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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인천의 무용소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글쓴이 문화재방송.한국 등록일 [2021.04.01]

 

인천의 무용소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발간일 2021.03.31 (수) 15:35

​윤중강의 인천국악로드 ⑨ 교육무용을 이끈 신흥초등학교​


국악에는 시민들의 삶에서 묻어나오는 희로애락이 진솔하게 담겨있다.  2021년 신축년을 맞아 시민들의 가슴속에서 울고 웃고, 신명나게 놀았던 인천국악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1950년대 후반, 인천 신흥초등학교 교정에서 유난히 활달하게 춤을 잘 추는 한 소녀(1949년생)가 있었다. 얼굴이 하얗고 눈이 큰 소녀(가수 임종임)는 자라서 1970년대 초반 해외활동에 치중했다. 그러다 70년대 중반 귀국해서, 민요풍의 가요를 그룹사운드의 사운드에 잘 배합한 노래로 크게 히트했다. 몰라보게 자란 임종임을 보면서, 인천토박이들은 매우 뿌듯해 했다.

▲신흥초등학교 출신인 가수 임종임. 그는 '임중임과 와일드캐츠'로 활동하며 국악의 리듬이 많이
가미된 다수의 히트곡을 냈다.


그녀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스승의 날이면, 신흥초등학교의 담임에게 전화를 걸어서 안부를 물었다. 임종임과 와일드캐츠의 히트곡은 ‘마음약해서’를 비롯해서 ‘오동동타령’(1979)과 ‘어화둥둥내사랑’(1980)과 함께 ‘십오야’가 있다 (원곡 ‘삼오야’, 1962년, 손석우 작사, 손석우 작곡, 김상희 노래)

십오야 밝은 둥근 달이 둥실둥실둥실 떠오면

설레는 마음 아가씨 마음 울렁 울렁 울렁거리네

하모니카 소리 저소리 삼돌이가 부르는 사랑의 노래

떡방아 찧는 소리 저소리 두근두근 이쁜이 마음


해방 후 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인천의 소녀들은 특히 무용을 비롯해서 예능에 뛰어난 소질을 갖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이 시기의 인천의 초등교육의 힘이다. 해방 후, 인천의 초등교육은 인천이란 도시를 돋보이게 했다. 초등교육자 3인이 중심이 되어서 ‘새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시기적으로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조석기(趙碩基) 황기익(黃箕益), 조운준(趙雲濬) 선생은 각각 창영·송림·신흥초등학교의 교장을 맡아서, 민주시민교육과 예술교육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천신흥초등학교는 예술교육에 일찍이 치중했다. 이 학교는 서울에서 열린 전국 규모의 음악경연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을 했다. 합창단과 취주악대(브라스밴드)는 신흥이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엔, 신흥출신은 유난히 예술인과 연예인을 많이 배출했다. 최불암, 송창식, 임종임이 모두 그 시절 신흥학교 출신이다.


인천신흥학교에는 윤병하(尹炳夏, 1924~2008)라는 무용전담 교사가 있었다. 전라도 곡성 출신으로, 1948년경 인천에 오게 된다. 그는 이때부터 대략 10년 동안 신흥학교를 비롯해서 인천의 교육무용에 관계하면서 후진을 양성했다.


특히 신흥초등학교의 조운준 교장은 그를 무척 신뢰했다. 운동장에선 ‘포크댄스’가 한창이었다. 전통적인 몸짓에 바탕을 둔 춤과 우리의 민속놀이에 기반을 둔 매스게임이 인기절정이었다. 강당에선 어린이를 중심으로 한 무용극을 만들어서 발표를 하였는데, 단순한 어린이극(童劇) 수준을 넘었다. 이 시절 신흥초등학교의 운동회와 학예회는 단순히 교내행사를 떠나서, 당시 인천토박이들의 신나는 축제였다. 조운준 교장이 지향하는 ‘어린이의 예술활동을 통한 지역민이 단합하는 축제’에 딱 부합했다.


윤병하는 인천에서 교육무용의 꿈을 꾸다가 좌절한 인물이다. 당시 인천각(존스턴별장)이 바라다 보이는 송학동 1가에 무용연구소가 있었다. 오후와 밤시간에는 당시 초등학교 교사들이 그의 지도를 받았다. 인천공립학교 교장들이 적극적으로 그에게 무용지도 받기를 권유했다.


1949년 봄, 교사들은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올라가, 인천각 아래 모여서 포크댄스를 배우기에 한창이었다. 공원에 나들이 온 사람에겐 재밌는 구경거리였다. 윤병하는 쉬운 동작을 흥미롭고 구성하는 재주가 있었고, 여기서 배운 교사들은 그 무용을 아동에게 전수했다.


창영·신흥·송림·축현·서림학교에 가서 가르쳤다. 윤병하가 지향한 교육무용은 한국의 ‘전통’과 서구의 ‘모던’을 합치는데 있었다. 한국의 전통은 그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농악이었고, 특히 설장구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1950년대 초반, 인천에는 한국전쟁을 혹독하게 경험한 예술인들이 모여들었다. 전라도 출신 윤병하는 황해도 해주출신의 장일남(1932~2006)을 만난다. 그들은 신흥동(신흥학교사택, 관사마을)에서 송학동을 오가면서, 공연작품을 구상하고 무대에 올렸다. 이즈음 인천시장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서 이경성이 인천시립박물관(송학동)을 개관했다.(1953년 4월)


바로 그 때 ‘인천교육무용연구소’(송학동)도 개설이 됐다. 윤병하와 장일남 등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문총(한국문화예술총연합회) 인천지부의 지원을 받아 이귀순(李貴順)이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즈음부터 윤병하와 장일남은 인천과 서울을 오가면서 활동을 시작하고, 두 사람은 점차 서울로 주 무대를 옮기게 된다.


윤병하가 인천을 떠난 것은 그의 독특한 성격과 고집, 인천토박이 예술인들과의 견해 차이였다. 1950년대의 인천의 교사가 중심이 된 ‘교육무용’의 한 시대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윤병하는 훗날 ‘한국무악고’라는 책을 펴냈다.



▲제1회 박송자 무용학원 발표회, 인천시민회관


학교 내 교사들의 교육무용이 다소 힘을 잃게 되었을 때, 인천에서는 또 하나의 무용흐름이 생겨난다. 1958년, 여성국극에서 활동하던 박송자가 인천에 등장을 한다. 김천흥(1909~2007)을 사사했다고 하는 그녀는, 인천국악인들과 함께 학원을 운영하다가 독립을 한다.

박송자의 춤은 어떠했을까? 한마디로 ‘여성국극의 어린이버전’이었다. 여자아이들이 각각 남성과 여성으로 분장을 해서 춤을 추었다. 삼고무(三鼓舞)와 농악(상모돌리기), 부채춤 등이 이들의 대표적인 레퍼토리였다. 경기민요의 명창 전숙희도 ‘인천국악원’에서 박송자에게 무용을 배웠다.


1960년대 초반, 송현시장의 ‘박송자무용학원’에는 인천의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무용을 배우러 몰려들었다. 1960년대, 인천춤의 기초를 만들고 유행을 시킨 주역은 단연 박송자이다. 그럼에도 박송자의 1960년대 후반 이후에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생사조차 알길이 없다. 그녀는 왜 인천을 떠나게 된 것일까? 그녀 또한 앞의 윤병하와 같이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어린이 삼고무

박송자는 인천을 떠났어도, 그의 가르침을 받은 무용소녀들은 인천의 여러 무용학원에서 계속 무용을 배우게 된다. 당시 박송자무용학원을 거쳐서 ‘인천국악협회’이자 ‘인천국악원의 역할을 하며 국악과 무용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던 경아대(1963년 개원)에는 많은 소녀들이 다녔다.

경아대의 한켠에는 신발장(국악인 김뻑국이 신흥목공소에서 제작)이 있었는데, 오후가 되면 예쁜 소녀들의 신발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1960년대 중반과 후반, 경아대에는 많은 소녀들이 무용을 배우러 왔다. 오후 3시쯤이 되면  장구소리와 북소리가 났다. 그럼 율목공원에서 놀던 개구쟁이 남자아이들은 모두 경아대로 달려갔다. 그 중 한 아이가 나였다. 율목공원에 놀러간 게 목적이 아니라, 무용소녀의 춤을 보고 싶은 게 솔직한 속내였다. 우리는 때론 경아대 안에 들어가서 조용히 앉아서 볼 수 있는 특혜(?)도 주어졌다. 돌이켜보면, 유능한 무용교육자의 전략(!)이었다. 무용소녀들이 관객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잘 출 수 있는 마인드컨트롤을 한 것이다.

이 때 무용소녀를 가르친 스승은 김금식이다. 그는 송현시장에서 학원을 하는 박송자에게 무용을 배우는 한편, 서울을 왕래하면서 박초월(소리)과 한영숙(무용) 등을 사사했다. 당시 민속악과 무용계의 큰 스승 밑에서 수학했다. 김금식은 이를 바탕으로 경아대에서 무용과 창악(唱樂, 남도소리)를 가르쳤다. 경아대의 무용소녀들은 인천시민관과 인천공설운동장에서 공연을 했다.

▲가운데 유정선, 좌 김금식(경아대 무용 및 창악 강사),  유은순(인천교대 앞 무용학원 운영)

▲유정선, 인천무용계의 천재소녀, 인천교대부속국민학교 2년, 인천 신흥동 1가 거주



▲유정선 - 인천공설운동장 리허설 사진​


이런 인천의 무용소녀 가운데서 특별히 돋보이는 소녀가 있었다. 인천국악사에서는 그녀를 ‘천재소녀’라고 지칭 했다. 신흥동 1가(옛 자유극장 뒤편)에 살던 무용소녀는, 교대부국과 경아대를 오가면서 무용의 꿈을 키운 소녀였다.

인천국악사에서도 그녀의 이름이 등장한다. 1964년 인천(경기도)국악협회의 활동일지에는 “천재적 소질을 가진 7세 소녀 유정선양 등의 천재를 육성하고 있음을 자랑하고 싶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정선은 인천교대 부속국민학교를 거쳐서, 한국무용계의 엘리트 코스라 할 예고와 이대무용과를 졸업했다. 그는 오래도록 인천신명여자고동학교 교사로서 무용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외손자를 둔 할머니로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외부에 자신을 내세우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 하지만 1960년대 무용계의 최고스타로서의 유정선은, 인천무용의 흐름을 정리하고 활약상을 알리는데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이런 흐름을 이어서, 인천에서는 많은 무용소녀들의 활약이 대단했다.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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