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역사기행 9 불쏘시개가 될뻔 했던 겸재의 작품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 글·그림. 유환석


일제강점기였던 1933년대 초. 장형수라 하는 골동상인이 여행 중에 한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된다. 실례하겠소만, 하룻밤 묵어 갈 수 있겠소? 주인나리께서 허락하셨소. 이리 따라 오시오. 고맙소. 그런데 시례지만 주인께선 어떤 분이시오? 장형수가 머물게 된 집은 친일인사 송병준의 집이었다. 송병준 송병준은 오위도총부도사, 사헌부감찰을 거쳐 흥해군수, 양지현감까지 지낸 인물로,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전쟁의 형편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일본군을 배경으로 정치활동을 꾀했던 인물이다. 동포들은 일본인들에게 수탈당하고 온갖 고초를 겪고 있는데, 이런 으리으리한 집에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하고 있다니... 송병준의 집에서 묵어가게 된 장형수는 밤중에 변소에 가려고 방을 나선다. 그나저나 변소가 어디에 있나..아니 그런데 저애들은 이 시간에 뭘 하는 거지?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던 것일까?변소로 가던 장형수는 수상한 광경이 보이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한 머슴이 웬 문서 뭉치를 아궁이 속에 마구 쳐넣고 있었다. 그 옆에는 초록색 비단으로 정성스럽게 꾸민 책이 놓여 있었다. 잠시만!! 잠시만 멈춰보시오! 왜 그러시오? 뭔지 몰라도 불쏘시개로 쓰기엔 아까워 보이는데 내게 주면 안 되겠소? 거참, 성가시게... 정 갖고 싶으면 주인나리께 여쭤보시오. 이틀날, 장형수는 날이 밝자마자 송병준의 손자인 송재구를 찾아간다. 뭐 마음대로 하시오. 서화집을 손에 넣은 장형수는 서울로 올라와 현남서림으로 가지고 갔다. 한남서림은 일제강점기에 백두용이 문을 연 서점으로, 고서, 고서화를 취급했으며, 1932년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인수해 문화재 수집 창구로 활용하고 있었다. 아니, 이걸 어디서 구한 것이오? 이러쿵저러쿵, 이차저차해서.......... 전형필은 첫눈에 서화집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바로 겸재 정선(1676~1759)의 서화집<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이었다. <해악전신첩>은 겸재가 1712년 37세 때 금강산 유람 후에 그린 화첩으로, <금강내산(金剛內山)>을 비롯한 그림과 시 21점이 실려 있다. 정선은 금강산 그림을 통해 우리 산천을 묘사하는 새로운 필법과 흙산과 바위산을 음양대비로 표현하는 기법을 창안하여 남겼다.

글·그림. 유환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