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4대 미인 王昭君의 ' 春來不似春'
기원 전 이천여 년 전, 장량과 한신의 도움으로 항우를 꺾고 제위에 오른 유방에게 두통거리가 있었다. 북쪽의 유목민족 흉노였다.
그들은 가을겆이가 한창일 때면 국경을 넘어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마침내 한 고조 유방은 32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흉노족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게릴라전법으로 치고 빠지는 흉노의 기마병을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평성의 백등산에 포위되어 고전하다 가까스로 후퇴했다.
한 고조는 어쩔 수 없이 흉노와 불평등조약을 맺었는데, 그 조약 중 하나가 '한나라 공주를 흉노의 왕에게 시집보낸다'는 것이였다.
그 뒤 정략적인 이유로 흉노왕에게 시집가는 공주를 화번공주(花番公主)라 했다.
한나라 왕은 후궁 중에서 화번공주를 고르거나 신하의 딸을 양녀로 삼아 흉노왕에게 보냈다.
기원 전 33년, 한 11대 왕인 원제시대의 일이다.
흉노의 왕인 호안야가 화번공주를 요구했다.
당시 원제에게는 수 천명의 후궁이 있었다. 원제는 그 후궁을 일일히 기억할 수 없어 화공으로 하여금 초상화를 그려 오도록 해 그 중 아름다운 여인을 골라 잠자리를 같이 하기 일수였다.
원제는 화공이 그려 온 초상화 중 가장 추하게 생긴 여인을 골라 흉노왕에게 시집 보내기로 결심했다.
원제와 흉노왕은 화번공주로 선정된 여인이 나타나자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글자그대로 천하일색의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미인이 서시, 초선, 양귀비와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으로 유명한 왕소군이다.
<왕소군>
왕소군은 16살의 나이에 후궁으로 궁중에 들어 왔다.
원제의 후궁들은 초상화가 아름답게 그려져 왕의 선택을 받기 위해 화공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가난해 돈이 없는데다 미모에 자신을 가진 왕소군은 화공을 찾아가지 않았다.
괘씸하게 생각한 화공은 왕소군의 얼굴을 추하게 그렸다. 어떤 기록에는 보기 싫은 점
을 얼굴에 넣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미인이 흉노왕과 함께 떠나가자, 원제는 화가 치밀어 올라 왕소군의 초상화를 그린 화공 모연수를 참형에 처했다.
중국의 북쪽 변방인 흉노까지 가는 길은 너무 황량했다. 민가는 물론 나무도 별로 없는 황무지를 가며 왕소군은 비파로 슬픈 마음을 달랬다.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이 소리를 듣고 날개짓을 못한채 땅에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부터 왕소군을 '낙안(落雁)미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흉노왕 오안야가 죽자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르며 왕소군의 미색에 홀려 아내로 삼았다
는 기록도 있고, 아비와 아들의 아내가 된 것을 비관,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오랑캐족에게 강제로 시집간 천하일색의 왕소군은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쓸쓸하게 죽어갔다.
지금까지 전해 오는 왕소군에 관한 슬픈 시 두 수가 있다.
<昭君怨(소군원)> - 동방규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자연히 옷 띠가 느슨해지니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이는 허리 몸매 위함이 아니었도다.
<昭君怨(소군원)> - 이백
昭君拂玉鞍(소군불옥안) 소군이 옥 안장을 떨치며
上馬涕紅頰(상마체홍협) 말을 타니 붉은 뺨에 눈물이 흘러
今日漢宮人(금일한궁인) 오늘날 한나라 궁녀가
明朝胡地妾(명조호지첩) 내일 아침 오랑캐의 첩이 되는도다.
이백의 <소군원>은 소군이 한나라 궁을 떠나 흉노의 땅으로 출발하는 때의 비애(悲哀)와 정경(情景)을 묘사하였고, 동방규의 <소군원>은 흉노 땅에 도착한 후 황량한 풍토에서 맞는 상심(傷心)과 망향(望鄕)의 슬픔으로 나날이 수척해 가는 가련한 모습을 보여 절절하게 표현한 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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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소군조각상을 너무도 아름다운 9등신 미녀로 조각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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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세에 세상을 떠난 왕소군은 흉노의 땅에 묻혔는데 겨울에 초목이 시들어도 그의 무덤에있는 풀만은 푸르름이 시들지않아 청총(靑塚)이라 이름 지었다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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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우와 왕소군의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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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소군묘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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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소군묘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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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위에서 내려다본 전경 |
오늘 날의 우리 현실을 흔히 '춘래불사춘'이라고 말한다.
금융위기에서 비롯된 세계적인 경제난은 어쩔 수 없다고 하자.
그러나, 당리당략의 노예가 되어 '깽판 국회'라고 불리워지는 의사당을 생각하면 너무도 울분이 치솟는다.
봄이 왔으되 봄같지 않은 현실 속에서 역사상 기록에 전해 오는 사실을 위정자들에게 알려 주고 싶다.
1422년, 세종 즉위 4년되던 해였다. 흉년이 계속되자 세종은 '구황정책'을 폈다.
신하들에게 백성들의 곤궁한 사항을 최우선으로 다루도록 지시한 것이다.
1783년, 정조 7년의 일이다.
각 지방마다 기근으로 백성들의 삶이 극도로 피폐했다.
정조의 탄신일이 되자 문무 신하들과 지방수령들로부터 축하가 잇따랐다.
정조는 "내가 한결같이 걱정하는 것은 백성들 뿐이다. 백성들이 신음하는데 무슨 축하란 말이냐?"고 꾸짖었다.
금뱃지를 차고 자랑스럽게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니는 국회의원들이 몇이나 되는가?
정치인들이여 ! !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2008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