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근대건축물 방치되고 사라지고

ㆍ안내판만 붙여놓고 관리소홀
ㆍ7년 사이 무려 27채나 없어져

31일 오전 10시 대전 동구 중동 중앙시장 입구의 옛 산업은행 대전지점 건물. 입구 옆 벽에 ‘등록문화재 제19호,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작은 안내판이 붙어 있다. 하지만 중앙시장과 대전역 등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 중 안내판에 눈길을 주는 사람은 볼 수가 없다.

그도 그럴 만하다. 건물 입구와 벽면이 온통 입주해 있는 안경체인점의 간판, 현수막 등으로 뒤덮여 있다. 이 건물이 문화재일 것으로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건물 옆의 주차장 안내인은 “이 건물이 문화재인 것을 알고 관람을 하거나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은 한 달에 3~4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대전 동구 중동 중앙시장 입구에 있는 옛 산업은행 대전지점 건물. 등록문화재 제19호로 지정돼 있지만 대전시 등
당국의 방치 속에 근대건축물로서의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 윤희일 기자

건물 옆 골목을 통해 중앙시장으로 들어가던 시민 박모씨(45·대전 유성구 반석동)는 “등록문화재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며 “대전의 소중한 문화적 자산인 근대건축물을 이렇게 관리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조선식산은행의 대전지점으로 건립됐다. 해방 이후에는 산업은행 대전지점, 우체국 등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안경점으로 변했다. 만주와 독일에서 수입한 화강석과 테라코타 등을 활용해 간결하면서도 장중한 분위기를 연출, 근대건축물의 걸작으로 꼽힌다.

한국산업은행 소유인 이 건물은 요즘 ‘찬밥’ 신세다. 지난 16~17일, 30일 실시된 공개매각에서는 사겠다는 사람이 나서지 않았다.

문화연대 등 시민단체는 지자체가 이 건물을 사들여 보존방안을 마련하라고 촉구하고 있지만, 대전시는 “돈이 없다”며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대전시 관계자는 “이 건물을 경제사박물관으로 활용하려 하는데 재원을 마련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대전지역의 상당수 근대문화유산이 이처럼 방치되거나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다. 지난해 12월19일 새벽 2시 대전 중구 선화동에 있는 옛 사범부속학교 교장 사택(등록문화재 제169호)이 화재로 거의 불타버렸다. 등록문화재 337호로 등록돼 있던 중구 대흥동 ‘뾰족집’은 2010년 10월 재개발 공사로 철거되는 운명에 처했다. 1929년 건축된 것으로 알려진 이 집은 일본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어우러진 절충형 근대건축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뾰족집’이라는 이름은 끝이 뾰족한 건물의 형태에서 유래했다.

대전시가 목원대 산학협력단에 의뢰해 작성한 ‘2010년 근대문화유산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2003년 첫 조사 이후 7년 사이에 무려 27채의 근대건축물이 없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대전의 원도심인 중구지역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목조 팔작기와집 대사동별당과 시립연정국악원(옛 우남도서관), 대덕교육청, 대전중학교 본관 등이 헐렸다.

대전문화연대 박은숙 사무국장은 “옛 산업은행 대전지점 건물 등 등록문화재의 경우 민간에서 사들여 훼손을 해도 막을 길이 없다”며 “당국이 적극 나서지 않으면 수많은 근대건축물이 사라지게 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윤희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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