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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믿음의 장소, 인왕산 선바위와 국사당
글쓴이 문화재방송.한국 등록일 [2021.12.03]

믿음의 장소, 인왕산 선바위와 국사당 인왕산은 서울의 대표적 명승지요 왕의 기운이 서린 곳으로 알려졌으며 불교와 무속의 성지이고 조선 문인들의 창작터였다. 인왕산은 언제나 변함없이 사계절의 옷만 갈아입으며 현재까지 서울의 명승지로 자리하고 있지만 변화무쌍한 인간들은 이름난 인왕산을 중심으로 정치와 종교, 문화를 성하게도 하고 쇠하게도 했다. 시대마다 사람의 필요에 따라 생성되고 발전했던 ‘인왕산 무속 문화’를 선바위와 국사당 무신도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01.<인왕산 선바위>, 서울시 민속자료 높이 7~8m ©서울특별시

왕의 기운이 깃든 곳(王氣說)이자 조선 문인문화의 중심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태조 이성계는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여 경복궁을 건립하고 인왕산을 조선 왕실 우측에서 보좌하는 내사산(內四山; 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 중 하나로 삼았다. 조선의 궁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지리적 위치로 인왕산 인근에는 왕실 일원들과 사림(士林)의 거주지, 모임터가 많았다. 특히 인왕산은 중종과 선조의 잠저(潛邸)가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왕의 기운이 깃든 곳으로 간주되었다.


인왕산은 도성 내 풍광이 뛰어난 곳으로 조선 문인들이 아회, 문회, 시회(詩會) 등으로 모인 곳이며 문인문화의 중심지가 되기도했다. 특히 조선후기 위항문인(서울을 중심으 로한 중인 출신 문인)들은 그들의 집거지인 인왕산 서촌 옥인동 송석원 등에서 시문서화를 제작하고 즐기면서 그곳을 고상한 모임터로 만들었다. 정선은 인왕산을 주제로 〈인왕 제색도〉, 〈인곡유거도〉 등의 명작을 남겼으며, 1791년 47세 김홍도는 송석원의 시회 광경을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 園詩社夜宴圖)〉라는 작품으로 남겼다.


그리고 한양 불교와 무속의 성지

인왕산은 조선 명작의 탄생 공간이기 이전에 한양의 불교성지였다. ‘인왕(仁王)’은 본래 금강역사(金剛力士)라는 뜻으로 사찰 입구에 있는 수호신이다. 그 때문에 인왕산은 방위신인 좌청룡처럼 서쪽에서 조선 왕실을 지켜주는 수문장 역할을 했다. ‘인왕산’은 인왕사(仁王寺)에서 비롯되고, 선승들의 수도처인 금강굴(金剛窟), 세조 때 지은 복세암(福世菴), 궁중의 내불당(內佛堂) 등 도성의 내사산 가운데 사찰이 가장 많았다. 현재에도 선바위와 국사당 아래 인왕사 주변의 집들은 거의 사찰 간판이 걸려 있어 ‘절 마을’로 불린다. 보통 ‘선바위’는 ‘서 있는 바위[立石]’로 불리지만 인왕산 선바위는 뒤에서 보면 스님이 장삼을 입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참선할 ‘선(禪)’자를 써 선암(禪巖)이라고 한다.


처음엔 기이한 암석에 정령이 있다고 믿고 숭배하는 민간신앙터였지만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기도했기때문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다는 설화로 하여금 두 개의 큰 바위는 무학대사와 이성계 또는 이성계 부부라 전해지고 있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한양의 도성 경계에 대하여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주장 대립으로 고민하였는데 그 와중에 인왕산에 내린 눈이 선바위를 경계로 안쪽은 녹고 바깥쪽은 녹지 않아 안쪽으로 성을 쌓았다.


“선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가도록 성을 쌓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던 무학대사의 뜻이 좌절되었으며 그때 무학대사는 “이제 중이 선비의 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게 되었다”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불교와 유교의 대립으로 해석할 수 있고, 결국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는 지고 유교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시작을 예시하는 전설로 이해할 수 있다. 민간설화에서는 ‘선바위는 인간이 죽어서 석불 (石佛)이 된 것’이라고 믿고 이 바위에 빌면 소원성취할 수 있다고 하여 일찍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02.김홍도, <송석원시사야연도> (인왕산 송석원), 1791년 ©한독의약박물관 03.<무학대사>, <아태조(이성계)>, <최영장군>무신도 ©인왕산 국사당

인왕산 국사당의 무신도(巫神圖)

국사당은 무신당으로서 굿을 행하는 곳이니 바로 옆에 있는 선바위와 복합적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국사당에는 태조와 왕비 강씨 부인상, 무학대사, 나옹화상, 최영 장군, 산신, 용왕신, 칠성신, 삼불제석 등이 모셔져 있다.


태조 이성계부부상과 고려의 국사인 나옹화상과 조선의 국사인 무학대사의 복식은 그들의 성격에 맞게 묘사했다. 또한 태조상과 아울러 가장 강력한 효험을 지닌 신으로 알려진 최영장군상도 무속의 성지 개성 덕물산 최영장군당의 최영상을 모티브로 삼아 고려 말 무신(武臣)의 복장과 기물을 표현하였다. 살아 생전에 이성계와 최영은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했던 인물들이다. 그러나 죽어서는 최영의 목숨을 앗아간 이성계는 조선의 건국자로 숭배되고, 목숨을 잃은 최영장군은 고려의 영웅이자 최고의 장군신으로 각각의 긍정적 면모를 부각시켜 나란히 신앙되었다. 이처럼 역사와 신앙의 아이러니는 무속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인왕산의 ‘仁王’이 금강역사인 불교 용어라 조선의 사대부는 ‘王’자에 ‘日’자를 붙여 ‘仁旺山’이라 표기했다고 한다. 국사당의 ‘국사’는 본래 천신의 하강터인 ‘마루’의 의미지만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전설이 있는 선바위 아래로 터를 잡으며 ‘임금의 스승’으로 인식되어 국사당의 의미와 성격이 변한다. 인왕산은 뛰어난 풍광과 지리적 환경으로 왕실과 국왕을 보필하는 인격화된 산이 되었고, 기이한 형태로 영험함이 부여된 선바위는 온갖 고난과 역경에 처한 백성을 위로하고 그들의 의지처가 되었다. 그리 보면 인간은 불변 하는 자연물에 의미를 부여해 믿음의 대상과 공간을 특정 하면서도 정치, 사회, 문화 등의 변화에 따라 인문환경을 주도하는 능력자가 아닐까.


*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연구를 참고하였다. 허경진, 「인왕산에서 활동한 위항시인들의 모임터 변천사」, 『서울학연구』 13, 1999, pp. 87-152; 황인규, 「仁王山寺와 無學大師」, 『한국선학』 22, 2009, pp. 239-272; 정연학, 「서울 국사당의 역사적 변천과 기능」, 『서울민속학』 5, 2018, pp. 87-151. ; 강영주, 「19세기 말~20세기 전반기 최영장군 신앙과 무신도 연구」, 『한국민화』 11, 2019, pp. 58-97.




글. 강영주(문화재청 인천공항T1 문화재감정관실 문화재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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