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여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나는 가리로다 끌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어도 아 괴로운 이 심사를 가슴 깊이 묻어놓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느린 3박자의 리듬에 단음계로 작곡된 한국 최초의 가요곡. 1932년 최초의 취입레코드 라벨에 인쇄되었던 곡명은 <황성의 적(跡)>이었다.
영천출신의 시인 왕평(王平)이 노랫말을 짓고, 개성출신의 작곡가 전수린(全壽麟)이 곡을 붙이고, 배우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가 애잔하게 부른 황성옛터’는 지금도 사랑받는‘민족가요’이다.
전수린이 1928년 고향 송도(松都)에서 고려의 옛 궁터를 보고 역사의 무상함을 느껴 즉흥적으로 작곡하였다. 전수린의 첫 작품으로 신파극단 취성좌(聚聖座)의 서울 단성사(團成社) 공연 때 여배우 이애리수가 막간무대에 등장하여 이 노래를 불러 크게 유행하였다.
서울 단성사에서 이애리수가 이 노래를 부르자 관중들은 열광했고, 노래는 순식간에 장안에 퍼져나갔다. 日警은 “중지하라!”악을 썼지만, 32년도‘황성옛터’는 레코드에 담겨 전국적으로 불티나게 팔렸다.
조선이 망한 1910년에 태어나,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극단 신극좌(김도산 조직)에서 무대 인생을 시작하고, 1932년에 한국 대중가요 사상 불후의 작품으로 꼽히는 <황성의 적(황성옛터)>을 발표한 뒤, 1935년 두 번째 자살 미수 사건을 끝으로 대중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져 버린 여인. 그 이애리수(본명 이음전)가 98세 고령으로 경기도 일산에 생존해 있다는 놀라운 기사가 10월 28일에 나왔다.
1960년 12월 잡지 기사에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낸다는 짤막한 근황이 소개된 이후 공식적으로 확인된 소식이 없었기에,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이 요즘은 거의 당연시되고 있던 참이었다. 기사를 처음 접한 뒤 느낀 놀라움, 반가움, 당혹스러움은 그래서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죽은 줄 알았던 이가 살아 돌아온 격 아닌가.
최초의 '한류' 이애리수, 살아있었다니...
개성 소녀 이음전이 아홉 살 어린 나이에 극단에 들어가게 된 데에는 한국 희극배우의 원조 격인 외삼촌 전경희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1921년 김도산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윤백남이 1922년에 조직한 민중극단으로 옮겼고, 이어 다시 김소랑이 이끄는 취성좌에 입단하면서 이음전, 아니 이애리수는 본격적인 배우 겸 가수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배우로서 이애리수는 <부활>의 주인공 카추샤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고, 가수로서 이애리수는 막간의 꾀꼬리로 인기를 독차지했다. 1929년에는 막간에 나와 노래를 부르기로 한 이애리수가 출연하지 않자 연극보다 막간에 관심을 보이며 관람하러 온 관중들이 거세게 항의하는 바람에 공연이 중단되고 경찰이 출동하는 일대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1929년 말에 취성좌가 해산하자 이애리수는 1930년에 신설 극단 조선연극사로 옮겼으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동안 연극에는 제대로 출연하지 못했다고 한다. 무대에서 인정받은 노래 실력으로 첫 음반을 녹음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1930년 12월 말에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발매된 <메리의 노래>와 <라인강>은 이애리수의 이름으로 나온 첫 음반이었다.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발매된 음반이 한창 팔리고 있던 1931년 이른 봄, 콜럼비아레코드의 경쟁사인 빅타레코드에서 음반 기획을 담당하고 있던 이기세는 사석에서 직접 이애리수의 노래를 들어 본 뒤 그 성공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기세의 주선으로 바로 빅타레코드에서도 녹음을 한 이애리수가 그 해 여름에 첫 작품으로 발표한 곡들이 <오동나무><강남제비><방랑가> 등이었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한편 1931년 7월에 극단 연극시장에 가입하고, 1932년 3월에 극단 태양극장(태양극단이라고도 한다)으로 옮기는 등 배우로서도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으나, 이애리수의 인기는 배우보다는 가수로서 더 높이 치솟고 있었다. 1931년 가을 이후 빅타레코드에서만 음반을 발표한 이애리수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만든 곡이 바로 1932년 3월 말에 발매된 <황성의 적>, 즉 <황성옛터>이다.
<황성의 적> 외에도 1932년에 <고요한 장안>, <에라 좋구나>, <군밤타령> 등 히트곡을 연달아 발표한 이애리수는 식민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주목을 받는 가수가 되었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일본에서 '李アリス(리아리스)'라는 이름으로 <あだなさけ(원망스러운 정)>, <月のゆくえ(달의 행방)>, <去りし夢(스러진 꿈)> 등을 발표했는데,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작사가였던 사이조 야소가 <고요한 장안> 곡조에 새로 가사를 쓴 <あだなさけ>는 일본에서도 상당한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 최초의 '한류'로도 평가할 수 있는 일이다.
<꽃각시 설움> 이후 사라진 이애리수
조선 연극계와 대중가요계를 모두 석권하고 일본 대중가요계에도 진출해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1932년 가을, 이애리수에게 운명적인 남자가 나타났다. 이미 첫 번째 사랑에 좌절한 바 있는 이애리수가 심지어 목숨까지 버리려고 했을 만큼 모든 것을 건 남자 배동필은, 그러나 법적으로 이미 아내가 있는 몸이었다. 그리고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랑에 빠져든 두 사람이 선택한 길은 동반자살 시도였다.
1933년 새해 벽두에 뜨거운 화제가 되었던 두 사람의 자살 미수 사건은 다행히 부부로 인정을 받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후 이애리수는 연예 활동을 정리하고 평범한 아내와 어머니로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1934년 4월 무렵 발매된 <꽃각시 설움> 이후 그가 녹음한 음반은 더 이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곡절 많은 삶을 살았던 이애리수가 그대로 순탄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불행하게도 그의 운명이 허락하지 않았던 듯하다. 이애리수의 이름이 언론에서 사라진 지 1년쯤 뒤인 1935년 5월, 두 번째 자살 시도로 그의 이름은 다시금 충격적으로 지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두 번째 자살을 시도한 이유는 그토록 믿었던 남편과 겪은 불화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미 사실상 은퇴를 한 상황이었음에도 1935년 10월에 발표된 가수 인기투표에서 여자가수 부문 7위로 선정된 것을 끝으로, 이애리수는 연예계와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았다. 간헐적으로 그의 소식을 전하는 단편적인 기사가 나오기는 했지만, 그에 관한 이야기는 점점 '카더라' 하는 전설이 되어 갔다.
왜곡된 채 기억되는 <황성의 적>
이애리수의 존재가 전설 속에 희미해져 가는 것과 동시에 그의 대표작 <황성의 적> 또한 긍정적으로 보자면 전설로, 부정적으로 보자면 왜곡으로 덧칠되어 갔다. <황성의 적>에 가해진 덧칠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그 발표 연대와 금지에 관한 사연, 그리고 음반 판매량에 대한 것이다.
이번 이애리수 생존 확인에 관한 거의 모든 기사에서는 <황성의 적>이 1927년~1928년 무렵 무대에서 먼저 크게 히트한 뒤 1932년에 음반으로 발표된 것으로 쓰고 있다. 당시 많은 대중가요가 무대에서 먼저 불려 히트한 뒤 음반에 녹음되었던 것이 사실이고, <황성의 적>이 이미 1931년 10월에 녹음이 되기도 했지만, 그것이 1927년~1928년 무렵에 만들어져서 그때 이미 이애리수가 불렀다는 객관적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한 '설'의 근원은 작곡가 황문평이 <황성의 적>을 작곡한 전수린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쓴 데에 있지만, 수십 년 전을 회상한 전수린의 기억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기록은 지금까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이 식민 지배를 받는 조선 민중의 설움을 너무나 절절히 표현하고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바람에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나, 그 때문에 조선총독부가 음반을 금지했다는 설 또한 부정확하다. <황성의 적>에 제목만 바꿔 달아 1933년에 발매된 <고성의 밤>(이경설 노래)이 금지된 것은 분명하나,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의 적>이 금지되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그뿐만 아니라 1938년에는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 음반이 다시 발매되어 나오기까지 했다. 많이 알려진 곡은 아니지만, 1933년 6월에 발매되었다가 9월에 금지된 <변조 아리랑>이 오히려 민족감정을 자극한 이애리수의 금지곡으로 꼽을 만하다.
<황성의 적>이 발매된 뒤 순식간에 '5만 장' 또는 그 이상 판매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러저러한 나름의 근거조차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전형적인 '카더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시 공식적인 음반 판매량 집계가 존재했다는 기록부터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백수를 앞둔 이애리수에 바라는 게 있다면...
앞에서는 부득불 경칭을 생략했지만, 이애리수 선생을 찾아뵙고 당년의 그 일들에 관해 여러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반가움 못지않은 욕심이었다. 하지만, 백수를 눈앞에 둔 이음전 할머니의 기억 가운데 이애리수에 관한 것은 그다지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여쭙고 싶은 욕심은 아쉽게도 접어야겠으나, 대신 또 다른 욕심 하나는 이루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2010년 이애리수 선생께서 건강하게 만 백 년의 삶을 맞는 그날, 그 옛날 이애리수의 대표곡들을 당시 음원 그대로 살려 녹음한 기념 음반을 만들어 축수연에 올릴 수 있었으면 한다. 온갖 전설이 수십 년 흘러온 끝에 나온 백수 기념 음반, 그것은 또한 한국 대중음악사에 전무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기도 할 것이다.
사연따라 연예 반세기(演藝 半世紀)…그시절 그노래(5)
황성(荒城)옛터 한 곡(曲)으로 유명해진 18살 소년…노래 부른 미인(美人) 가수는 정사(情死)소동 벌이고
①황성(荒城)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月色)만 고요해. 폐허에 쓰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 내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②성(城)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芳草)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 이루고,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1925년 초가을, 황해도 연안(延安)의 한 여인숙에는 비에 갇힌 순회 가극단이 묵고 있었다.
이른바 을축(乙丑)년 장마 때. 계속 내린 비 때문에 이들은 한달동안 공연을 못한채 하늘을 원망하고 있었다.
취성좌(聚星座) 가요부의 20여명 단원들이었다. 그 속에는 작곡가 전수린(全壽麟), 가수 겸 배우 이애리수(愛利秀)가 있었다.
전수린(全壽麟)은 창밖에 내리는 궂은 비를 바라 보다가 문득 얼마 전 개성(開城)에서 본 황량한 성터를 생각했다, 만월대(滿月臺)에 한길 넘게 우거진 잡초, 발 끝에 부딪치던 기왓장 조각, 주춧돌만 남아 있는 궁터-.
그는「바이얼린」을 꺼내어 떠오르는 악상을 정리했다.
순회극단, 또는 유랑극단이라면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옮기면서「집시」같은 생활을 누리는 사람들. 더구나 한달씩 돈벌이를 못하고 갇혀 있는 처지에서 처량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심경은 그 가극단의 책임자 왕평(王平)도 마찬가지 였다.
전(全)씨가「바이얼린」으로 악상을 정리하여 5선지에 옮겨놓자 왕(王)씨는 흥얼거리면서 가사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노래가『황성(荒城)옛터』다. 가사,「멜러디」가 처량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노래는 취성좌(聚星座)에서 공연을 할 때 청순한 미인 가수 이(李)애리수의 목소리로 불려졌다. 너무 슬프게 불렀던지 공연장인 단성사(團成社)는 눈물바다가 됐다. 너무 슬픈 노래라 하여 작곡·작사자는 고등계 형사한데 붙들려가 취조를 받아야 했다.
한 때는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했지만 전수린(全壽麟)은 이 한곡으로 충분히 유명해 졌다. 그 때 전(全)씨 나이 18살.
개성(開城) 태생인 전(全)씨는 송도(松都)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서울에 와서 홍난파(洪蘭坡)씨가 조직한 연락회(硏樂會)에 들어갔다. 그것이 연예계 입문이지만 음악 공부는 이전부터 했다. 당시 개성에는 중앙회관과 고려여자회관이 있었는데 여기에「예뱃소년합창단」이 있어서 전(全)씨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접할 수 있었다. 호수돈(好壽敦) 여학교 초대 교장이던「루즈」부인에게「바이얼린」을 사사, 15살 때는 이미 습작곡을 내놓을만큼 천재적인 재질을 보였다.
이(李)애리수는 13살 때 취성좌(聚星座)의 아역 배우로 취성좌(聚星座) 대표 김소랑(金小浪)씨에 의해 발탁되었다.
전수린(全壽麟)씨와 같은 개성 태생으로 전(全)씨보다 3살 아래. 지금 66살인 전(全)씨는 48년 전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李) 애리수의 목소리는 지금 이미자(李美子)와 흡사했다. 곱고 호흡이 퍽 좋았다. 그 위에 굉장한 미인이고 똑똑했다. 노래도 타고 난 예능인이었다.』
『황성(荒城)옛터』의「히트」가 이(李)애리수의 명성을 더욱 떨치게 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일본「빅타·레코드」사는 전(全)씨를 초청해서 전속 계약을 맺고 이(李) 애리수에게 전(全)씨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 때 전(全)씨가 만든 일본말 노래가『와다나쓰께(仇情=미운 정)』. 이(李)애리수가 부른 이 노래는 일본 안에서도「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영향으로 한국조의 유행가가 등장하기도 했다.「사사기슝이찌」의『시마노 무스메』(섬처녀)는 바로 전(全)씨의『와다나쓰께』를 모방해서 만든 것이고『나미다노 와다리도리』(눈물 젖은 새)는 신(申) 카나리아가 부른『삼천리(三千里) 강산』을 본딴 것이라는 얘기다.
어쨌든 전(全)씨는 그 후 7년간 일본「빅타」의 정사원으로 일했고 이(李)애리수는 한국 일본 양국에서 똑같이 인기있는 가수가 됐다. 그럴 즈음 이 대망의 여가수를 은퇴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윤심덕(尹心悳)의 경우처럼 연예·정사사건이다.
일본서 돌아온 이(李)애리수에게 사랑의 불길을 지른 사람은 그때 연희(延禧)전문을 다니던 배동필(裵東弼)이란 청년. 돈도 가문도 당당한 부호의 아들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할 것을 맹세했고 이(李)애리수는 아예 노래도 연극도 집어치우고 배(裵)와의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배(裵)씨 집에서『광대와는 결혼시킬 수 없다』고 완고하게 이를 거부하자 단성사 뒤의 한 여관방에서 정사(情死)를 기도, 팔 동맥을 끊었으나 여관 주인의 발견으로 이들은 다행히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
그 때 연예계의 지도층 인사였던 이기세(李基世)씨가 이 사실을 알고 배(裵)씨의 부모한데 달려가 담판을 지어 결국 고집 센 노인들의 결혼 허가를 받아냈다. 결혼 허가를 받은 이(李)애리수는 곧바로 은퇴해 버렸다.
20살 안팎에 최고의 인기 작곡가가 된 전수린(全壽麟)씨는 멋장이(멋쟁이)로도 소문났었다.그는 국내에 처음으로「아코디언」을 들여와 방송국에 출연했다. 서울에「라디오」방송국(京城방송국) 이 개국된 게 1926년. 국내서 처음인 신기한 악기「아코디언」을 방송국 직원들이 보고 하도 독촉하는 바람에 전(全)씨는 채 연습도 하지 못한채「아코디언」을 메고 출연했다가 진땀을 뺐다는 것이다.<조관희(趙觀熙) 기자>
출처:서울신문
[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34>이애리수를 찾아라
1968년 주간한국 기자때 만남 시도했지만 못이뤄 40년 기다림·끈질긴 설득 끝에 첫 인터뷰 '큰 반향' "이음전 여사님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길 빕니다"
사진-배정환 한국보도사진가협회 회원
▲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황성옛터'를 최초로 부른 이애리수(사진ㆍ99) 여사는 1968년 필자의 첫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으나 40년만인 올해 10월 마침내 인터뷰와 함께 사진 촬영을 허락했다. 이로써 우리나라 대중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가수의 인생이 기록으로 남게 됐고 우리는 그를 위해 "오래 사시라"고 기원할 수 있게 됐다. /배정환 한국보도사진가협회 회원
▲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황성옛터'를 최초로 부른 이애리수(사진ㆍ99) 여사는 1968년 필자의 첫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으나 40년만인 올해 10월 마침내 인터뷰와 함께 사진 촬영을 허락했다. 이로써 우리나라 대중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가수의 인생이 기록으로 남게 됐고 우리는 그를 위해 "오래 사시라"고 기원할 수 있게 됐다. /배정환 한국보도사진가협회 회원
1968년에서 2008년 까지 40년 동안은 내가 황성옛터와 이애리수를 찾기 위해 노력한 세월이다. 40년간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찾아 다닌 것은 아니고 그렇게 긴 세월동안 기다렸다는 얘기다.
사연은 이렇다. 1968년 내가 한국일보 자매지'주간한국'의 기자로 있을 때 김성우 부장이"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랑 받는 가요가 무엇인지 설문 조사를 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말이 제안이지 사실상 조사하라는 지시였다. 조사는 두 가지로 진행됐다. 전문가 의견을 듣고 일반 독자들의 투표도 받았다.
그래서 10곡을 선정했는데, 그 중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한 곡이 '황성옛터'였다. 다시 말하면 그 당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대중가요가 황성옛터라는 얘기다. 박정희 대통령도 자신이 제일 좋아 하는 노래로 황성옛터를 꼽았다. 이런 내용을 조사해서 신문에 발표하고 나니까 김성우 선배는 나한테 또 골치 아픈 지시를 내렸다.
"황성옛터 레코드 오리지널 판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고, 노래 부른 이애리수를 찾아서 인터뷰 기사를 쓰라"는 것이다. 김성우 선배야, 자기는 말로하면 되지만 나는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되니까 육신이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이 양반은 도대체 뭐든지 내가 나서면 되는 줄 아는 거야 뭐야?' 남 고생하는 건 생각도 안하고 "무조건 찾아내쇼!"였다.
나는 구시렁구시렁 거렸지만 하는 수 없이 신문에 "노래를 찾는다"는 사고를 냈다. 얼마 후에 부산에서 어떤 분이 연락을 해왔다. 자기네 집에 옛날 판이 수두룩하니 와서 찾아보라고 했다. 앞뒤 볼 것 없었다. 사진기자 류호석씨와 둘이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서면 어디인가를 물어 물어 그분 집을 찾아 갔더니 방안에 옛날 SP판이 하나 가득 있었다. 한참 뒤진 끝에 우리는 황성옛터를 찾아냈다. 그 기쁨이란!
그걸 껴안고 서울로 올라와서 축음기를 구해 들어 보니까 우리는 여태까지 오리지널과는 두 가지 점에서 달리 노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노래의 템포가 빠르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 그 무엇 찾으려고"라는 대목의 멜로디가 현대인이 부르는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으'를 높게 올려서 노래하는데 오리지널은 '으'를 아래로 내려 부르고 있었다.
나는 즉시 작곡자 전수린씨를 만났다. 작사를 한 왕평씨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서 아쉬웠지만 작곡자와 가수는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된다. 전수린씨와의 인터뷰 기사는 주간한국에 곧장 실었지만, 노래를 부른 이애리수 여사는 만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968년이니까 그녀가 아직 회갑이 안 되었을 때이다. 나는 이애리수 여사가 살고 있는 곳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본인은 물론 가족들이 신문기자 만나는 것을 사양했다. 2남 7녀의 어머니로서 또는 할머니로서 조용히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구태여 지금 와서 지난 날들의 일을 들춰내어 불편해질 필요가 있느냐 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말을 남기고 나는 물러났다. 그러나 언제고 반드시 한번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고 말겠다고 나 혼자 다짐을 했다. 그 다짐이 꼭 40년 후인 2008년 10월 21일에 이뤄진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 인터넷 등에서는 이애리수 여사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으나 나는 그녀가 건재하게 생존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후에도 장남을 통해 꾸준히 접촉을 하면서 엄연히 살아 계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알려지는 것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음전이 본명이라는 것도 밝혀야 한다고 설득했다. 또 우리나라 대중가요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하는 분이니까 정말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더 이상 은둔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큰 아들은 결국 나하고의 인터뷰를 허락하게 됐다. 그리고 인터뷰하는 날 그가 점심식사 값을 내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아버지 배동필씨, 그러니까 이애리수 여사의 남편은 부잣집 외아들로 자랐고'맛나니'라는 간장공장을 경영했다. 또한 당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만큼 멋쟁이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다. 미처 피난을 못간 그는 6월 25일 전쟁이 난 날부터 9 ㆍ28 서울 수복 때 까지 3개월 동안 집의 마루 밑에서 숨어 살게 된다.
그 후 수복이 되자 친구인 국군 7사단장과 함께 북으로 갔다가 북한군이 쏜 총에 맞아 요도 관통을 당하는 큰 부상을 입는다. 간신히 생명은 건지지만 곧 바로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된다. 다행히도 포로 교환 때 풀려 나오긴 했으나 집안 형편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배동필씨와 이음전 여사는 생활이 어려울 때에도 자식들에게만은 절대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항상 자존심을 지키라"는 것을 집안의 가훈으로 삼았다. 돈이 없을 때는 집에 있는 물건을 가지고 나가서 물물교환으로 생필품을 사오는 한이 있어도 누구에게 거저 손을 내미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고 한다.
이음전 여사는 지금처럼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 까지는 안산에서 장남과 함께 살았는데, 새벽 5시 반부터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운동을 했다고 한다. 운동을 할 때에도 반드시 한복을 곱게 입고 다녀서 '한복 할머니'라고 불렸다. 물론 동네 사람들 중에서도 이 할머니가 '황성옛터'를 부른 왕년의 톱 가수인지를 눈치 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이애리수 여사를 만나고 나서 생존확인 기사가 10월28일자 한국일보에 실리자 우리나라의 많은 신문과 방송들, 그리고 통신과 인터넷 등에서 이 기사를 전재해 주었다. 또 네티즌들은 격려의 댓글을 올리면서 이애리수 여사의 건강을 빌어 주었다. 이 글을 통해서 그 분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당연히 이음전 여사와 가족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최초의 국민가수 이애리수가 생존해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28년 '황성옛터'(예전 이름 '황성의 적')을 불러 전 국민의 가슴을 적신 이애리수는 1930년대 결혼과 함께 연예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춰온 상태였다.
올해 98세인 이애리수는 경기도 일산 백송마을의 한 요양시설에서 간병인과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다.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하지만 건강상태는 아직 양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도 개성 출신인 이애리수의 본명은 이음전. '애리수'라는 예명은 '앨리스'에서 따온 것이다. 이애리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10세 무렵부터 배우로 활동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배우로 활약하면서 막간 가수로도 활동하던 이애리수는 소박한 창법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18세때 나라 잃은 슬픔을 표현한 '황성옛터'로 국민가수로 등극한다.
왕평이 작사하고 전수린이 작곡한 '황성옛터'는 고려 옛 궁궐인 개성 만월대의 쇠락한 모습을 노래해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랠 길 없던 국민들의 마음을 적셨다. 특히 '황성옛터'는 최초로 한국인이 작사·작곡한 대중가요로 평가받기도 한다.
1931년 '메리의 노래', '라인강' 등의 노래를 담은 음반으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한 이애리수는 다음해 '황성의 적'이라는 이름의 음반을 발표했고, 이 음반은 5만장이라는 놀라운 판매량을 기록했다. 당시 5만장은 현재 기준으로 500만장에 육박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 노래를 통해 나라를 잃은 슬픔을 상기할까 걱정된 일본 경찰이 이 음반을 발매금지 시켰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애리수의 전성기는 길지 않았다. 이애리수는 같은 해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 학생이던 배동필씨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지만, 배동필씨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딴따라' 취급 받던 가수와 엘리트였던 대학생의 현격한 신분 차이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결국 이승에서 못 이룬 사랑을 저승에서 이루자며 독약을 먹고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우여곡절 끝에 구출된 이애리수는 자신의 처연한 심정을 담은 노래 '버리지 말아 주세요'를 부르고, 그의 애처로운 노래를 들은 배씨의 부모는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한다. 가수 출신임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것이 결혼 승낙의 조건이었다.
이애리수는 결혼 이후 2남 7녀를 낳아 기르면서 철저히 자신을 숨긴 채 살아왔다. 맏아들조차 어머니가 '황성옛터'를 부른 가수라는 사실을 대학생이 된 이후에야 알았을 정도였다. 무심코 노래를 읊조리는 일도 없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비록 이애리수는 70년 넘게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채 평범한 삶을 살아왔지만, 그가 부른 '황성옛터'는 이후 수 많은 후배 가수들의 입에 올라 아직까지 한국인이 사랑하는 음악으로 꼽히고 있다.
조선일보[만물상]
'19禁' 가요
김태익 논설위원 이메일 tikim@chosun.com
입력 : 2011.08.25 23:33
1963년 도민호라는 가수가 부른 '월급을 올려주세요'란 노래가 화제가 됐다. "이것 참 미안하지만/월급을 올려주세요 박사장/황소같은 자식놈이 여덟명인데/물가는 비싸지고 살아가기 힘드니 어찌합니까/…" 그 전해 출범한 방송윤리위원회에서 한창 인기인 이 노래의 가사를 문제 삼았다. '박사장'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황소'는 공화당을 가리키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월급을…'은 방송윤리위가 결정한 첫 번째 금지곡이 됐다.
▶대중가요사(史)를 통틀어 최초 금지곡은 1930년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옛터'였다.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月色)만 고요해/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나라 잃은 백성의 서글프고 쓸쓸한 심정을 담은 노래였다. 일제는 이 노래가 반일 의식을 선동한다 해 작사·작곡자를 잡아들이고 노래를 금지시켰다.
▶원래 금지곡 판정이라는 게 '엿장수 맘대로'다. 70년대 신중현 작곡 '거짓말이야'는 국민에게 불신감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미치겠구나'는 사회를 불순하게 비꼰다는 이유로 금지곡 목록에 올랐다. 이장희의 '그건 너'는 권력자들이 TV에서 자꾸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라며 손가락질하는 걸 보고 불쾌해하는 바람에 전파를 타지 못했다고 한다. 한대수가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라고 하자 권력은 "지금은 행복하지 않으냐. 행복한 나라가 북한을 가리키는 것 아니냐"며 꼬투리를 잡았다.
▶여성가족부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최근 가사에 술·담배와 관련된 내용이 들어간 대중가요에 잇달아 '19금(禁)' 판정을 내리는 데 대해 뒷말이 많다. "어제 소주를 잔뜩 마시고 나는…"(장기하와얼굴들), "술 한잔을 다 같이 들이킬 게…"(2PM) 같은 가사를 문제 삼아 '청소년 유해' 판정을 내리는 식이다. 한 연예기획사가 여성가족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자 법원은 어제 "술은 마약류 등과 달리 노래 가사에 문구가 포함돼 있다고 해서 유해성이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결했다.
▶동양에선 예로부터 시(詩)는 곧 노래였다. 시선(詩仙) 이백은 "술 한 말에 시 100편을 짓는다"고 했다. 단지 술에 관한 내용이 들어갔다고 해롭다고 한다면 술을 소재로 한 이백의 주옥같은 시들도 19세 이하에겐 읽히지 말아야 할까. 예나 지금이나 금지돼야 할 건 행정 관청의 닫혀 있고 굳어 있는 사고방식이다.
황성옛터’를 부른 가수 이애리수씨가 2009.3.3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9세.
경기 일산 백송마을의 한 아파트형 요양시설에서 살아온 이씨는 2009년3월 26일부터 건강 상태가 나빠져 병원에 입원해왔다. 왕평이 작사하고 전수린이 작곡한 ‘황성옛터’는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상을 담은 가사와 구슬픈 곡조로 인기를 끌었다. 고려 옛 궁궐터인 개성 만월대의 쇠락한 모습에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빗댄 가사 덕분에 조선총독부의 압력에도 전국적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가 국민가요가 됐다.
이 노래는 1928년 단성사에서 열린 극단 취성좌 공연의 막간 무대에서 18세 가수 이애리수씨의 노래로 처음 소개됐다. 1932년 음반으로 발매된 후 무려 5만장이나 팔렸다.
22세에 연희전문학교 재학생이던 남편 배동필씨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지만 집안에서 반대하자 동맥을 끊어 자살을 시도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결혼, 2남7녀를 낳아 기르면서 대중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이씨의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3일 오전 9시, 장지는 경기 용인 가톨릭공원묘지. 유족으로는 장남 배두영씨 외에 7녀가 있다. <문주영기자 mooni@kyunghyang.com>
이애리수의 자존심
정홍택
황성옛터 부른 이애리수 여사 첫 인터뷰 너무 기뻐 "조용히 사시는 분 불편해지면 어떡하나" 걱정도
99년 질곡의 삶 고스란히 밴 주름살 보니 눈물이…
▲ 필자가 지난달 21일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황성 옛터'를 최초로 부른 이애리수(오른쪽) 여사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올해 99세인 이 여사는 결혼 후 무대를 떠나 평범한 가정 생활을 하면서 80년 가까이 대중의 관심 저편에서 살아오다 이번에 처음으로 언론 인터뷰에 응했다.
▲ 필자가 지난달 21일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황성 옛터'를 최초로 부른 이애리수(오른쪽) 여사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올해 99세인 이 여사는 결혼 후 무대를 떠나 평범한 가정 생활을 하면서 80년 가까이 대중의 관심 저편에서 살아오다 이번에 처음으로 언론 인터뷰에 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황성옛터'를 최초로 노래 부른 이애리수(李愛利秀ㆍ99) 여사를 내가 만나 최초로 기사를 쓰게 된 것은, 최초의 연예기자 출신인 나로서는 매우 영광이며 행복한 일이다. 어째서 영광이며 행복인가?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가 100세가 다된 나이임에도 건강하게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를 부른 가수지만 단 한번도 언론인과의 만남이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다.
또 셋째로 무엇보다 잘못 알려진 한 여인의 삶을 내가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점이 영광이고 행복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유인촌 장관이 우리나라 대중 문화예술 진흥을 위해 태스크 포스(TF)를 구성하고 그 진흥책을 곧 발표하려고 하고 있는 때라서 이러한 발굴은 더욱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나는 그를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나서 며칠동안 고민을 했다. 지금까지 조용히 살고 있는 그를 공연히 세상 밖으로 알려지게 해서 불편해지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이 있었고 또 가족들이 매스컴의 공세를 잘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잡고 인터뷰 기사를 쓰기로 결심을 했다. 우선 신문이나 방송, 잡지, 인터넷 등에서는 이애리수씨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생사 불명인 것으로 돼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잡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의 삶을 지탱해온 자존심을 정확하게 자리매김하도록 해야겠다는 의무감도 생겼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 입장에서 내 어머니가, 또는 내 할머니가 한 세상을 멋있게 살아 왔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조용하게 살아오신 분이 갑자기 신문 방송에서 거론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하고 생각하는 가족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내 어머니가 역사의 한 주인공이라는 점을 이해하면 달리 마음을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잘못 알려진 내용들을 제대로 고쳐야 하는 의무는 가족들에게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 가야 할 일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를 부른 이애리수 여사는 100세가 다 되도록 단 한 번도 신문이나 방송과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왜 언론을 피했을까?
그의 생각일 수도 있고 집안의 방침일 수도 있다. 결혼을 한 후 행복하게 잘 살고 있고, 아이들을 낳아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데 별 의미 없이 매스컴을 만나서 인구에 회자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가 언론을 일절 피해 왔기 때문에 그의 인생 99년 만에 언론인으로서 내가 최초로 공식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고맙고 흥분 되는 순간인가? 나는 이번 인터뷰 기회에 그나 그의 가족들이 이애리수라는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 지거나 얼굴이 유명해지지 않기를 바라게 된 사연도 명백하게 밝히자는 생각도 하게 됐다.
내가 이 여사를 만난 것은 2008년 10월 21일, 경기도 일산에 있는 어떤 요양원 아파트에서였다. 건강이 많이 나쁜 것이 아니라 워낙 고령이기 때문에 요양을 하기 위해 이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여사는 큰 아들인 배두영씨와 함께 안산에 살고 있었는데 일산에 사는 그녀의 막내딸이 가까운 곳에 뫼시고 싶다고 해서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