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법흥왕과 선덕여왕을 거치면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어 김춘추와 김유신 등 통합의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들이 등장하자 신라는 비로소 통일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신라가 이룬 통일 대지의 시공간은 광막하여 그 권역의 넓이와 가장자리를 짐작하지 못한다. 동양 최대의 9층 목탑이 서 있던 너른 들판에는 잡풀만이 무성하고, 허망한 역사의 흔적만이 남아 후세의 늦은 걸음을 꾸짖는다. 지나간 역사 위에 짐작할 수 없는 시공의 공백이 존재한다. 어느 눈 맑은 선지자가 긴 지팡이를 들어 새로운 백년의 길을 찾아줄 것인가? 돌아간 옛 왕의 무덤가를 돌아 빈 들판에서 새 천년의 길을 묻는다.
법흥왕릉이 위치한 효현동 마을에서 농부들의 모내기가 한창이다.
신라의 길목에서 만난 노동의 가치
광막한 대지 위에 신명 넘치던 통일 대국의 흔적을 찾아 걷는다. 길은 시간의 축적으로 메마른 들판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족적을 남긴다. 앞선 이의 발자취는 역사가 되어 그 길을 따르는 후세에게 길라잡이가 되는 것 역시 마땅한 이치다. 무성한 잡풀에 덮여 길의 흔적이 사라짐으로써 단절과 불통, 쇠퇴와 소멸의 시간이 도래했다. 지난 시간이 머무르는 공간에 분초는 멈추어 더 이상 약진하지 못하고, 새로운 역사적 공간을 생성치 못한다. 저기 먼 들판은 황량하고 아득하여 후세는 갈 길을 미처 알지 못한다.
경주역에서 내려 시내 외곽에 자리한 신라의 23대 법흥왕릉을 찾아 나선다. 법흥왕릉은 경주시내의 평지 고분군을 벗어나 경주의 서악이라 불리는 선도산 서쪽 기슭에 축조되어 있다. 대개의 능원이 경주 시내 일원에 분포되어 있으나, 법흥왕릉은 다소 벗어나 있어 사람의 발길이 뜸한 편이다. 법흥왕이 누워 있는 효현동 마을의 들머리로 든다. 농번기를 맞은 너른 들판에는 모내기가 한창이다. 모처럼 휴일을 맞아 일손을 거드는 아들과 흙투성이 늙은 아버지의 얼굴은 건강하고도 허물과 부끄럼이 없다. 가물어 마른 땅에 물을 대고 모를 내는 농부들의 노동은 신성하여 땅의 진정한 가치를 가늠케 한다. 노동의 가치와 삶의 가치는 가장 진실한 땅의 가치로, 이는 지배력이 미치는 통치 의미의 영토적 가치에 우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땅의 가치는 진실된 삶의 흔적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통일의 영토, 옛 신라로 드는 길목에서 생생한 삶을 만난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법흥왕릉이 위치한 효현동 마을에서 농부들의 모내기가 한창이다.
“여기서부터 대략 10분 남짓 올라가면 이정표가 보이고 커다란 능이 보일 것이오.”
구부러진 오솔길을 5분 정도 오르니 왕의 무덤이 고요하고 평온하다. 법흥왕은 신라 23대 왕이다. 왕은 즉위 7년(520)에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한다. 이어 8년 뒤인 15년에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불교를 정식으로 공인하며 고대국가의 모양새를 갖춘다. 비록 국가의 면모를 갖춘 것이긴 했으나 고구려보다 150여년, 백제보다 250여년이 늦은 것이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 백제를 주류로 한 고대 민족사에서 작은 변방에 불과했을 뿐이다. 하지만 신라는 법흥왕을 기점으로 통합의 힘을 키우고, 이를 토대로 삼국통일의 기회를 준비한다. 법흥왕은 19년에 가야를 병합하고, 23년에는 처음으로 연호를 일컬어 ‘건원(建元) 원년’이라 하여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법흥왕은 어우름의 통치를 근본으로 가야의 우수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가야 귀족을 신라의 지배계층으로 받아들인다.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평화적·수평적·개방적 통합방식이었다. 이러한 법흥왕의 합의 통합의 리더십은 향후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고 우리 민족사의 주류로 발돋움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둘이 아닌, 하나로 어우름’의 통합효과가 강성한 신라의 밑거름이 되어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법흥왕릉을 둘러보고 신라통일을 이룬 무열왕릉과 김유신 장군묘를 찾아 나선다. 법흥왕 이후 신라의 왕실은 불교를 통치이념의 기반으로 삼아 왕권을 강화하고 선덕여왕대에 이르러서는 신성한 권력으로서의 위상을 드높인다. 이어 김춘추와 김유신 등 통합의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들이 등장하자 신라는 비로소 통일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찬란한 신라의 문화와 통일의 기초를 다진 선덕여왕릉.
김춘추와 김유신의 통합의 리더십
이제 신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뤄낸 김유신과 김춘추의 묘로 발걸음을 옮긴다.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릉은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김춘추의 능이다. 행정구역상 경주시 서악동에 위치한 무열왕릉은 신라의 능 가운데 주인이 명확하게 확인된 능이다. 왕릉 입구에 태종무열왕릉비가 있는데, 태종무열왕의 둘째아들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이 남아 이를 증명한다. 거대한 왕릉을 둘러보고 뒤편 언덕에 자리한 서악동 고분군에 오르니 장엄한 통일신라의 역사가 한 걸음 가까워진 느낌이다.
이제 김춘추와 삼국통일의 위업을 함께 이루어낸 김유신 장군의 묘를 찾아 나선다. 처남 매부 사이였던 김유신의 묘는 무열왕릉에서 약 3㎞ 남짓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 묘는 지름이 30m에 달하며 둘레돌에 12지 신상을 조각해 왕릉에 버금가는 규모로 무덤을 장식한 것이 눈에 띈다. 이는 김유신이 가야 출신이라는 신분상의 약점을 극복하고 최고의 지위까지 올라 많은 민중들의 추존을 받은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에 즉위해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후 뒤를 이은 문무왕이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게 된 배경에는 가야 출신인 김유신과의 정략적인 합의가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가야와의 병합에서 수평적 통합을 이끈 신라 23대 법흥왕릉.
신라의 기상을 드높인 황룡사 9층목탑
이제 선덕여왕릉을 둘러보고 황룡사지로 발걸음을 돌린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원화로를 따라 남쪽으로 1.4㎞ 정도 가다 보면 신라 27대 선덕여왕릉이 위치한다. 사천왕사지를 가로지르는 철길을 건너 나지막한 낭산 정상에 선덕여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신라인들은 이곳 낭산을 수미산이라 여기고 도리천과 인간세계의 중간계에 있는 사천왕들이 있는 이곳에 나라를 지키는 호국사찰로 사천왕사를 세운다. 신라 건국 초부터 신성한 곳으로 여겨진 낭산 자락에는 신문왕릉과 효공왕릉, 신무왕릉, 효소왕릉, 성덕왕릉 등 왕릉들이 줄지어 있다.
낭산 정상에 오르자 울창한 소나무숲 속에 선덕여왕릉이 고즈넉하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의 큰딸로 태어나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재위 16년 동안 분황사와 첨성대 등을 세웠고, 특히 황룡사 구층목탑을 건립해 신라의 기상을 드높였다. 훗날 김춘추와 김유신 같은 영웅호걸을 거느리며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다. 능은 둘레 73m의 둥근 봉토분으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봉분 아래에 2단 보호석을 쌓은 것이 특징이다. 또 거대한 소나무숲이 능을 빙 둘러선 모습은 마치 여왕을 호위하고 있는 듯 당당하며 위엄이 있다. 잠시 능을 둘러보고 문무대왕의 화장터로 추정되는 경주 능지탑지를 돌아 황룡사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경주 낭산의 사천왕사지.
황룡사는 진흥왕에서 선덕여왕까지 신라의 최전성기 약 100년의 시간 동안 만들어진 사찰이다. 9층목탑이 있던 광막한 절터는 규모가 상당하여 그 가장자리를 짐작하지 못한다. 수평의 대지 위에 수직의 기상으로 세워졌을 높이가 80m의 9충목탑을 그려본다. 9층의 목탑은 주변 아홉 오랑캐의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수호하기 위한 염원을 담은 호국불교를 상징한다.
하지만 몽고의 침입으로 완전히 소실된 절터는 이제 빈 터로 남아 아득한 시공의 흥망성쇠를 짐작할 뿐이다. 누가 이 빈 터에서 긴 지팡이를 들어 지나간 역사의 흔적을 묻고 새로운 백년의 길을 찾아줄 것인가? 이미 사라진 천년의 빈 들판에서 다시 새 길을 묻는다.
<글·사진 이강 여행작가·콘텐츠 스토리텔러 leeghang@tistory.com>
출처:주간 경향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2014070718081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