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석들이 수호신인양 길 좌우로 도열해 있다.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내동 199번지 중골 마을
이곳에 약 38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북한산 내시 묘역이 자리 하고 있다.
나는 집안 아저씨가 운영하는 주간신문사인 ‘시사신문’ 박사장님으로부터 한 통의 휴대전화를 받았다. 군부대 사격장 지역에 훼손된 묘소가 있는데, 엄청난 비석이 있고 많은 석물이 파손되었다며 무슨 묘인지를 물어왔다. 나는 아마 내시묘(內侍墓) 같다는 의견을 전했다.
그로부터 약 일주일 뒤 나는 아저씨로부터 또다시 전화를 받았다. 자기 신문사 기자를 붙여줄 터이니 취재를 해서 세상에 알리자는 것이었다. 나는 추후에 연락을 드리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바쁜 관계로 답사를 미루고 있다가 5월 10일 큰 결심을 하고 마침내 임기자와 구파발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마침 “은평 뉴타운 지표조사”를 하고 있던 상명대학교 최규성 교수님도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우리 세 사람은 최교수님 차로 곧 내시묘로 향했다. 오로지 의지하는 것이라곤 임기자가 사장님으로부터 건네받은 한 장의 약도 뿐이었다.
구파발역에서 북한산성길을 따라 약1킬로 쯤 가다가 삼거리 길을 지나 50미터쯤 더 올라가니 우측으로 백화사(白華寺) 안내표지판이 나타났다. “백화사 표지판입니다.” “그렇군요.” 나의 말에 최교수님이 동조했다. 우회전을 하여 다시 이 길을 따라 300미터쯤 들어가니 백화사가 나타났다. 우리는 먼저 백화사의 주지스님을 찾았다. 곧 이 절의 주지승인 일법(一法)스님이 나타났다. 마침 그곳에는 북한산 국립공원 북한산성 분소장인 김소장님과 자연보호 전국중앙협의회 유총재님도 함께 와 있었다. 우리는 그들과 인사를 나눈 후 곧 스님에게 우리의 관심사인 내시묘에 대한 질문을 시작했다.
스님의 이야기로는 조선조 마지막 내시가 이 마을에 살았고 요즈음도 내시땅이 공공연히 거래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군부대 사격장과 절 뒤쪽에 내시묘가 있는데 절 뒤쪽의 묘역은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먼저 군부대 각개전투교장 묘역부터 답사하기로 했다. 마침 유총재님은 박사장님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유총재님의 뒤를 따라 절 앞의 야산을 타기 시작했다. 약 200미터쯤 올라가니 텐트 자리 여기 저기에 상석과 비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문화재적인 가치가 높은 문인석(文人石)은 대부분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으며 머리 부분이 훼손된 문인석 한 기만이 평지에 남아 있었다.
아마 석물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이곳에 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봉분은 이미 없어진 후였다. 나와 최교수님은 열심히 비문을 살피기 시작했다.
족히 2미터는 되어 보이는 묘비의 전면에는 “선무원종공신 박공 효립지묘(宣武原從功臣朴公孝立之墓)”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으며, 후면에는 “만력(萬曆) 46년 무오 11월 일립(萬曆四十六年 戊午 十一月 日立)” 이라고 적혀 있었다.
또다른 비석의 전면에는 “절충장군 행용양부호군 한공응선지묘(折衝將軍行龍驤副護軍韓公應善之墓)” 라고 되어 있었으며 후면에는 “천계 5년 5월 일립(天啓五年 五月 日立)” 이라고 적혀 있었다. 만력 46년은 서기 1618년(광해군 10년)이고, 천계 5년은 서기 1625년(인조 3)이니 두 묘소의 조성 연대가 400년 가까이 되는 셈이다.
이번에 확인한 비석과 상석은 규모가 엄청났으며 비신의 받침대인 농대석(籠臺石)엔 운문(雲紋:구름무늬)이 조각되어 문화재적 가치도 높아 보였다.
이곳 비석이 있는 옆쪽 능선에는 근래에 파헤쳐진 것으로 추정되는 구덩이가 무덤 비석 주변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으며, 귀퉁이가 깨어져 나가거나 아예 반쯤 잘라져나간 상석도 있었다.
그 일대는 남양송씨(南陽宋氏) 선산이었음을 짐작케하는 “증군자감정 남양송공 상호묘(贈軍資監正南陽宋公象鎬墓)”, “남양송공 영기지묘(南陽宋公榮基之墓)” 등의 비석이 있었다. 또 주변에선 큰 문인석 한 기가 머리 부분만을 드러낸 채 흙속에 묻혀있는 것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시묘를 증명할 수 있는 어떤 단서도 찾지못한 우리 일행은 잠정적으로 ‘조선조 공동묘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곧 하산을 시작한 우리는 쉴 사이도 없이 절 뒤쪽 내시묘역을 조사하기 로 했다.
절 우측 담을 돌아 50미터 지점에 이르니 철대문이 보였다. 대문을 통과하여 30미터쯤 더 올라가니 길 좌우로 크고 작은 약 10여기의 문인석과 동자석이 도열해 있는 것이 이채로왔다. 나중에 내시 후손에게 들은 얘기지만 이 석물들은 인근 야산의 무연고(無緣故) 묘에서 가져다 놓았다고 한다. 아마도 앞쪽의 사격장 산 묘역에서 옮겨온 듯했다.
다시 길을 따라 100미터쯤 올라가니 철조망 대문이 눈앞에 들어났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근래에 조성한 듯한 10여기의 묘가 눈에 띄었다. 우리는 상석에 쓰인 글씨를 살폈다. 내시 관직이 눈에 들어왔다. 틀림없는 내시묘역이었다. 그러나 조성 연대가 오래되지 않아 문화재적 가치는 없어보였다.
다시 위쪽으로 약 10미터 지점에 수려한 북한산 국립공원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잔디밭으로 조성된 넓은 묘역이 나타났다. 드디어 몇 백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는 북한산 내시묘역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나는 예술성이 뛰어난 문인석과 이끼에 검어진 몇백된 된 묘비를 보는 순간 신세계에 들어간 듯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서둘러 임기자는 사진을 찍고 나와 최교수님은 비문 내용을 수첩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묘를 세어보니 모두 45기였다. 북한산 내시묘역은 내시파중 이사문(李似文)을 파조로 하는 “이사문공파(李似文公派)”의 내시 분묘가 한 곳에 모여 있는 가족 묘지인데, 현재 그의 후손 5가구가 19대까지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묘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승전관(承傳官)’을 지낸 김충영(金忠英)의 묘로 비를 세운 날자가 ‘천계(天啓) 원년(元年) 8월 12일’로 되어 있어 광해군 13년인 1621년에 세운 비석임을 알 수 있었다.
승전관이란 내시 중 왕과 왕비의 명령을 출납한 승전색(承傳色)을 말하는 것으로 내시부의 직제상 정4품 상전(尙傳)이 이를 맡았다.
현재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이사문공파(李似文公派)의 가계도(家系圖)를 기록한 가승(家乘)을 보면 묘가 ‘중흥동(中興洞) 면암(緜岩:일명 솜바위로 백화사에 있음) 동쪽 사패지(賜牌之地)’에 있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처음부터 중흥사(中興寺) 동쪽 현재의 위치에 국가로부터 하사받은 땅에 묘역을 조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패지란 공을 세운 공신에게 국가에서 왕이 하사하는 땅을 말하는데 실제로『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김충영이 선조 34년(1601)과 광해군 9년(1617)에 각각 어린 말 1필과 품계가 가자(加資:정3품이상의 당상관 품계에 올림)되는 상을 받은 기록이 나오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묘 가운데 비석에 관직이 기록된 이는 모두 14명인데, 그 중 최고 관직인 종2품 상선(尙膳)에 오른 이는 임성익(林成翼), 박민채(朴敏采), 김성휘(金成輝), 박황(朴滉), 오준겸(吳浚謙) 등 모두 5인이며, 기타 영내시부사(領內侍府事:정1품)가 1인,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종1품)가 1인, 구한말에 봉시(奉侍)를 지낸 이가 2인이며, 기타는 상세(尙洗: 정6품) 등 다양하다.
이들 묘 중 박민채(朴敏采) 묘비문에는 현재의 은평구 진관동(津寬洞)과는 다른 ‘양주(楊州) 진관(榛官)’이, 김성휘(金成輝)와 박황(朴滉)의 비문에는 ‘양주 진관(榛關)’이라는 한자가 씌여 있어서 진관내․외동의 변천사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묘역에 남아 있는 석물(石物)은 문인석(文人石)이 5쌍, 비석이 5기, 상석(床石)이 20기, 망주석(望柱石)이 9기였다.
특히 일반인의 관심을 끄는 것은 내시도 부인과 자녀를 두고 생활했다는 사실이다. 즉 비문에 기록된 ‘박공(朴公) 양위(兩位)지묘’와 ‘배정경부인(配貞敬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 부좌(祔左)’의 기록인데, 이로써 내시의 부인도 사대부의 부인과 같이 정1품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작(封爵)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유삼자(有三子) 왈김여일(曰金汝鎰) 왈임성익(曰林成翼) 왈김성휘(曰金成輝)’라는 기록은 내시도 자녀를 입양(入養)해 대를 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현재 이곳에는 부인과 함께 묻힌 합장묘가 7기, 나란히 묻힌 쌍분(雙墳)이 3기정도 남아 있다.
훗날 후손에게 받은 가승에는 100명 정도의 이름이 올라 있는데 특이한 것은 양자로 갔더라도 양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성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다만 내시도 김흥두(金興斗)․김흥방(金興邦)․김흥서(金興邦)의 예에서 보듯이 돌림자를 따라 이름을 지어줬다는 사실이다.
답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곧 내시 관련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내시란 조선조에 궁궐에서 왕이나 왕비, 세자를 모시던 내관(內官)을 말한다.『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의하면 그들은 내시부(內侍府)에 소속되어 대내 식사의 감독, 명령의 전달, 문의 수직(守直), 청소, 궁중의 각종 제사, 시릉관(侍陵官)으로서 왕릉의 시묘살이, 진상품 관리를 하는가 하면, 도성 밖에 있는 왕실전용 잠실(蠶室)에 파견되어 누에치는 일을 감독하기도 하였다. 정원은 140명인데, 이들이 받은 급료를 보면 상선은 종2품록, 상온(尙醞)은 정3품 당상관록, 상다(尙茶)는 종3품 당하관록을 받았다.
또한 “대전과 중궁전의 출입번 내관의 봉록은 쌀이 1석 1말, 콩이 10말, 또는 쌀 1석 1말에 콩 3두씩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품계는 종2품 상선(尙膳:임금의 수라상 감독)으로부터 종9품 상원(尙苑:정원관리 담당)에 이르기까지 모두 15품계가 있었다. 이들 중에는 궁밖 출입을 하지 않고 궁에서 먹고자는 장번(長番) 내시와 근무가 있는 날만 들어와 근무하는 출입번(出入番) 내시가 있었다. 임금이 묵는 건물인 대전에 근무하는 대전장번은 정원(定員)이 없었으며, 세자궁(世子宮) 장번도 정원이 없었으나 대전 장번이 겸하였다.
한편 출입번은 대전 출입번 42명, 왕비전 출입번 12명, 세자궁 출입번 12명, 빈궁 출입번 8명이 있었으며, 각 빈궁(嬪宮)에는 별도로 상직(上直)하는 어린 환관 90명이 있었다.
내시들은 아이를 낳을 수 없기에 모두 양자(養子)로 대를 이었으므로 성(姓)이 틀린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집안에선 엄연히 부인과 자녀를 거느린 가장이었다.
비록 그들은 양반들로 부터는 멸시를 받았으나 많은 토지와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별다른 취미도 없어 재산을 탕진하는 경우도 적어 몰락한 양반보다는 풍족한 경제생활을 하고 있었다.
내시중에는 공신(功臣)에 책록되어 많은 토지를 조정으로부터 하사받은 자도 많았으며, 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관계로 왕의 권력을 등에 업고 비리를 조성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실지로 중국 원(元)나라와 청(淸)나라는 환관의 횡포가 멸망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연산군 때에 김자원(金子猿) 같은 내시가 왕의 총애를 믿고 횡포를 일삼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때에 죽음을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때 왕에게 바른 말로 직언(直言)을 하다가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죽음을 맞은 김처선(金處善)같이 대부분의 내관은 왕실을 위해 충성을 다한 충직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는 내시들의 족보(族譜)인『양세계보(養世系普)』와 궁궐 내 장번 내시들의 쉼터로 내시부(內侍府)의 분원(分院)격인 내반원(內班院)의 사적을 기록한 『내반원기(內班院記)』가 남아 있다.
내반원기엔 삼국시대 이래 내시들의 전기를 기록한 「동환열전(東宦列傳)」과 중국의 이름난 내시들의 사적을 기록한 「고래명환열전(古來名宦列傳)」이 수록되어 있다.
필자는 5월 25일자 시사신문에 군부대 각개전투교장의 묘역 훼손에 대해 투고 한 바있고, 11월 10일에는 문화일보에 북한산 내시묘를 소개하여 외부에 알린 바 있다.
현재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내시묘로는 양주(楊州) 효촌리(孝村里)에 있는 선조(宣祖)조에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른 김계한(金繼韓)을 시조(始祖)로 하는 연양군파(延陽君派)의 직계 후손 8위의 묘가 있고, 노원구 월계 2동 인덕대학 뒷산인 매봉산에 통훈대부(通訓大夫) 내시부(內侍府) 상세(尙洗: 정6품)를 지낸 김계한의 손자 승극철(承克哲)의 묘 정도가 알려진 정도이다.
그동안 우리 나라 최대의 내시묘역으로 언론에 부각되면서 지난해 3월 사적 440호 ‘초안산 조선시대분묘군’으로 지정된 초안산(楚安山) 묘역은 필자가 두차례 현장답사를 거쳐 조사해본 결과 내시묘역이 아닌 사대부에서 서민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의 무덤이 조성된 곳임을 확인했다.
따라서 북한산 내시묘는 중국에도 남아 있지 않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 되고 가장 크며 보존 상태가 양호한 서울에서 유일한 내시 집단묘역임이 입증된 셈이다.
우리 고장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인 내시묘역이 하루 빨리 국가 사적(史蹟)으로 지정받아 보호받을 날을 고대해 본다.<박상진- 내시와 궁녀, 비밀의 묻다의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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