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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에이치(SH)공사가 경관 시뮬레이션을 통해 그린 종묘 정전에서 바라본 세운4구역 빌딩의 모습. 원래 계획대로 빌딩을 지으면 빌딩이 왼쪽 그림처럼 보이지만, 입면 녹화를 통해 오른쪽 그림처럼 보이게 하겠다는 것이 에스에이치공사가 문화재위원회 쪽에 제시한 안이다. 문화재청 제공

세계문화유산 ‘종묘’ 앞에 고층빌딩 추진 논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 맞은편의 고층빌딩 개발 계획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추진했던 이 개발 계획은 문화재청 심의에서 번번이 가로막혀 사실상 중단됐다. 서울시는 지난 27일 세운4구역 빌딩 높이를 최고 70m로 제한하기로 계획을 확정했고, 에스에이치(SH)공사는 종묘의 경관을 훼손하지 않는 방안으로 ‘건물 벽면 녹화’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렇게 하면 종묘가 세계유산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의 경관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문화재위원회 심의에서 번번이 반려돼왔던 종묘 맞은편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의 고층빌딩 건설 계획이 다시 추진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사업 시행을 맡은 에스에이치(SH)공사는 건물 벽면을 나무와 풀 등으로 꾸며 종묘에서 볼 때 ‘위화감’을 최소화하겠다는 대안을 내세우며 최고 70m 빌딩 건설 계획을 문화재위에 최근 제출했다.

27일 에스에이치공사가 문화재위에 제출한 심의 자료 등을 보면, 에스에이치공사는 서울 종로구 예지동 85번지 일대인 ‘세운4구역’에 옥탑을 제외하고 55~70m(13~19층) 높이의 빌딩 8개 동을 짓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빌딩 용도는 오피스텔과 사무실 등이다.

문제는 이 높이로 빌딩을 지을 경우, 종묘의 중심 건물인 정전에서 바라볼 때 건물 3~4개 층이 종묘 주변 나무 위로 드러나 도드라져 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종묘 특유의 엄숙한 분위기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얘기다. 종묘에서 보이지 않으려면, 55m 높이 빌딩의 경우 14m 낮은 41m로 지어야 한다. 이런 분석은 나무 높이 등을 실측한 결과를 토대로 종묘에서 세운4구역 쪽을 바라볼 때를 가정한 경관 시뮬레이션에 따른 것이다.

이에 에스에이치공사는 종묘 경관 훼손 논란을 피하기 위해 건물 벽면을 계단식으로 꾸민 뒤 나무를 심고, 벽면에는 초록색 풀을 붙여 종묘에서 잘 보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대안’을 내놓았다. 에스에이치공사는 종묘 정전에서 보이는 건축물은 보령빌딩 등 이미 17개에 이른다는 점도 들었다.

세운상가 최고 70m 8개동 재추진
4개동 종묘 나무 위로 튀어나와
‘엄숙한 분위기 해친다’ 지적에
SH공사 “벽면 녹화” 대안내놔
“허가땐 고층 우후죽순 생길것”

하지만 이런 계획은 2010년 5월 심의 결과의 취지와는 다르다. 당시 문화재위는 최고 75m 높이의 빌딩 계획안을 두고 ‘조건부 가결’ 결정을 내렸다. 에스에이치공사가 당시 제출한 시뮬레이션상으로는 이 빌딩이 종묘 안에 있는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실측을 토대로 한 시뮬레이션이 아니어서 반려했다.

문화재위 심의는 28일로 예정돼 있다. 만약 이 건설 계획이 심의를 통과한다면 앞으로 세운4구역 주변에서 추진되는 다른 고층빌딩 역시 제한할 근거가 사라지게 된다는 점에서 파장이 커질 수 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은 “세운4구역을 시작으로 세계문화유산인 종묘 주변에 우후죽순 고층빌딩이 들어서게 되면 서울을 역사문화도시로 만든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빌딩이 나무로 가려지느냐 여부에 따라 규제가 이뤄진다는 것은 국내 법령상 근거가 없어 논란의 여지는 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지난해 말 국회에서는 ‘세계문화유산관광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2010년 당시 문화재위원이었던 한 교수는 “서울은 큰 도시라 문화재 보호를 위한 규제가 워낙 약하다. 종묘를 지키기 위한 방법을 찾다가 어쩔 수 없이 주변 나무를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번쩍번쩍 금은방이 도깨비소굴로..."빚만 차곡차곡 쌓인다."

서울 종로구 예지동 85번지 일대 세운4구역. 2004년 세운상가 개발 계획 발표 이후 2008년 상인들이 이전하면서 상가 건물이 사실상 폐허가 됐다. 한때 1700여명에 이르던 상인 가운데 300여명은 아직도 이곳에서 장사를 한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세운4구역 재개발’ 6년째 지지부진

“예전에 금은보석 가게가 있을 때는요, 낮에 가보면 번쩍번쩍하고 보기가 좋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거지 소굴, 도깨비 소굴로 변해버렸어요.”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주변 예지동 85번지 일대, 지금은 ‘세운4구역’으로 불리는 곳에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한기승(79·여)씨는 최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연신 “억울하다”고 했다. 한씨는 예지동에 땅 175㎡(53평)를 가진 건물주다.

2007년까지만 해도 그의 건물 1층에는 보석가게, 2층엔 보석공장 등 가게 24곳이 입주해 있었다. 그때 한씨는 집세로 한달에 1000만원씩 받았다. 하지만 2008년께 서울시가 이곳을 재개발하기로 하고, 사업 시행자로 지정된 에스에이치(SH)공사가 상가 세입자들을 전부 내보내면서 이젠 임대료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빚만 늘어나는 형편이 됐다.

한씨는 “세입자들 내보내면서 보증금 돌려주려고 은행에서 3억원을 빌렸다”고 했다. 대출 이자는 에스에이치공사가 대납해주고 있다. 개발이 완료되면 한씨가 갚아야 할 돈이다. 2008년 이후 무려 6년째 재개발 사업이 멈춰 있다 보니 이자만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한씨는 “나중에 이자와 원금 등을 갚고, 세금 떼고 나면 남는 게 없을 것 같다”며 울먹였다. 또다른 토지주인 유승탁(74)씨는 “개인이 은행 대출을 받아 연체됐다면 그저 담보 일부가 처분되면서 청산되지 않나. 그런데 이건 에스에이치공사가 꼬박꼬박 이자를 내주고 있으니, 나중엔 건물도 날리고 추가로 빚까지 남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명박·오세훈 시장이 추진한 사업
‘장밋빛 미래’ 제안하며 상인 이주
도로 인접 가게만 영업 명맥유지

애초계획 문화재위 심의 계속 탈락
토지주 ‘수익률 0.7배도 안돼’ 우려
“애초에 종묘앞 초고층 무리” 비판도

관리처분 방식으로 진행중인 이 사업의 개발 주체는 토지주들이다. 사업시행자로 대리인 구실만 하는 에스에이치공사가 쓰는 돈은 온전히 토지주들의 부담으로 돌아간다. 에스에이치공사가 대신 내주는 대출금 이자, 상인들 이주비용 등으로 지금까지 쓴 1461억원(지난해 말 기준)이 모두 토지주들의 빚이다. 지금도 이 비용은 매달 6억5000만원씩 늘고 있다. 여기에 임대료 손실분까지 합치면 “토지주 300여명이 매달 부담하는 돈이 15억원에 이른다”는 것이 주민대표회의 쪽 주장이다.

상인들도 힘겹기는 마찬가지다. 예지동 상가들은 대부분 문을 닫고 폐허가 돼버렸다. 도로와 인접한 가게들만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예지동에서 40년 동안 일했다는 서울귀금속·보석클러스터조합 유종재(76) 이사장은 “세운4구역에서 일하던 상인이 1700명 이상이었는데, 이제는 300여명밖에 안 남았다. 임시로 마련한 세운스퀘어로 이전한 상인 400여명도 절반 정도 줄었다”고 말했다.

세운상가의 비극은 2004년 이명박 서울시장이 처음 개발 계획을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됐다.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은 “세계문화유산 목록에서 삭제될 수 있다”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이코모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하며 개발 계획을 밀어붙였다. 사업 시행을 맡은 에스에이치공사는 2008년 시범지구였던 세운4구역 건물주들에게 소유지분 가치가 2.19배 높아진다는 ‘장밋빛 미래’를 담은 사업제안서를 나눠주며 상인들을 이주시켰다.

하지만 이제는 “수익률이 0.7배도 안 될 것 같다”는 말이 토지주들 사이에서 돌고 있다. 개발 계획이 애초 최고높이 122.3m였다가 문화재위원회 심의에서 계속 탈락하며 이제는 최고 70m를 목표로 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부동산 경기도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에스에이치공사 강홍극 세운사업팀장은 “전혀 근거 없는 얘기”라며 “높이가 반토막이 돼 사업성이 떨어지긴 했지만, 사업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유 이사장은 “버젓이 세계문화유산이 있는데, 서울시나 에스에이치공사가 애초에 초고층 빌딩을 짓겠다고 했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어떻게 그것도 모르고 시작했느냐고. 그 대단하신 분들이!” 예지동 상가에서 만난 유 이사장은 세번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음성원 기자

음성원 기자 esw@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