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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익 논설위원 |
어문 논쟁으로 치닫지 말고 '복원'의 범위 어디까진지 국민적 합의를 이뤄내야
새로 만드는 광화문 현판의 글씨를 어떻게 해서 달까 하는 문제는 결국 한글·한자 어문(語文) 논쟁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광화문 현판 글씨에 관한 여론을 모으기 위해 얼마 전 열린 공청회에선 '광화문'을 주장하는 한글 진영과 '光化門'을 주장하는 한자 진영이 맞붙어 고함·욕설·인신공격이 난무했다. 보다 못한 청중이 "전기톱과 해머가 나오는 국회를 보는 것 같다"고 혀를 찰 정도였다고 한다.
안 그래도 광화문 현판 글씨 문제에는 난제(難題)들이 지뢰밭처럼 널려 있다. 2010년 광화문이 복원된 지 석 달 만에 현판에 쫙 금이 가자 문화재청은 이참에 글씨도 새로 해 달자는 여론을 받아들여 작업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현판 글씨를 현대의 누군가가 새로 쓸 것인지 아니면 과거의 글씨 중에서 석 자를 집자(集字)해 만들 것인지부터가 결정하기 만만치 않은 문제였다. 이 문제가 해결됐다 해도 새로 쓴다면 누가 쓸 것인지, 집자 한다면 누구의 글씨 중에서 고를 것인지 역시 목소리 큰 사람이 많은 한국 사회에서는 난제 중의 난제다. 그런 마당에 지난 50여년 동안 가장 해묵은 논란거리의 하나였던 한자냐 한글이냐의 문제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제 광화문 새 현판은 올해 안에 걸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게 돼버렸다.
문화재청이 광화문 현판 글씨에 관한 첫 공청회를 열면서 주제를 '한글이냐 한자냐'로 내건 것은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든 것이었다. 문화재청은 작년 말에도 광화문 현판 글씨에 대한 국민 여론 조사를 한다면서 한자냐 한글이냐를 맨 먼저 물었다.
광화문 현판 글씨 문제는 한글·한자 어문 논쟁과는 다른 문제다. '광화문'이란 현판을 올린다고 해서 한글전용론이 승리를 거두는 싸움도 아니고, '光化門'이라 한다고 해서 국한혼용론이나 한자효용론이 힘을 얻는 것도 아니다. 이번 일은 단지 광화문을 150년 만에 복원하는 데 때맞춰 현판을 새로 만들어 올리는데, 거기에 가장 어울리는 글씨체가 무엇인가를 정하는 문제일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광화문 복원이라고 할 때 '복원(復元)'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이냐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이루는 일이다. 현재 복원된 광화문은 1865년 대원군의 경복궁 중창(重創) 때 모습을 되찾는다며 콘크리트 건물을 목조로 하고, 기존 도로를 변경해 가며 비뚤어진 각도까지 바로잡은 것이다. 이처럼 '원래 모습을 되찾는다'는 복원의 뜻을 철저하게 살리려 한다면 현판 글씨 역시 대원군 중창 때 훈련대장 임태영이 썼던 광화문 현판 글씨를 그대로 올리는 게 옳을 것이다. 문제는 당시 임태영이 썼던 글씨가 탁본 형태로라도 남아있는 게 없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궁여지책으로 현재 전하는 100년 전 광화문 사진을 토대로 임태영 글씨를 디지털 기술로 재현해 달았지만 전문가들로부터 "글씨가 죽었다" "획 맛이 영 안 난다"는 비판이 잇달았다.
경복궁을 비롯해 창덕궁·창경궁·경희궁·경운궁(덕수궁) 등 조선시대 5대궁 대문들의 현판이 어떤 글씨체로 쓰였는지 참고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숭례문(崇禮門)·흥인지문(興仁之門) 등 조선시대 4대문과 궁궐 대문 현판들 글씨는 쓰는 사람은 달랐어도 공통된 흐름이 있었다고 한다. 광화문 현판 글씨체도 그 흐름에 최대한 맞춘다는 원칙만 세우면 다른 많은 문제들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 만드는 광화문 현판은 우리 시대가 후대에 물려주는 문화재다. 자기주장만 관철하기 위해 핏대를 세울 게 아니라 남의 얘기에 귀 기울이며 양보하고 합의해 최선의 결론에 도달하려는 지혜가 필요하다. 문화재청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모두 시험에 올랐다.
[김태익 논설위원 tikim@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