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집권기 지식인의 자의식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고려 중기에 뛰어난 문인 중의 한 분이다. 그는 젊어서 남다른 시적 재능을 인정받다, 평생 문학에 자신의 정력을 쏟았다. 이규보는 비록 무신집권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고 최소한의 생활을 위해 벼슬길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자도 세상에 도가 없어도 생존을 위해 벼슬하는 것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 모든 칙령은 모두 그대의 손에서 나왔지만, 상제上帝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상제께서 덕을 보았다 생각하여 그대의 노고에 보답하고자 하여 신臣 등에게 물었습니다. 신등이 의논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잠시 천상天上의 문관文官 자리를 비워두고, 인간의 학사學士로 파견하십시오.…중략… 백성에게 은혜를 끼치고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하십시오. 그런 뒤에 조칙을 내려 천상으로 소환하여 다시 신선의 반열에 배치하시옵소서. 이렇게 한다면 그의 노고에 보답이 될 듯합니다.’ 그러자 상제께서 곧 허락하시니, 그래서 그대에게 온화한 기운을 보태주고, 빼어난 자질을 전해 주었으며, 목록에 적힌 수레 1백 대와 말 1만 마리를 뒤따르게 하여, 동해東海의 부상扶桑 모퉁이 해 돋는 나라에 태어나도록 하였습니다.
- 대선인기여서代仙人寄予書

이규보가 벼슬길에 나가기 이전 젊은 시절에 쓴 편지다.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형식이 독특한데, 마치 지금의 일기 형식과 같다. 편지를 활용하여 내면의 진솔함을 스스로에게 고백한 발상도 재치가 있지만, 그 내용 또한 문재文才가 번뜩이고 개성이 돋보인다. 먼저 자신은 전생에 옥황상제의 문서를 담당하는 관리였다는 점을 내세워, 문장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을 드러내었다. 그는 계속 강렬한 자의식을 표출하며,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치켜세우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천상에서 타고난 재능을 인정받은 것도 문장이며, 천제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고려에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문학적 재능임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이미 상제로부터 기운과 자질을 부여받았으므로, 언제라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인간 세상인 고려에서 뛰어난 문재文才로 이름을 쉽게 날릴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천상에서의 보증이 인간세상인 고려에서도 통할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자신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자부하기 위하여 천상계과 인간계를 나누어 구성한 것도 기발하며 그 둘을 연결시켜 표현한 솜씨 또한 그의 문학적 재능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벼슬길의 허무감와 삶에 대한 성찰
이규보는 천부적인 문학적 재능을 인간 세상에서도 손쉽게 펼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지만, 고려의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정권을 담당한 무신정권의 실력자들은 젊은 이규보의 재능을 알려 하지 않았고, 그에게 문재를 펼칠 기회도 쉽사리 주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가 자신의 포부를 실현하지 못한 젊은 이규보는 좌절감을 맛본다. 마침내 그는 좌절과 분노를 삭이며 술을 마시는 한편, 규범과 법도에 벗어난 행동으로 저항하였다.

그대가 떠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 벼슬 한 자리 얻었다거나 빼어난 행적으로 이름을 얻었다거나, 훌륭한 저술로 상제에게까지 알려진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매우 의아스러워 막 사신을 시켜 파견하여 그 까닭을 물어볼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인간에서 온 사람이 있어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소위 이규보란 사람은 곤궁하고 길이 막혀 낮은 벼슬 하나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귀향 온 신선인 이백李白처럼 술을 마시고 미친 듯 한 행동을 일삼거나 원결元結처럼 시내와 산에서 속절없이 방랑하고 있습니다.…중략…물 잃은 용龍이거나 집 잃은 개에 지나지 않고, 실의에 빠져 비틀거리며 누더기를 거친 곤궁한 선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이 그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 물정에 어두워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를 등용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대선인기여서代仙人寄予書

현실에서의 포부와 기대가 크면, 좌절도 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천상에서 조차 보증 받은 문학적 재능이 이규보의 자부심이자 드높은 기상이라면, 마치 물 잃은 용과 같고, 집을 잃은 개와 같은 현실에서의 처지는 좌절의 깊이를 말한다. 이는 인간 세상에서 하찮은 벼슬은 물론 훌륭한 저술과 국가와 백성을 위한 어떠한 행적조차 보여주지 못하는 자신의 비참한 심정이기도 하였다. 결국 이규보는 현실에서의 좌절 때문에 결국 술을 마시고, 미칠 수밖에 없었으며, 방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우울한 심정을 자신에게 고백한 것은 답답한 현실에 대한 질문이었지만, 되돌아 온 것은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남들의 조롱과 행정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혹평, 그리고 경제적 궁핍뿐이었다. 마침내 젊은 이규보는 고려라는 세상에서의 삶이 천상에서의 기대와 너무나도 어긋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젊은 이규보의 좌절은 일시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최씨 무신정권으로부터 문재를 인정받아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벼슬을 하다가 66세에는 정승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정승은 명목상의 직위에 불과하였다. 최씨 무신정권 하에서 자신의 포부를 펼칠 수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외교 문서 따위를 다루는 데 지나지 않았다. 이규보는 늘그막에 무능하고 썩은 최씨 무신정권에 자신이 이용당한 것을 깨달았다. 이어서 지나온 삶을 회의하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천상과 달리 자신이 살던 인간 세상 고려가 그야말로 난세亂世였다는 사실을 너무나 늦게 알았기 때문이었다.


글 · 진재교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출처:월간 문화재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