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만의 신작, 그리고 소신과 책임에 대한 고민
<부러진 화살> 개봉 후 시나리오의 사실여부에 대해 각종 매스컴에서 논쟁이 뜨겁게 불거지던 시점. 정지영 감독과는 영화사 사무실에서 만나 인터뷰를 하기로 되어있었다. 일산 덕양구청 바로 맞은편 건물이어서 쉽게 찾아낸 사무실은 조용하고 침착한 분위기였다. 책을 읽고 있었던 건지, 신문을 읽고 있었던 건지 그는 빈 사무실에 나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영화 홍보가 되는 일에 인터뷰를 거절할 이유가 없죠. 아무리 홍보도 좋지만 사람이 살아야지…” 수 년 만에 내놓은 신작 <부러진 화살>의 개봉 이후 그는 무척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도 그는 인터뷰 섭외 전화가 걸려와 간신히 거절을 하고는 한숨을 내쉬며 인사를 건넸다. 그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인터뷰를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다.

권력에 감춰진 진실을 다루고 있는 영화는 시나리오 작업부터 이미 논란의 화두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의 역할에 대한 소신이 분명히 서 있는 정지영 감독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 땐 고민이 아마 이런 걸 거예요. 그 사실이라는 것이 감독 스스로에게 흥미롭게 여겨졌기 때문에, 혹은 충격이나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을 거라구요. 그러니까 그 생각이 관객들에게도 느껴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거죠. 다만 등장인물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사회적인 책임이 따를 거라고 봐요.”

영화가 사회와 역사를 다루는 것은 비단 최근의 경향만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 흥행에서 거리가 멀었던 사회적, 정치적 소재의 영화가 대중에게 전과 다른 관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관심이 큰 만큼 연출자에게는 소신과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정지영 감독은 말한다. 그것은 실제 사실 속에 담긴 진실에 가까워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감독의 진정성을 의미한다.

한국영화가 걸어온 자취: 문화재로서의 영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옛날 영화필름들을 수집해서 첨단기술로 복원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국제적으로 네트워크가 구축돼 있어서 교류도 이루어지고 있고요. 문화재로 등록하는 것도 관점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고전영화가 보존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생각되네요.”

1950년대 한국사회 모습을 담고 있는 <자유부인>, 광복 이후 최초의 극영화 <자유만세>, 그리고 1934년 제작된 흑백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까지, 한국고전영화의 문화재 등록은 영화인으로서 남다른 의미를 갖게 한다. 다양한 문화 장르 중 대중적인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온 영화가 문화재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영화필름이 문화재로 등록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는 한국 사회문화를 담고 있는 역사기록매체이자, 문학적, 미술적, 음악적 예술성이 집결된 예술작품이다.

뛰어난 예술적 성취 때문이든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 때문이든 한국영화가 걸어온 자취를 소중히 생각하는 영화인으로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지영 감독은 다만 문화재 지정 여부로 작품의 우수성을 평가하는 시각은 주의해야 한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동시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영화를 기대하며
“고2 때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그 이전에는 영화를 재미로만 봤었죠. 예쁜 여배우도 나오고 제가 살지 않는 세상 이야기도 나오니까요. 그런데 중학생 때 <오발탄>이라는 단편소설을 읽었는데 나중에 잡지에서 <오발탄>을 각색한 시나리오를 보게 된 거예요. 그리고 또 얼마 뒤에 드디어 영화로 만들어진 <오발탄>을 봤죠. 어떤 소재가 각색화 작업을 통해 영상화 되는 것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셈이죠.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들어 내는 주체가 누군지 봤더니 영화감독이더라고요. 근사해 보였어요.” 학창시절 정지영 감독의 집은 작은 책방을 했다. 그는 저절로 문학소년으로 자랐고 한 편의 문학작품이 음악, 미술 등 여러 예술세계들과 합해져 탄생되는 영화의 꿈을 갖게 됐던 것. 재미로만 보던 영화가 인생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수년간 조감독 생활을 하고 시나리오를 쓰기도 하며 기본기를 다진 그는 1982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를 처녀작으로 오랜 꿈을 실현하게 된다. 그리고 1990년 빨치산을 주제로 한 <남부군>을 통해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92년 개봉한 <하얀 전쟁> 역시 국내외 영화제에서 주요 상을 휩쓸며 명성을 더해주었고, 1994년 내놓은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도 흥행선상에 있었다. 하지만 이후의 작품들은 흥행작 대열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부러진 화살>을 들고 다시 돌아온 한국영화계는 천만관객시대라는 새로운 무대였다. 하지만 걱정만큼이나 기대가 컸다. 그가 작품에 담고자 했던 진정성, 그 확신으로 작업한 영화에 관객들도 공감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어떤 측면에서 차별화 될 수 있을 것인가, 저 역시 그 질문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거든요. 할리우드 영화와는 다른 한국영화만의 정서가 있는데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찾아보고 싶었죠. 정확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 차이는 완성된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과정, 만듦새에 있다고 봐요. 만드는 사람들이 가진 힘, 열정이 담겨있다는 것이죠. 그것들이 한국영화들 속에 일관되게 흐르는 에너지이고, 그 에너지가 할리우드영화의 공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일 겁니다.” 정지영 감독의 작품은 그가 살고 있는 한반도, 한국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있으며, 1세기를 바라보는 한국영화사 상의 한 구간을 지나고 있다.

“제 작품이 후대에 회자되고 연구대상이 된다면 그것도 좋겠죠. 하지만 그보다는 당대에 논의되고 함께 토론됐으면 좋겠어요. 지금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과 함께 제 영화를 더 많이 나누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훗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더라도 섭섭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정지영 감독에게 문화재의 의미는 어떤 유형을 가진 유적만이 아니라 이 땅의 역사로부터 전해져온, 우리 민족이 공유하고 있는 정체성이다. 그런 가치들을 함께 찾아내고 지켜가야 한다고 말하는 정지영 감독. 그는 앞으로의 작품을 통해 그러한 뜻 깊은 일들이 적으나마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글·성혜경 사진·김병구

출처: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