받아 싸운 곳이라는 '야전(野戰)골', 궁예와 병사들이 은신한 굴이라는 '궁예왕굴', 도피 중 쌓았다는 '궁예산성', 왕건에게 항복의 뜻을 전한 '항서받골' 등이 그것이다. 한편, 궁예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궁예가 포천 일대의 산악지역에서 성을 쌓고 싸우다가 명성산에서 죽음을 맞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동주 풍천원의 도성을 빠져 나온 궁예와 병사들은 왕건의 군사와 싸우며 명성산, 운악산, 삼악산 방면으로 점차 쫓겨 갔다고 추론하고 있다. 궁예 사후에도 태봉국 잔여세력이 왕건에게 계속 저항한 걸 보면 궁예의 추종세력이 완전히 소멸된 건 고려가 개국하고도 한참이 지난 뒤였을 것이다.
태봉이 망한지 17년 후인 935년, 신라의 경순왕이 경주를 통째로 들어 왕건에게 바치며 귀부하자 이를 반대하던 신라의 마지막 태자 김일은 어머니 죽방왕후 박씨와 처자, 충신, 열사 등을 데리고 강원도 땅으로 들어가면서 포천의 명성산에 들려 궁예왕과 같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0006(자인사 법당 네 모퉁이엔 장승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법당 내 부처님을 지키고 있다.)

궁예와 마의태자의 울음소리가 흐르는 억새밭을 지나 자인사로 내려가는 골짜기로 들어선다. 짧은 구간의 나무계단이 끝나자 급경사의 긴 너덜길이 나온다. 이왕 나무계단을 설치하려면 자인사 부근까지 설치했으면 좋으련만, 경사가 심한 돌계단 길을 한참 내려왔더니 무릎이 얼얼하다. 자인사 법당 네 모퉁이엔 장승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법당 내 부처님을 지키고 있다. 여느 절에선 볼 수 없는 불전의 모습이다. 장승은 원래 거리측정이나 마을과 마을의 경계표시, 풍요와 잉태의 기도처, 사찰의 수호신장 등의 용도로 많이 세워졌으니, 사찰의 전각을 지키는 것도 별로 이상할 건 없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악귀가 들끓건대 용과 사자로도 부족해 험하고 익살스런 모습의 장승까지 세운 것일까? 하긴 오가는 산행객들이 많으니, 그들이 속세에서 묻혀온 사악한 기운을 막으려면 이런 상징물이 많을수록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여러 봉우리와 산정호수 등 마지막까지 멋진 곳을 두루 둘러봤다는 생각에 오늘 산행은 대만족이다. 망봉산 좌측 상동주차장이 오늘 산행의 종착역이다. 산정호수엔 오리보트가 한가로운 모습으로 앞으로 나간다. 그러나 보기와 달리 오리보트를 탄 행락객들은 열심히 노를 젓는 탓에 전신이 땀투성이가 됐을 걸 생각하면, 그 안은 지옥이 따로 없을 것 같다.

↑ 0009(산정호수는 포천시 영북면 산정리 내 관개용 저수지로 1925년에 만들어졌다. 호수 위로산안마을이 보이고, 좌로 망봉산(363m)이 우로는 망무봉(294m)이 보인다.)

몇 번의 명성산 산행으로 추천할 만한 산행코스가 생겼다. 산안고개 입구를 넘어 강포3교에서 궁예능선을 거쳐 정상~삼각봉~팔각정~억새밭을 지나 비선폭포 쪽으로 내려가면 명성산 최고의 역사문화탐방 및 억새관람 트레킹 코스가 된다. 상동주차장에 차를 대면 강포3교까진 1시간 정도를 걷는다. 상동주차장이 날머리니 다른 방법이 없다. 대중교통 이용 시는 전철 1호선 의정부역 5번 출구로 나와 광장 좌측의 건널목을 건너면 편의점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그곳에서 138-6번을 타면 산정호수까지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산정호수에서는 운천이나 포천행 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있으니, 서울로 되돌아오는 교통편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출처:월간 마운틴
http://media.daum.net/life/outdoor/special/newsview?newsId=20140922113711361

억새밭에 스민 망국(亡國)의 서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