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의 가치를 담다, 도산서원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 신작로처럼 잘 다져진 흙길을 밟는 기분이 좋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길을 밟으며 세상의 이치를 구했을까. 길 왼편으로 울창한 단풍나무가 신록의 기운을 뿜어낸다. 눈과 마음이 신록에 빠져 호사를 누리며 걷기 시작한 지 10여 분, 도산서원 앞마당에 닿는다. 마당 맞은편에 천광운영대와 천연대가 있다. 두 곳 모두 퇴계 이황이 명명한 것으로 강을 마주한다. 막힘없이 시원한 풍광이다. 강 건너에 섬처럼 둔덕을 쌓아 지은 작은 건물 한 채가 보인다. 시사단이다. 1792년 정조가 이황을 추모해 서원 앞 소나무 숲에서 치른 과시를 기념하는 장소이다. 강물에 반영된 시사단의 모습이 이채롭다.

퇴계 이황은 조선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교육자, 시인이며 정치인이었다. 화려한 이력을 가졌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그는 정치인보다 철학자, 특히 성리학자로 더 잘 알고 있다. 그는 관직 생활을 오래 하지 않았다. 중종 29년(1534)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관직에 올라 승진을 거듭하면서 성균관대사성까지 지냈다. 하지만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부모 봉양을 명분 삼아 낙향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됐으나 번번이 다른 이유를 들어 고사했다. 서원 주변을 돌아 보니 퇴계의 마음이 조금은 헤아려진다. 최소한 여긴 정쟁 보다 고요함이 있지 않은가.

도산서원은 1574년 퇴계의 제자와 지역 유림이 건립한 성리학 교육 시설이다. 선조 8년(1575)에 왕이 현판을 내려 사액 서원이 됐다. 도산은 서원이 있는 산 이름이다. 서원은 강학 공간인 전면부에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등이 있고, 후면부에 제향 공간인 상덕사와 전사청이 있다. 도산서당은 퇴계가 4년에 걸쳐 구상해 지은 건물로 기교 없이 소박하다. 그 는 여기서 학문에 몰두했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책으로 가득했던 거처 완락재와 마루 암서헌은 퇴계가 지향했던 선비의 삶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완락재는 ‘완상하여 즐기니 족히 여기서 평생 지내도 싫지 않겠다’라는 뜻이다. 눈여겨 볼 것은 암서헌에 덧붙인 평상이다.

이것은 제자인 이덕홍의 조부 이현우의 집에서 본 것을 본떠 만든 것으로 퇴계는 “모름지기 선비는 저리 살아야 한다”라며 검소함에 감탄했 다고 한다. 결국, 이 평상은 퇴계가 무욕의 선비로 살 수 있도록 이끌어준 말 없는 스승인 셈이다. 퇴계가 머물던 도산 서당과 달리 ‘공(工)’자 모양으로 지은 농운정사는 꽤 화려하다. 제자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이곳은 원래 뒷방까지 햇볕이 잘 들지 않아 민가에서 꺼리는 형태이다. 하지만 퇴계는 처마를 짧게 해서 볕이 잘 들도록 하는 등 손수 설계도 를 그리면서까지 ‘공(工)’자 모양을 고집했다고 한다. 이 모양의 건축이 기숙사로 적합한 데다 ‘공부(工夫)한다’라는 뜻을 잘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현판은 퇴계의 친필이다. 서원의 중심 건물인 전교당은 선조 7년(1574)에 건립된 대강당이다. 현판은 명필 한석봉의 글씨이다. 제향 공간인 상덕사는 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이곳에 퇴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울창한 자연 속에 파묻힌 듯 숲으로 둘러싸인 도산서원이지만, 서원의 건축물만큼은 퇴계의 성품을 본뜬 듯 소박하고 간결하며 올 곧다. 이 같은 퇴계의 정신은 훗날 한국의 서원이 하나의 독창적인 유형으로 정립되는데 큰 밑그림이 됐으며 나아가 병산서원 등 8개 서원과 함께 2019년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배경이 됐다.

물길이 마을을 휘감아 도는 하회마을

안동 하회마을은 1999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가장 한국다운 곳’이라며 극찬한 바 있다. 그 이후 하회마을은 문지방이 닳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하회(河回)라는 이름은 낙동강이 태극 모양을 그리듯 마을을 휘감고 돌아가는 모습에서 따온 것이다. 2010년 7월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유네스코로부터 ‘한국의 역사마을’로 인정 받아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마을의 모든 길은 삼신당의 신목으로 향한다. 신목은 수령이 600여 년 된 느티나무로 이 곳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낸다. 마을의 집들은 이 신목을 중심으로 강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전통 마을처럼 집들이 일정하게 정남향이거나 동남향이 아니다.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가 600여 년간 대를 이어 살아온 동성마을이다.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겸암 류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형제가 태어난 곳이다. 따라서 마을에서 챙겨볼 만한 것 들은 그들과 연관된 곳이 많다. 먼저 보물 양진당은 겸암의 종택으로 풍산 류씨의 대종가이다. 사랑채에 걸려 있는 현판 ‘입암고택’은 그의 아버지 입암 류중영의 호에서 따 왔다.

높은 축대 위에 지어진 사랑채는 고려 건축양식을, 안채는 조선 건축양식에 따라 지었다. 이처럼 두 왕조의 건축양식을 모두 품고 있어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종가의 위엄이 느껴진다. 집의 이름을 뜻하는 당호는 ‘양진당’이지만, ‘입암고 택’이라 부른다. 양진당은 겸암 류운룡의 6대손인 류영공의 아호이다. 보물 충효당은 서애의 종택이다. 하지만 서애는 이 집에서 태어나지도, 살지도, 운명하지도 않았다. 그는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 집에서 나고 자랐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뒤 마을에 수해가 들자 가까운 풍산읍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삼간 초옥을 짓고 살다 별세했다. 충효당은 그의 문하생과 지역 사림이 서애의 유덕을 추모하며 건립했다. 현재 사랑채, 안채, 행랑채를 포함해 52칸이 남아 있다. 당호 ‘충효당’은 생전 서애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나라에 충성 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라는 가르침에 따라 지은 것이다.

충효당 앞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심은 나무가 있다. 20년 이 훌쩍 지난 덕에 나무가 제법 우람해졌다. 솟을대문 안으로 발을 들이면 고택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래된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다. 사랑채를 에둘러 지나면 다양한 유물과 유품을 전시한 영모각을 만난다. 고샅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발길이 만송정 숲에 닿는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숲은 겸암이 젊은 시절 조성한 것으로 마을의 서쪽 지기가 약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심은 비보림(裨補林)이다. 지리와 풍수를 허투루 하지 않는 조상들의 세심함이 엿보인다. 송림은 울창한 만큼 그늘도 넉넉하다. 더군다나 강바람이 솔솔 불어오면 피서지로도 그만이다.

송림 앞에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그 뒤로 높다란 절벽이 우뚝하다. 부용대이다. 강을 건너 언덕에 오른다. 마을 전체를 오롯이 조망하기 위해서이다. 가파른 숲길을 지나 64m 높이에 있는 부용대 꼭대기에 오르자, 순간 하늘이 열리고 낙동강과 하회마을이 한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드넓게 나타난다. 부용대는 깎아지른 절벽인 터라 끝자락에 서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하다. 몇 날 며칠 동안 비가 오지 않아 강이 메말랐지만, 고즈넉한 마을의 정취만은 변함없다. 낙동강이 휘감아 도는 마을의 정경은 마치 생생한 마을 안내 지도를 보는 듯하다. 와가(瓦家)와 초가(草家)가 어우 러진 정감 어린 풍경, 그 모습에 취해 한참 동안 머문다.

부용대는 중국 고사에서 따온 것으로 연꽃을 뜻한다. 하회마을의 지형을 ‘연화부수형’이라 부르는데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이라는 뜻이다. 부용대 아래에는 서애가 학문연구와 제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지은 옥연정사와 겸암이 지은 겸 암정사, 그를 주향으로 모신 화천서원이 있다.

끝으로 하회탈춤으로 알려진 하회별신굿탈놀이까지 챙겨 보면 더 아쉬울게 없다.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이 탈놀이는 무료 공연이다. 하회탈은 원래 12개였으나 현재 9개만 전해온다. 그나마 다른 탈놀이에 비해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보통 탈놀이를 마치면 불태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하회탈은 그렇지 않다. 게다가 하회탈은 종이나 박이 아닌 오리나무로 만들어 색을 입히고 옻칠을 2번 이상 할 정도로 매우 정교하게 만들었다.

최고(最古)의 목조 건축물을 품은 봉정사

울울창창 쭉쭉 뻗은 소나무 숲길 속에 명옥대가 다소곳하다. 숲속에 자리한 터라 사람들이 잘 찾지 않지만, 이곳은 퇴계가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 현종 6년(1665)에 사림이 건립한 누각 형태의 정자이다. 원래 이름은 ‘낙수대’였으나 유가형의 시에 나오는 ‘솟구 쳐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 내리네’라는 글귀에 따라 ‘명옥대’로 이름을 고쳤다.

1999년 4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하회마을과 함께 방문한 이 절은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승려 능인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 온다. 문루인 만세루의 색 바랜 나뭇결에서 오랜 세월의 풍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특히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국보 극락전 앞에 서면 그 무게감이 예사롭지 않다. 국보 대웅전 역시 고려말·조선초 건축양식이 두루두루 조화를 이룬 건축물이다. 대웅전 옆에 있는 보물 화엄강당과 극락전 옆 보물 고금당은 같은 시기에 같은 목수가 지은 것으로 조선 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봉정사의 건축물들은 고려 중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이어져 온 목조 건축물의 다양한 특징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극락 전 앞마당에는 삼층석탑과 돌무더기 탑이 있다. 그중 돌무 더기 탑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돌을 얹으며 소원을 빌어 유명해졌다. 봉정사는 산사 특유의 고풍스러움과 정갈하면서도 아기자기한 모습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래서 불교 건축물이나 문화재 관련 전문 식견이 없어도 경내를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천년을 이어온 정신의 뿌리는 예나 지금이나 안동을 감싸 안고 흐르는 낙동강처럼 도도히 흘러간다.

글, 사진. 임운석(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