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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날 이씨가 주물사를 책에 나온 대로 섞어서 소형 종 위에 발랐더니 거푸집이 굳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현장을 참관한 범종 전문가 A교수는 "책 내용대로 하면 과연 종을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며 "전통 기법임을 강조하기 위해 책에는 이렇게 써놓고 실제로는 현대 기법인 세라믹을 사용해 종을 제작한 것으로 의심된다"고 했다.

원씨는 26일 오후 2시 충북 진천에 있는 자신의 공방에서 전통 기법 제작 장면을 시연할 계획이다. 원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책에 쓰인 대로 종을 만들어왔고, 내일 모든 것을 재현해보이겠다"라고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문화재청은 보유자의 기량 점검 차원에서 일년에 한 번씩 현장 시연회를 열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인간문화재)의 인정·해제와 관련한 잡음은 한두 번이 아니다. 지난 2006년에는 당시 여당 국회의원의 여동생 B교수가 가야금 산조 분야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권력 실세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2009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보유자 한모씨를 문화재청이 '기능이 없다'며 지정 해제하기도 했다. 주로 권력 실세의 개입 의혹이 제기되거나 같은 업계에 있는 장인들의 폭로로 논란이 빚어진다.

인간문화재는 시나 도의 추천을 받은 후 전문가들의 현장 실사를 거쳐서 능력을 검증한 후 선정된다.

"현대기법 사용하며 복원 등 도맡아"
범종 종사자들, 원광식씨 조사 요구
원씨 "26일 학술대회서 주조 시연"

낙산사 동종, 내소사 동종 등 문화재 범종의 복원과 복제를 도맡아온 주철장(鑄鐵匠ㆍ중요무형문화재 112호) 원광식씨의 전통 주조 기법이 진위 논란에 휩싸였다.

경기도 지정 주성장(鑄成匠) 이완규씨와 전국 6개 범종 제작 공장 중 5개 공장 대표들은 17일 문화재청에 청원서를 내 "원씨가 현대 공법으로 범종을 만들면서 전통기법을 쓰는 것처럼 속이고 있다"고 주장하며 조사를 요구했다.

범종의 전통 주조 기법은 일제강점기 이후 맥이 끊겼는데도, 원씨가 전통을 되살렸다고 거짓 주장하며 범종 제작을 독식하다시피 해 범종 종사자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조사 결과 원씨가 현대 공법을 쓰는 것이 사실로 판명될 경우 문화재 보유자 지정을 해제하고 그에 따른 민형사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씨는 2006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간한 책자 <주철장>에서 범종 주조의 전 과정을 상술하고 동영상을 첨부했다. 이씨 등은 25일 오후 경기 용인시에 있는 이씨의 공방에서 범종 제작 시연회를 열고, 이 책자 내용을 조목조목 거론하며 원씨가 밝힌 밀랍주조공법은 실연이 불가능하거나 현대공법을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원씨는 책자에서 밀랍에 쇠기름을 2대8로 섞거나 밀랍에 송진을 7대5 또는 5대5로 섞어 쓴다고 밝혔으나, 쇠기름을 섞으면 젤 상태가 되어 조각을 할 수 없고 송진을 넣으면 너무 딱딱해져 범종 몸통에 붙일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지적이다. 또 이암에 음각으로 문양을 새기고 범종 틀을 코팅하는 주물사로 이암가루와 고운모래, 진흙을 배합해서 쓴다고 했지만, 이암으로는 정밀 조각이 불가능하고, 그 배합으로는 점성이 없어 주물사로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원씨는 석고를 이암처럼 보이게 칠해서 조각하고, 세라믹 코팅을 하면서 주물사에 흑연을 배합해 범종 빛깔인 검은 색으로 위장했다고 주장했다.

원씨는 쇳물 주입구에 채우는 주물사로 이암가루를 쓴다고 했지만, 이암은 1,800도 이상 고열을 견뎌야 하는 주조 과정에서 녹아버리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암가루가 아닌 현대 내열 소재인 펩세트를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범종 주조 기법을 둘러싼 논란은 이씨가 지난해 '밀랍을 이용한 범종 주조 방법'으로 특허를 받자 앞서 2006년 밀랍주조공법으로 특허를 받은 원씨가 이씨의 특허 취소 소송을 내면서 처음 불거졌다. 논란이 벌어지자 지난해 문화재청이 마련한 간담회에서 이씨는 "전통기법은 특허가 될 수 없다"며 "내 기술이 전통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공유할 수 있게 특허를 내놓겠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 원씨는 펩세트 사용에 대해서는 잘못을 인정했으나, 책의 수정 혹은 폐기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이씨는 "원씨의 기법으로는 범종을 만들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가 만든 범종 중 책에서 밝힌 공법으로 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중요무형문화재의 국가 기록문헌이 현대공법을 전통기법처럼 위장해 소개하고 있는 것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원씨는 이씨 등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26일 충북 진천의 종박물관에서 열리는 범종 관련 학술대회에서 범종 주조 방법을 시연해 논란을 불식하겠다"고 밝혔다.

【진천=뉴시스】강신욱 기자 = 충북 진천군 진천읍 장관리 종박물관은 26일 개관 6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로 한국종 전통기법 시연회를 가졌다.

종박물관 명예관장인 중요무형문화재 112호 원광식(69) 주철장(鑄鐵匠)은 이날 일반에 첫 공개된 주철장전수교육관에서 밀랍주조기법으로 전통종 주조 과정을 보여줬다.

밀랍주조기법은 중국에서 건너온 전통주조기법으로 범종, 불상, 향로 등 정밀 주물을 제작하는데 사용됐다.

밀랍주조기법은 밀랍(벌집)과 소기름을 섞어 만든 밀랍을 사용해 종의 모형을 만들고 밀랍 모형 위에 흙물을 발라 두께를 올린 뒤 건조시킨 다음 열을 가해 내부의 밀랍을 녹여내는 방법으로 거푸집을 만드는 기법이다.

밀랍주조기법으로 전통종 주조 시연을 보인 원 주철장은 1990년대 말엔 10여년간의 독자 연구 끝에 사라졌던 밀랍주조공법 재현에 성공, 2001년 3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는 진천군에 평생 수집한 범종 150구를 기증하고 종박물관 기증을 제안해 2005년 국내 최초의 종박물관이 진천군에 건립됐다.

원 주철장은 2005년 화재로 녹아내린 강원도 양양 낙산사 동종(보물 479호) 등 보물급 범종 문화재 복원을 맡았다.

한편, 이날 시연회엔 경기도 무형문화재 47호 주성장(鑄成匠) 이완규(56)씨가 원 주철장의 밀랍주조기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 시연회 관계자들과 언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원 주철장은 이날 밀랍과 송진을 7대3으로 섞은 과정 등을 거쳐 이씨가 제기한 문제를 일축했다.

원 주철장은 "10여년간의 연구 노력 끝에 밀랍주조기법으로 전통종을 재현한 것을 일부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지만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1300년 전 주조기법의 맥을 이은 것에 흠집을 내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ksw64@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