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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잠적한 18살 소녀 '황성옛터' 톱 가수 이애리수의 일생
글쓴이 tntv 등록일 [2014.03.02]


 1925년 초가을, 황해도 연안(延安)의 한 여인숙에는 비에 갇힌 순회 가극단이 묵고 있었다.

 이른바 을축(乙丑)년 장마 때. 계속 내린 비 때문에 이들은 한달동안 공연을 못한채 하늘을 원망하고 있었다.

 취성좌(聚星座) 가요부의 20여명 단원들이었다. 그 속에는 작곡가 전수린(全壽麟), 가수 겸 배우 이애리수(愛利秀)가 있었다.

 전수린(全壽麟)은 창밖에 내리는 궂은 비를 바라 보다가 문득 얼마 전 개성(開城)에서 본 황량한 성터를 생각했다, 만월대(滿月臺)에 한길 넘게 우거진 잡초, 발 끝에 부딪치던 기왓장 조각, 주춧돌만 남아 있는 궁터-.

그는「바이얼린」을 꺼내어 떠오르는 악상을 정리했다.

순회극단, 또는 유랑극단이라면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옮기면서「집시」같은 생활을 누리는 사람들. 더구나 한달씩 돈벌이를 못하고 갇혀 있는 처지에서 처량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심경은 그 가극단의 책임자 왕평(王平)도 마찬가지 였다.

전(全)씨가「바이얼린」으로 악상을 정리하여 5선지에 옮겨놓자 왕(王)씨는 흥얼거리면서 가사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노래가『황성(荒城)옛터』다. 가사,「멜러디」가 처량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노래는 취성좌(聚星座)에서 공연을 할 때 청순한 미인 가수 이(李)애리수의 목소리로 불려졌다. 너무 슬프게 불렀던지 공연장인 단성사(團成社)는 눈물바다가 됐다. 너무 슬픈 노래라 하여 작곡·작사자는 고등계 형사한데 붙들려가 취조를 받아야 했다.

 한 때는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했지만 전수린(全壽麟)은 이 한곡으로 충분히 유명해 졌다. 그 때 전(全)씨 나이 18살.

 개성(開城) 태생인 전(全)씨는 송도(松都)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서울에 와서 홍난파(洪蘭坡)씨가 조직한 연락회(硏樂會)에 들어갔다. 그것이 연예계 입문이지만 음악 공부는 이전부터 했다. 당시 개성에는 중앙회관과 고려여자회관이 있었는데 여기에「예뱃소년합창단」이 있어서 전(全)씨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접할 수 있었다. 호수돈(好壽敦) 여학교 초대 교장이던「루즈」부인에게「바이얼린」을 사사, 15살 때는 이미 습작곡을 내놓을만큼 천재적인 재질을 보였다.

 이(李)애리수는 13살 때 취성좌(聚星座)의 아역 배우로 취성좌(聚星座) 대표 김소랑(金小浪)씨에 의해 발탁되었다.

 전수린(全壽麟)씨와 같은 개성 태생으로 전(全)씨보다 3살 아래. 지금 66살인 전(全)씨는 48년 전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李) 애리수의 목소리는 지금 이미자(李美子)와 흡사했다. 곱고 호흡이 퍽 좋았다. 그 위에 굉장한 미인이고 똑똑했다. 노래도 타고 난 예능인이었다.』

 『황성(荒城)옛터』의「히트」가 이(李)애리수의 명성을 더욱 떨치게 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일본「빅타·레코드」사는 전(全)씨를 초청해서 전속 계약을 맺고 이(李) 애리수에게 전(全)씨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 때 전(全)씨가 만든 일본말 노래가『와다나쓰께(仇情=미운 정)』. 이(李)애리수가 부른 이 노래는 일본 안에서도「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영향으로 한국조의 유행가가 등장하기도 했다.「사사기슝이찌」의『시마노 무스메』(섬처녀)는 바로 전(全)씨의『와다나쓰께』를 모방해서 만든 것이고『나미다노 와다리도리』(눈물 젖은 새)는 신(申) 카나리아가 부른『삼천리(三千里) 강산』을 본딴 것이라는 얘기다.

 어쨌든 전(全)씨는 그 후 7년간 일본「빅타」의 정사원으로 일했고 이(李)애리수는 한국 일본 양국에서 똑같이 인기있는 가수가 됐다. 그럴 즈음 이 대망의 여가수를 은퇴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윤심덕(尹心悳)의 경우처럼 연예·정사사건이다.

 일본서 돌아온 이(李)애리수에게 사랑의 불길을 지른 사람은 그때 연희(延禧)전문을 다니던 배동필(裵東弼)이란 청년. 돈도 가문도 당당한 부호의 아들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할 것을 맹세했고 이(李)애리수는 아예 노래도 연극도 집어치우고 배(裵)와의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배(裵)씨 집에서『광대와는 결혼시킬 수 없다』고 완고하게 이를 거부하자 단성사 뒤의 한 여관방에서 정사(情死)를 기도, 팔 동맥을 끊었으나 여관 주인의 발견으로 이들은 다행히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

 그 때 연예계의 지도층 인사였던 이기세(李基世)씨가 이 사실을 알고 배(裵)씨의 부모한데 달려가 담판을 지어 결국 고집 센 노인들의 결혼 허가를 받아냈다. 결혼 허가를 받은 이(李)애리수는 곧바로 은퇴해 버렸다.

 20살 안팎에 최고의 인기 작곡가가 된 전수린(全壽麟)씨는 멋장이(멋쟁이)로도 소문났었다.그는 국내에 처음으로「아코디언」을 들여와 방송국에 출연했다. 서울에「라디오」방송국(京城방송국) 이 개국된 게 1926년. 국내서 처음인 신기한 악기「아코디언」을 방송국 직원들이 보고 하도 독촉하는 바람에 전(全)씨는 채 연습도 하지 못한채「아코디언」을 메고 출연했다가 진땀을 뺐다는 것이다. <조관희(趙觀熙) 기자>


출처:서울신문


이애리수씨 노래 듣기<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tvpot.daum.net/v/2ecqFhlC_hs%24
 

 
  .  
 

'황성옛터’ 이애리수씨 노환으로 별세 향년 99세.

 

 


경향신문 2009. 3. 31

경기 일산 백송마을의 한 아파트형 요양시설에서 살아온 이씨는 2009년3월 26일부터 건강 상태가 나빠져 병원에 입원해왔다. 왕평이 작사하고 전수린이 작곡한 ‘황성옛터’는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상을 담은 가사와 구슬픈 곡조로 인기를 끌었다. 고려 옛 궁궐터인 개성 만월대의 쇠락한 모습에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빗댄 가사 덕분에 조선총독부의 압력에도 전국적으로 급속도로 퍼져나가 국민가요가 됐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이 노래는 1928년 단성사에서 열린 극단 취성좌 공연의 막간 무대에서 18세 가수 이애리수씨의 노래로 처음 소개됐다. 1932년 음반으로 발매된 후 무려 5만장이나 팔렸다.

22세에 연희전문학교 재학생이던 남편 배동필씨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지만 집안에서 반대하자 동맥을 끊어 자살을 시도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결혼, 2남7녀를 낳아 기르면서 대중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이씨의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3일 오전 9시, 장지는 경기 용인 가톨릭공원묘지. 유족으로는 장남 배두영씨 외에 7녀가 있다.
<문주영기자 mooni@kyunghyang.com>


 

 

이애리수의 자존심

 

정홍택

 

황성옛터 부른 이애리수 여사 첫 인터뷰 너무 기뻐
"조용히 사시는 분 불편해지면 어떡하나" 걱정도

99년 질곡의 삶 고스란히 밴 주름살 보니 눈물이…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 필자가 지난달 21일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황성 옛터'를 최초로 부른 이애리수(오른쪽) 여사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올해 99세인 이 여사는 결혼 후 무대를 떠나 평범한 가정 생활을 하면서 80년 가까이 대중의 관심 저편에서 살아오다 이번에 처음으로 언론 인터뷰에 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황성옛터'를 최초로 노래 부른 이애리수(李愛利秀ㆍ99) 여사를 내가 만나 최초로 기사를 쓰게 된 것은, 최초의 연예기자 출신인 나로서는 매우 영광이며 행복한 일이다. 어째서 영광이며 행복인가?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가 100세가 다된 나이임에도 건강하게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를 부른 가수지만 단 한번도 언론인과의 만남이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다.

 

또 셋째로 무엇보다 잘못 알려진 한 여인의 삶을 내가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점이 영광이고 행복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유인촌 장관이 우리나라 대중 문화예술 진흥을 위해 태스크 포스(TF)를 구성하고 그 진흥책을 곧 발표하려고 하고 있는 때라서 이러한 발굴은 더욱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나는 그를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나서 며칠동안 고민을 했다. 지금까지 조용히 살고 있는 그를 공연히 세상 밖으로 알려지게 해서 불편해지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이 있었고 또 가족들이 매스컴의 공세를 잘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잡고 인터뷰 기사를 쓰기로 결심을 했다. 우선 신문이나 방송, 잡지, 인터넷 등에서는 이애리수씨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생사 불명인 것으로 돼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잡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의 삶을 지탱해온 자존심을 정확하게 자리매김하도록 해야겠다는 의무감도 생겼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 입장에서 내 어머니가, 또는 내 할머니가 한 세상을 멋있게 살아 왔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조용하게 살아오신 분이 갑자기 신문 방송에서 거론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될까"하고 생각하는 가족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내 어머니가 역사의 한 주인공이라는 점을 이해하면 달리 마음을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잘못 알려진 내용들을 제대로 고쳐야 하는 의무는 가족들에게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 가야 할 일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를 부른 이애리수 여사는 100세가 다 되도록 단 한 번도 신문이나 방송과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왜 언론을 피했을까?

그의 생각일 수도 있고 집안의 방침일 수도 있다. 결혼을 한 후 행복하게 잘 살고 있고, 아이들을 낳아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데 별 의미 없이 매스컴을 만나서 인구에 회자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가 언론을 일절 피해 왔기 때문에 그의 인생 99년 만에 언론인으로서 내가 최초로 공식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이다.

얼마나 고맙고 흥분 되는 순간인가? 나는 이번 인터뷰 기회에 그나 그의 가족들이 이애리수라는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 지거나 얼굴이 유명해지지 않기를 바라게 된 사연도 명백하게 밝히자는 생각도 하게 됐다.

내가 이 여사를 만난 것은 2008년 10월 21일, 경기도 일산에 있는 어떤 요양원 아파트에서였다. 건강이 많이 나쁜 것이 아니라 워낙 고령이기 때문에 요양을 하기 위해 이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여사는 큰 아들인 배두영씨와 함께 안산에 살고 있었는데 일산에 사는 그녀의 막내딸이 가까운 곳에 뫼시고 싶다고 해서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그의 아파트는 바깥출입이 편리하도록 1층에 있었고 널찍한 방 3개에 5명의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모두 6명이 기거하고 있다. 또한 3명의 간병사들이 있어서 식사를 비롯한 모든 일을 돌봐 드리고 있기 때문에 불편함은 전혀 없는 듯했다.

나는 그의 장남인 배두영씨와 함께 아파트로 들어서면서 그녀의 얼굴에 깊고 굵게 파여져 있는 주름살을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99년 동안 겪어 온 삶의 질곡이 그 속에 담겨져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80년 전 수많은 젊은 청년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미모의 스타가 지금 저렇게 말없이 휠체어에 앉아 있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 갈 때 그녀는 간병사의 도움을 받아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죽과 몇 가지의 반찬이 점심 식단이었는데"하루 세끼 여러 가지 죽을 드시는데 항상 남기지 않고 모두 비우신다"고 간병사가 말했다. 그리고 간병사들은 그녀를'이음전 어르신'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음전(李音全)은 이애리수 여사의 본명이다.'음전'이란"언행이 우아하고 점잖다"라는 뜻이다.'소리 음'자가 들어가서 노래를 잘 하게 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우연일 뿐이다. 하지만 노래를 잘 한 것은 사실이다. 노래만 잘 한 것이 아니라 공부를 아주 잘 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의 본명이 이보전(李普全)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이음전 여사는 경기도 개성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매우 예쁘고 총명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9살 때 잠깐 동안 아역 배우로 활동을 한 것도, 워낙 키가 크고 예쁜 외모 때문에 극단주들이 꾸준히 요청하는 바람에 이뤄진 것이다.

그녀는 개성에 있는'호수돈 여고'를 졸업했다. 호수돈 여고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현재 대전으로 이전해 있는데, 미국 여성이 설립한 신식 학교로서 일제에 항거하는데 앞장 선 명문 여학교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조선의 딸을 길러 주는 훌륭한 학교"라고 칭송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음전 여사는 이 학교에서 줄곧 1등을 하는 등 공부를 잘 했고, 반장을 도맡아 하면서 적극적인 학창 생활을 했다. 이 같은 그의 적극적인 성격과 자존심 강한 생활력은 훗날 결혼하고 자녀들을 기르는 모습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이음전'이라는 본명 대신'이애리수'라는 예명으로 산 것은 몇 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연예인으로 산 것도 몇 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몇 년 되지 않는 세월이 그의 인생을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나면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한 채 지금까지 100년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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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34>이애리수를 찾아라

 

1968년 주간한국 기자때 만남 시도했지만 못이뤄
40년 기다림·끈질긴 설득 끝에 첫 인터뷰 '큰 반향'
"이음전 여사님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길 빕니다"

사진-배정환 한국보도사진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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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황성옛터'를 최초로 부른 이애리수(사진ㆍ99) 여사는 1968년 필자의 첫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으나 40년만인 올해 10월 마침내 인터뷰와 함께 사진 촬영을 허락했다. 이로써 우리나라 대중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가수의 인생이 기록으로 남게 됐고 우리는 그를 위해 "오래 사시라"고 기원할 수 있게 됐다. /배정환 한국보도사진가협회 회원

1968년에서 2008년 까지 40년 동안은 내가 황성옛터와 이애리수를 찾기 위해 노력한 세월이다. 40년간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찾아 다닌 것은 아니고 그렇게 긴 세월동안 기다렸다는 얘기다.

사연은 이렇다. 1968년 내가 한국일보 자매지'주간한국'의 기자로 있을 때 김성우 부장이"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랑 받는 가요가 무엇인지 설문 조사를 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말이 제안이지 사실상 조사하라는 지시였다.

 

조사는 두 가지로 진행됐다. 전문가 의견을 듣고 일반 독자들의 투표도 받았다.


그래서 10곡을 선정했는데, 그 중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한 곡이 '황성옛터'였다. 다시 말하면 그 당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대중가요가 황성옛터라는 얘기다.

 

박정희 대통령도 자신이 제일 좋아 하는 노래로 황성옛터를 꼽았다. 이런 내용을 조사해서 신문에 발표하고 나니까 김성우 선배는 나한테 또 골치 아픈 지시를 내렸다.


"황성옛터 레코드 오리지널 판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고, 노래 부른 이애리수를 찾아서 인터뷰 기사를 쓰라"는 것이다. 김성우 선배야, 자기는 말로하면 되지만 나는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되니까 육신이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이 양반은 도대체 뭐든지 내가 나서면 되는 줄 아는 거야 뭐야?' 남 고생하는 건 생각도 안하고 "무조건 찾아내쇼!"였다.

나는 구시렁구시렁 거렸지만 하는 수 없이 신문에 "노래를 찾는다"는 사고를 냈다. 얼마 후에 부산에서 어떤 분이 연락을 해왔다. 자기네 집에 옛날 판이 수두룩하니 와서 찾아보라고 했다. 앞뒤 볼 것 없었다. 사진기자 류호석씨와 둘이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서면 어디인가를 물어 물어 그분 집을 찾아 갔더니 방안에 옛날 SP판이 하나 가득 있었다. 한참 뒤진 끝에 우리는 황성옛터를 찾아냈다. 그 기쁨이란!

그걸 껴안고 서울로 올라와서 축음기를 구해 들어 보니까 우리는 여태까지 오리지널과는 두 가지 점에서 달리 노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노래의 템포가 빠르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 그 무엇 찾으려고"라는 대목의 멜로디가 현대인이 부르는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으'를 높게 올려서 노래하는데 오리지널은 '으'를 아래로 내려 부르고 있었다.

  

 나는 즉시 작곡자 전수린씨를 만났다. 작사를 한 왕평씨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서 아쉬웠지만 작곡자와 가수는 쉽게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된다. 전수린씨와의 인터뷰 기사는 주간한국에 곧장 실었지만, 노래를 부른 이애리수 여사는 만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968년이니까 그녀가 아직 회갑이 안 되었을 때이다. 나는 이애리수 여사가 살고 있는 곳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본인은 물론 가족들이 신문기자 만나는 것을 사양했다. 2남 7녀의 어머니로서 또는 할머니로서 조용히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구태여 지금 와서 지난 날들의 일을 들춰내어 불편해질 필요가 있느냐 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말을 남기고 나는 물러났다. 그러나 언제고 반드시 한번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고 말겠다고 나 혼자 다짐을 했다. 그 다짐이 꼭 40년 후인 2008년 10월 21일에 이뤄진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 인터넷 등에서는 이애리수 여사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으나 나는 그녀가 건재하게 생존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후에도 장남을 통해 꾸준히 접촉을 하면서 엄연히 살아 계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알려지는 것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음전이 본명이라는 것도 밝혀야 한다고 설득했다. 또 우리나라 대중가요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하는 분이니까 정말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더 이상 은둔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큰 아들은 결국 나하고의 인터뷰를 허락하게 됐다. 그리고 인터뷰하는 날 그가 점심식사 값을 내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아버지 배동필씨, 그러니까 이애리수 여사의 남편은 부잣집 외아들로 자랐고'맛나니'라는 간장공장을 경영했다. 또한 당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만큼 멋쟁이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다. 미처 피난을 못간 그는 6월 25일 전쟁이 난 날부터 9 ㆍ28 서울 수복 때 까지 3개월 동안 집의 마루 밑에서 숨어 살게 된다.

그 후 수복이 되자 친구인 국군 7사단장과 함께 북으로 갔다가 북한군이 쏜 총에 맞아 요도 관통을 당하는 큰 부상을 입는다. 간신히 생명은 건지지만 곧 바로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된다. 다행히도 포로 교환 때 풀려 나오긴 했으나 집안 형편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배동필씨와 이음전 여사는 생활이 어려울 때에도 자식들에게만은 절대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항상 자존심을 지키라"는 것을 집안의 가훈으로 삼았다. 돈이 없을 때는 집에 있는 물건을 가지고 나가서 물물교환으로 생필품을 사오는 한이 있어도 누구에게 거저 손을 내미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고 한다.

이음전 여사는 지금처럼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 까지는 안산에서 장남과 함께 살았는데, 새벽 5시 반부터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운동을 했다고 한다. 운동을 할 때에도 반드시 한복을 곱게 입고 다녀서 '한복 할머니'라고 불렸다. 물론 동네 사람들 중에서도 이 할머니가 '황성옛터'를 부른 왕년의 톱 가수인지를 눈치 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이애리수 여사를 만나고 나서 생존확인 기사가 10월28일자 한국일보에 실리자 우리나라의 많은 신문과 방송들, 그리고 통신과 인터넷 등에서 이 기사를 전재해 주었다. 또 네티즌들은 격려의 댓글을 올리면서 이애리수 여사의 건강을 빌어 주었다. 이 글을 통해서 그 분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당연히 이음전 여사와 가족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이음전 여사님,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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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택의 지금은 말할 수 있다] <33>이애리수의 사랑

 

부잣집 아들 배동필씨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자살 기도
"예술인 사실 알리지 말라" 조건 혼인 승낙받아 9남매 둬
큰아들조차 대학생 돼서야 어머니의 가수 활동 사실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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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황성옛터'를 처음 부른 이애리수 여사가 외손녀와 함께 가족사진을 보고 있다. 이 여사는 돋보기 안경도 쓰지 않고 사진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눈이 밝다. 이 여사는 사랑을 위해 배우와 가수 활동을 접은 뒤 2남7녀를 키워냈다. /배정환 한국보도사진가협회회원

'이음전'이라는 본명 대신에'이애리수'라는 예명으로 살게 된 것은 그의 운명의 진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녀가 다닌 개성의 호수돈 여학교는 1899년에 주일학교 형식을 빌려 개성여학당이라는 이름으로 시작을 했지만 1910년에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 정식 개교를 한다.

공교롭게도 호수돈 여학교의 나이는 그와 같다. 자유당 정권 때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박마리아(이기붕 부통령의 부인)씨도 이 학교 출신인데 그보다 4년 선배로 1928년에 모교 선생을 하기도 했다. 1928년은 이애리수가 단성사에서'황성옛터'를 처음 불렀던 바로 그 해다.

모교인 호수돈은 홀스톤(Holston)이란 이름을 우리말 발음으로 옮겨 놓은 것인데 그의 예명인 애리수(愛利秀)도 영어 이름인 앨리스(Alice)를 우리 발음화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애리쓰 또는 이애리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본명인 이음전(音全)의 가운데'음'자가 '소리 음'이라서 노래를 잘한다는 얘기가 떠돈 것은 그저 우연일 뿐이다. 그렇지만 예명인 애리수의 '애'가 '사랑 애'자인 것은 훗날 예사롭지 않은 그의 앞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 무렵은 대중예술이 서서히 동트기 시작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면서 극장무대가 활발해졌는데 작곡, 작사를 하던 전수린이나 왕평과 같은 이들도 이 무렵에 이름을 크게 알리게 된다. 그러면서 이름을 예명으로 바꾸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나 트렌드가 되다시피 했다.

 

 

작곡가 전수린의 본명은'전수남'이고 작사가 왕평의 본명은'이응호'이다.

왕평은 배우와 가수를 겸하기도 했는데 예명과 본명을 모두 사용했다. 이음전이 이애리수가 된 것도 이런 흐름의 하나였다고 보면 된다. 왕평은 경북 영천이 고향이지만, 전수린과 이애리수는 개성이 고향이다. 특히 전수린은 애리수의 모교인 호수돈 여학교의 미국인 여자 선생한테 바이올린 연주를 배운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이음전은 학교생활을 적극적으로 했다. 활달한 성격이었고 줄곧 반장을 하는 등 학업 성적도 뛰어났다. 이러한 개성이 아마도 연극배우나 가수 생활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신여성의 길을 가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그토록 견디기 어려웠을 삶의 역경을 꿋꿋하게 이겨내는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배우와 인기가수로서 한창 유명세를 타고 있을 무렵에 그는 친지의 소개로 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배동필(裵東必)'큰 키에 잘 생긴 얼굴, 부잣집 외아들. 어디 하나 흠 잡을 데가 없는 청년이었다.

그는 서울 종로 내수동 토박이이고 제2고보(지금의 경복고등학교)를 나와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상과 1학년 재학 중이었다. 나이는 애리수보다 2살 아래였다. 큰 키에 예쁘고 인기 높은 신여성 스타 이애리수와 멋쟁이 배동필은 만나는 순간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사랑이란 그리 쉽게 맺어지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다. 그것도 아주 큰 어려움이다. 배동필씨의 아버지 배상호 선생이 강력하게 반대한 것이다. 이유는"양반가문에 배우나 가수출신이 며느리로 들어오는 것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두 젊은이들의 사랑은 깊어만 갔다. 배동필은 아버지의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그야말로 어림도 없었다. 배동필의 누나와 누이동생 까지 나서서 아버지를 설득해 봤지만 배상호 선생의 뜻을 굽힐 수가 없었다. 심지어 배상호 선생은 두 사람을 떼어 놓기 위해 아들을 일본의 중앙대학으로 유학을 보내고 만다.

현해탄을 사이에 둔 사랑 이야기는'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배동필과 이애리수의 사랑은 현해탄을 넘나들며 오히려 더욱 더 뜨거워지게 된다. 사랑이 깊어 갈수록 아버지 배상호 선생의 반대는 더욱 완강해졌다. 결혼은커녕 두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게 했다.

결국 두 젊은이들의 선택은 막다른 길에 몰릴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 할 바에야 함께 세상을 떠나자는 것. 더구나 이때는 이름난 사람들의 자살사건이 많아서 사회적인 걱정거리가 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실제로 이애리수와 같이 빅터레코드사에 전속돼 있던 여자 가수 강석연이 음독자살을 해서 충격을 주기도 했다.

결국 두 사람은 자살을 기도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배씨의 여동생 배동일씨가 급히 병원에 연락을 해서 그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마침내 아버지는 여기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을 위해 죽음을 택하겠다."는 아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아버지는 아들과 이음전의 혼인을 승낙한다. 그러나 혼인 승낙에는 매우 엄격한 조건이 뒤따른다.

첫째는 결혼식은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끝까지 지켜졌다. 배동필씨가 14년 전에 82세로 세상을 떠났으니까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채 만 61년 동안 함께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늦게나마 결혼식을 올렸을 만도 한데 이음전 여사는 "약속은 지킨다"면서 식을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두 번째 혼인 조건은 지키기가 더 어려운 일이었다."며느리가 대중 예술인이었다는 얘기를 절대로 발설하지 마라."였다. 당시 뿐만 아니라 나중에 아들딸을 낳은 후 자식들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물론 레코드 취입 때나 가수 활동 때 찍은 사진 등도 모두 없앴고 연예계 사람이나 언론사 사람들과의 접촉도 일정 금지였다.

매우 지키기 힘든 조건이지만 이음전 여사는 이것도 철저하게 지켜냈다. 장남인 배두영씨가"누나들은 미리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대학생(연세대)이 돼서야 내 어머님이 황성옛터를 부른 가수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고백했을 정도다.

세 번째 조건은, 일단 며느리가 된 이상 가수고 배우고 모든 것을 잊고 배씨 집안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하라는 것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배동필씨와 이음전 여사는 가정을 꾸미게 된다. 1934년에 첫딸을 낳고, 이어서 둘째 딸과 큰 아들, 작은 아들 등 2남 7녀, 9남매를 두었다. 9남매의 어머니로서, 그토록 사랑한 한 남자의 아내로서 또한 엄격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그녀는 삶의 무게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며 말없이 살아온 것이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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