宮, 이들이 있기에 살아 숨 쉰다

기와 자락을 타고 또르륵, 빗방울이 흘러내린다. 궁내는 시공을 초월하는 장소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이렇게 고즈넉한 풍경을 만나다니, 관람객들의 마음은 이미 조선으로 떠난 듯하다. 미국에 거주하다 잠시 귀국했다는 한 가족이 야간개방을 앞두고 막바지 점검 중인 경복궁관리소 직원들을 발견하고 도움을 청한다. 놀이동산을 마다하고 궁궐을 택한 어린 남매가 양호열 계장의 눈에도 퍽 기특해 보인 모양이다.

“경복궁은 조선시대 도읍지인 한양에 있던 5대 궁궐 중에서도 으뜸인 궁이야. ‘하늘이 내린 큰 복’이라는 뜻이 있는데, 500년 조선왕조를 지나면서 여러 변화를 겪은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지. 광화문은 많이 들어봤지? 그 광화문이 바로 경복궁의 정문이야.”

평범한 관리소 직원이지만, 양호열 계장은 딱딱한 역사책보다 쉽게 경복궁의 역사를 풀어놓는다. 경복궁 곳곳을 돌아다니며 관리한 지도 어느덧 4년이 됐다. 그러는 동안 열 켤레가 넘는 신발이 닳아 없어졌다. 사람들로 하여금 궁을 사랑하게 만드는 일 틈틈이 궁궐 훼손을 모니터하고 지키는 일도 한다. 서울 도심의 보물, 경복궁을 찾는 이들에게 고궁의 역사성과 문화재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그가 하는 일은 셀 수 없이 많다. 4월 30일부터 5월 12일까지 매일 2,000명의 시민을 대상으로 시행되는 야간개방을 앞두고는 일이 대폭 늘었다. 관람로 정비와 시설물 안전점검은 물론이고, 달라진 출입문 안내 현수막과 매표소 통제도 준비해야 한다. 해마다 야간개방 시기에는 120여 명의 전 직원이 투입돼 월 20일 이상의 강행군이 이어진다.

“사실 궁이 이렇게 시민 곁에 친근하게 다가온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2005년 경복궁 경회루가 공개되면서부터니까, 10년이 채 안 됐지요. 초창기에는 문에 발린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내부를 들여다보는 관람객도 많았어요. 관광객이 많은 봄·가을엔 이 손가락 구멍 때문에 경복궁 내 57개 목조건물의 창호지를 거의 매일 교체했다니까요. 결국 국보 제223호인 근정전에는 구멍이 잘 뚫리지 않는 비닐코팅 창호지를 바르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서동웅 시설계장이 전기 설치 공사에 여념이 없다.

“행여나 화려한 도심 조명에 익숙해진 시민들이 어두운 궁내에 당황하지 않도록, 궁 곳곳에 임시조명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엊그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경복궁 관람으로 내한 공식일정을 시작하는 바람에 작업에 차질이 생겼어요. 최종 테스트까지 완료하려면 한시가 급한데,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걸 보니 마음이 착잡하더라고요.(웃음)”

고궁 지킴이들, 서울을 역사로 물들이다

궁을 거닐면 곳곳에서 역사의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같이 비 오는 날, 경회루 앞을 지나면 어디선가 선조들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태종 때부터 성종,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경회루를 알뜰살뜰 가꿔 전승했는데, 임진왜란 때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던 것을 고종 4년에 중건했거든요. 밑에서 궁궐 기와를 올려다보면 꼭 역사의 물결처럼 보여요. 궁의 관리인으로서 저희는 그 수많은 이야기들을 사람들에게 전해줘야겠지요.”

옛 시간 속으로 들어가 수백 년을 간직해 온 이야기보따리를 풀다 보면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저문다. 바람을 밀며 걷던 길을 다시 등에 지고 되돌아오면 어김없이 밤이 돌아오고, 경복궁을 찾은 관람객이 모두 퇴궐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이들의 마지막 업무가 시작된다.

“궁은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궁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길이고요. 매일 확인하고 세심히 관리해야죠.”

경복궁은 현재 변신 중이다. 고종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 중이기 때문이다. 다시 또 새로운 역사의 출발선에 선 이 ‘집요한 지킴이들’이 한 땀 한 땀 촘촘히 채워갈 업무의 밀도만큼, 궁의 이야기도 더욱 흥미진진하고 풍성해질 듯하다.

글 윤진아 사진 이서연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