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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무형문화재로 거듭 태어난 우리나라의 옛 영화
글쓴이 tntv 등록일 [2011.07.23]




등록 영화의 선정 기준

한국 고전영화가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등록문화재가 된 것은 2007년 9월이었다. 2003년 7월 등록문화재의 주 대상이 근대 건축물, 시설물에서 미술, 음악 등 이른바 동산문화재로 확대됨에 따라 영화필름도 문화재가 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갖게 된 것이다.

영화필름들을 문화재로 등록시키려는 노력은 2006년부터 시작되었다. 영화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위원들이 여러 차례 논의 끝에 제작기간이 50년 넘은 영화필름, 시나리오, 콘티뉴어티, 스틸사진 등 역사적 자료적 가치가 큰 것을 대상으로 하되, 영화의 예술적 완성도, 당대 대중에 대한 사회·문화적 영향력, 그리고 당대 사회 모습이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평가한다는 선정 기준을 마련하였다. 50년이라는 기간은 영화의 재산권 행사가 소멸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영화의 범주는 제작 과정에 한국인이 주도적 역할을 했거나, 한국인을 주 관객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정리되었다. 여기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경성촬영소를 운영한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의 예처럼 일본인이 제작했더라도 한국인이 감독을 했거나 배역의 중심이 되었다는 뜻이다.

대상은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을 최우선으로 하고, 경우에 따라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에 의해 만들어진 마스터 포지티브 필름, 마스터 포지티브 필름에서 현상, 인화된 듀프 네거티브 필름, 또는 포지티브 이미지와 사운드트랙을 합한 릴리스 프린트 필름도 감안하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해방 전 질산염 필름이 갖는 보존의 한계와 한국전쟁으로 남아있는 필름이 희귀하다는 점이 고려되었다.

 

문화재가 된 일곱 편의 영화

이러한 평가 기준에 따라 1936년 이후 1957년까지 제작된 한국영화 가운데 현존하는 영화 필름 38편을 대상으로 논의한 결과 <미몽> (양주남 감독, 1936)을 비롯한 <자유만세> (최인규 감독, 1946), <검사와 여선생> (윤대룡 감독, 1948), <마음의 고향> (윤용규 감독, 1949), <피아골> (이강천 감독, 1955), <자유부인> (한형모 감독, 1956), <시집가는 날> (이병일 감독, 1956) 등 7편이 문화재 등록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미몽迷夢> (1936, 47분)은 당시 가장 오래된 영화이자 1930년대 영화문법과 식민지 시대 개방적인 신여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양주남의 첫 감독 작품이자 경성촬영소의 여섯 번째 발성영화로서 토키영화 초기의 기술 수준이 잘 드러나 있다. 평면적인 캐릭터나 갑작스러운 극의 전개, 어색한 카메라 앵글 등 영화문법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으나 암시적인 새장의 인서트 쇼트, 사운드 몽타주, 화가 난 여주인공 애순(문예봉)이 남편이 비친 화장대 거울을 거세게 흔드는 도입부의 불만스런 심리표출 등 연출 감각이 만만치 않다.

일제에 대한 항거와 해방을 주제로 다룬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 (1946, 50분)는 당대의 영화 기술을 대표하는 일본 동보영화사 출신의 촬영기사 한형모와 조명기사 1세대인 김성춘, 본격적인 최초의 편집기사 양주남 등이 가세하여 해방 후 처음 항일 광복영화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이 영화의 장르적 특징은 지하 독립운동가인 한중과 그를 사랑하는 두 여자와의 관계를 멜로드라마의 플롯에 따라 진행시킨 반면, 한중과 추격하는 일본 헌병대 사이에서 벌어지는 총격전의 교차편집 등은 액션영화의 구조로 엮어냈다는 데에 있다.

윤용규 감독의 <검사와 여선생> (1948, 38분)은 마지막 변사로 알려진 신출의 해설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16밀리 무성영화이다. 예술성보다는 ‘변사의 연행방식을 가늠해볼 수 있는 유일한 무성영화’로써 역사적 가치가 있다. 집에 숨어 들어온 탈옥수 때문에 살인 누명을 쓰고 법정에 서게 된 여선생이 검사가 된 소학교 재직 시절의 제자를 만나 무죄로 풀려난다는 내용인데, “억울하게 남편을 죽인 살인자로 몰렸으니… 아,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이더냐.” 변사의 해설에서 알 수 있듯이, ‘신파영화의 전형’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윤대룡 감독의 <마음의 고향> (1949, 76분)은 산사라는 한적한 공간을 배경으로 모정에 대한 소년의 간절한 그리움과 주지(변기종), 청년, 동승 등 삼 세대 스님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린 ‘해방 후 조선영화 최고봉을 이룬 수작’이다. 함세덕의 「동승」을 각색한 완성도 높은 문예영화로서 신파성의 탈피가 두드러진다. 롱 쇼트로 산사의 풍광을 잡은 한형모 감독의 촬영구도가 시선을 끌었으며, 인물의 성격도 역할에 알맞게 형상되었다. 특히 산사에 불공을 드리러 온 젊은 미망인(최은희)과의 만남을 계기로 변화하는 동승(유민)의 모성에 대한 감정과 어머니의 과거를 꿈의 형태로 빚어낸 장면은 정적인 영상문법으로 압축시킨 효과를 거두고 있다. 특히 꿈에서 깬 도성이 어머니를 찾아 길을 내려가는 마지막 부감 장면은 꿈결처럼 애절하고 아름답다.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 (1955, 106분)은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반공법에 걸려 상영이 금지된 바 있는 최초의 영화이다. <피아골>의 특징은 남한 군이나 경찰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빨치산만 나온다는 점이다. 그들은 감정 없는 살인자로 묘사되던 일반적인 추세와는 달리 스스로의 욕망 때문에 인간적인 갈등을 일으키는 독특한 캐릭터로 그려져 있다. 실제로 그 가운데 시종일관 잔혹한 모습을 보이는 빨치산 대장 아가리(이예춘)조차 몽타주로 구성된 악몽 장면을 통해 자신의 잔인함에 대한 죄책감과 갈등을 드러내고,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하는 이념의 집착을 보여준다.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 (1956, 124분)은 향락 풍조에 흔들리는 대학교수 부인의 일탈적 행동을 통해 해방 이후 한국의 사회상을 투영시킨 화제작이다. 미군의 진주와 함께 들어온 자본주의, 서구의 상품들은 여성의 성의식과 연결되면서 ‘최고급품’으로 포장되고, 가부장적 가치관을 위협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이런 시기에 많은 여대생을 유린한 박인수 사건이 터져 사회문제화 되고, 춤바람과 계모임 등 여성의 개방풍조를 소재로 한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이 서울신문에 연재돼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작품이 영화화된 배경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오선영(김정림)을 비롯한 여성들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욕망의 대상이자 소비의 주체가 된다.

이병일 감독의 <시집가는 날> (1956, 78분)은 한국영화 사상 최초의 해외 영화제 수상작으로 기록된다. 오늘날 한국에서 아시아영화제 특별 희극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수롭지 않지만, 당시에는 적잖은 자극을 준 ‘사건’이었다. 코미디방식으로 승부를 건 이 영화는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이례적일 만큼 좋은 평가를 받았다. 웃음을 자아내게 한 요인이 슬랩스틱적 요소가 아니라, 향토색을 살린 민속극적 시대풍자와 아이러니라는 점에서 향후 코미디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예전 극장 풍경과 영화필름 보존의 의미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나운규의 <아리랑> (1926)이나 이규환의 <임자 없는 나룻배>와 같은 명화들이 필름으로 남아 있지 않아 선정 대상에 오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 작업에 참여한 자문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들은 토막 필름에 불과한 실사實寫 중심의 활동사진 시대를 거쳤다. 화면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열광하던 시절이었다.

초창기 영화인 안종화(한국영화측면비사/ 춘추각, 1962)는 1910년대 초 서울의 한 극장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옥양목 스크린에 불이 꺼진다. 그리고는 이어 화차가 달려온다. 그러면 관중석은 그대로 수라장이 된다. 혹시나 화차와 충돌이 될까봐서 관객들이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느라고 아우성을 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화차가 곧장 그대로 달려오다 보면, 관중들은 영락없이 광무대 귀신이 될 것이니까. 영화가 끝난 다음은 더욱 가관이었다. 으레 관중들이 무대로 몰려들어 혼잡을 이루었다. 스크린을 들쳐보려는 궁금증에서였다. 그들은 조금 전에 본 화륜선火輪船과 화차와 사람들의 출처가 의아스러웠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농경사회에서 식민지시대, 6·25전쟁을 겪고 오늘에 이르는 동안 많은 문화유산을 잃었다. 근대기에 만들어진 영화, 특히 해방 전에 제작된 영화 필름 대부분이 훼손되거나 사라지는 전철을 밟았다. 이런 원인은 제작 관계자들의 보존의식 결핍과 기록문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박약한 데서 찾아볼 수 있다. 미래에 나올 영화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보존의식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영화필름의 문화재 등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제도의 전향적인 시행이야말로 영화의 문화사적 위상과 사회적 역할을 환기시키는 기념비적인 출발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글·김종원 영화사학자, 영화평론가   
사진·한국영상자료원, 스포츠서울 닷컴

출처:월간 문화재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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