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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역사의 굴곡진 흔적을 따라 걷다 호국의 섬, 강화도
글쓴이 문화재방송.한국 등록일 [2020.12.07]

역사의 굴곡진 흔적을 따라 걷다 호국의 섬, 강화도 바람 참 모질고 거칠다. 그 탓에 나뭇가지에 붙어 있던 마지막 잎마저 나무와 이별을 고하고 바닥에 나뒹군다. 삭풍에 떨어진 낙엽이 차곡차곡 쌓이듯 역사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하나의 풍경이 된 섬이 있다. 바로 호국의 섬이라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강화도이다. 선사부터 근현대사까지 이어 온 역사의 긴 그림자를 찾아 강화도에 선다. 00.덕진진에 소속된 남장포대


강화도는 해상교통과 군사적 요충지였다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 강화도. 수도권에 자리해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의 섬 체험 여행지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강화도의 참모습은 낭만적인 풍경에 있지 않다. 오히려 섬 속에 담긴 역사의 흔적 속에서 강화도의 진면목을 찾을 수 있다.


인천 강화도는 동쪽에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경기 김포시와 접해 있다. 강화해협에 유입되는 강은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여럿이다. 그래서 강화도를 ‘여러 강을 끼고 있는 아랫고을’이라는 뜻의 강하(江下)라고 불렀다.


강화도는 지리적으로 고려의 수도인 개경, 조선의 수도인 한양과 가깝다. 조선시대에는 강화해협이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급부상했다. 삼남 지방의 세곡선(稅穀船)이 이 해협을 거쳐 한강으로 진입하여 한양으로 들어갔다. 그뿐만 아니다. 강화해협은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강화해협은 폭은 좁지만, 물살이 매우 거칠고 세서 해상으로 침입하는 적을 막는 나성(羅城)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강화해협에 있는 광성보에 안해루가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안해루는 ‘바다를지킨다’는 뜻이다.

01.고려궁지에 지은 외규장각 02.강화산성 북문 성곽에 오르면 개성 땅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대몽항쟁의 거점이 된 강화도

강화도에는 고려 왕실의 궁궐터가 있다. 1232년 몽골의 침입을 피해 옮겨온 것이다. 지금은 남아 있는 건물이 없지만, 궁궐터에 세워진 조선시대 강화유수부 건물을 확인할 수 있다. 사적 제133호 강화 고려궁지는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긴 1232년부터 1234년까지 지은 궁궐이다. 고려 왕실은 이곳에서 1270년 환도하기 전까지 대몽항쟁을 벌였다. 그 당시 고려 왕실은 정궁 이외에도 행궁·이궁·가궐 등 많은궁궐을지은것으로보인다.그가운데 강화읍 관청리 부근은 정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궁궐의 정문은 승평문(昇平門)이었고, 그 양쪽에 삼층으로 된 대문 두 개와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


고려 왕실은 이곳에서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큰 행사를 잊지 않고 거행했다. 국난을 맞은 시국에 행사를 축소할 법도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고려궁지 뒷산을 송악산이라 부르며 개경에서 누리던 호사를 강화도에서도 고스란히 누렸다. 하지만 막상 고려궁지를 찾으면 실망이 앞선다. 궁궐이 있던 곳이라 하기엔 그 규모가 매우 작은탓이다. 강화의 고려 궁궐은 1270년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모두 허물어졌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궁지에 행궁을 지었으나 역시 병자호란때 청군에 함락되어 소실되었다.


그 이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와 제26호로 지정된 동헌과 이방청 등이 남아 있다. 동헌은 1627년 정묘호란 당시 강화도로 피신한 인조가 강화도를 다스리는 관리의 관직을 정2품직 유수로 승급시켜 그때부터 조선 말기까지 강화유수가 근무하던 곳이다. 동헌에 걸린 현판은 조선 후기 예조판서 등을 지낸 명필 윤순이 쓴 것이다. 동헌 안에는 강화유수의 집무 장면을 모형으로 재현해놓았다.


동헌을 지나 왼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탁 트인 잔디밭에 단아한 건물 한 채가 보인다. 1782년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한 왕립도서관,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인 외규장각이다. 이곳에는 주로 역대 왕들의 글과 글씨, 어람용 의궤와 주요 서적, 왕실 관련 물품 등 1,000여 권의 서적을 보관했다. 그러나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 의궤를 비롯한 359권의 서적을 약탈당하고 수천 권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2010년 G20 정상회의 협약으로 145년만인 2011년 우리 품으로 돌아왔지만, 임대 형식이어서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03.사적 제132호 강화산성 북문 04.강화성당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을 따라 지었다.



강화도 원도심에 자리한 역사의 흔적

고려궁지에서 내려와 강화초등학교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언덕 위에 지은 푸른색 한옥을 마주한다. 사적 제424호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다. 동서 길이 10칸, 남북 길이 4칸인 한식 중층건물인 이 성당은 1900년에 지어진 것으로 직사각형의 기다란 형태이다. 언뜻 배 모양을 본 떠 지은 것처럼 보여 노아의 방주가 연상된다. 특이한 점은 외관은 한국 전통 사찰 건축 양식을 따랐다는 것이다. 외삼문과 내삼문, 동종 등이 좋은 본보기이다. 반면에 내부 공간은고대로마의 공공건물 건축양식으로 많이 쓰였던 바실리카 양식을 따랐다.


당시 외세와 이방 종교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던 강화 주민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방법으로 여겨진다. 미사가 없을 때는 실내까지 관람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화려한 샹들리에이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는 물론이고 엄숙함까지 느껴진다. 흑백사진과 손때 묻은 목제 의자에서는 예스러움이 느껴진다. 사진 가운데에는 갓을 쓴 신도의 모습도 있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의 모습도 있다.


강화성당 아래 다닥다닥 붙어 있는 민가 틈에 꽤 규모가 있어 보이는 한옥이 있다. 조선 제25대 임금 철종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용흥궁이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인 용흥궁은 원래 초가였던 것을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철종은 1844년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 헌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강화도에서 유배 생활하던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헌종이 후사가 없었기에 가능했다. 철종은 고조할아버지가 영조이고, 증조할아버지가 사도세자인 왕족이었다. 하지만 세도가들은 철종을 강화도령이라 비하했다. 그 당시 조선은 왕실의 외척 세력이 권세를 잡고 휘두르는 세도정치가 극에 달했으며 왕권은 바닥에 떨어졌고 삼정은 문란하여 전국 각처에서 민란이 일어나는 등극도의 혼란상태였다. 초가였던 집이 용흥궁으로 변한 것을 보고 있자니 인생사 새옹지마와 같지 않은가.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살다 간 철종의 용흥궁을 뒤로하고 강화산성으로 향한다.


사적 제132호 강화산성은 1232년 축성한 강화의 도성이다. 축성 당시 내성·중성·외성으로 쌓았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돌로 쌓은 내성뿐이다. 강화산성은 몽골의 침략을 막기 위한 천혜의 요새였는데 여기엔 강화해협의 거센 물살도 한몫했다. 그래서 몽골은 1259년 화친을 요구하며 내·외성을 모두 헐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결국 강화산성은 헐리고 만다. 현재 남은 내성의 둘레는 약 1.2km로 최근 복원된 동문과 서문·남문·북문이 남아 있다.


성문 가운데 북문은 북산(140m) 등산로와 연결되어 탁 트인 풍광을 자랑한다. 풍광의 주인공은 한강과 염하가 만나는 강화해협이다. 시선을 더 먼 곳으로 향하면 그곳은 눈으로만 볼 수 있을 뿐 갈 수 없는 북녘 개성 땅이다. 고려시대 몽골에 맞섰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병자호란을 맞아 청과 대치한 곳이 강화산성 북문이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동족끼리 대치하고 있어 개성과 강화는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서로 닿지 못한 채 속절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다.안타까운 마음을 내려놓고 강화도 동쪽 해안으로 발길을 옮긴다.

05.철종이 즉위하기 전 살았던 용흥궁



강화해협을 따라 걷는 호국돈대길

강화도에는 걷기 좋은 ‘강화 나들길’이 있다. 볼품없는 겨울이지만 길 이름에서 여행의 설렘이 느껴진다. 강화 나들길은 강화도 본섬과 이웃한 교동도, 석모도를 아우르며 총 20개 코스가 마련되어 있다. 그 코스는 총 310km에 이른다. 코스가 다양한 만큼 강화도의 역사, 자연, 문화 등 그 속에 담긴 이야기도 다채롭다. 그 가운데 2코스 ‘호국돈대길’은 강화도가 국방의 요충지임을 실감할 수 있는 길이다.


호국돈대길은 해안을 따라 이어진다. 해안 둑길을 걷기도 하고, 갯벌을 벗하여 걷기도 한다. 해안 길이라 지루할 것 같지만 더러 야트막한 산길을 걸으며 호젓한 재미를 더한다. 하지만 한순간에 만들어지는 길이 없듯 호국돈대길 역시 오랜 격랑의 역사가 길섶에 켜켜이 쌓여 있다. 호국돈대길은 총길이 17km이며 5시간 남짓 걸린다. 겨울이라 전 구간을 걷기가 쉽지 않다면 강화도 동쪽 해안도로를 따라 차량으로도 이동할 수 있다.


호국돈대길은 강화역사관이 있는 사적 306호 갑곶돈대에서 출발한다. 갑곶돈대는 고려가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이곳을 갑곶이라 부르게 된 유래는 이렇다. 몽골군이 여러 차례 강화해협을 건너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자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며 한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갑곶돈대를 지나면 길은 강화해협을 따라 유유히 흐르듯 이어진다. 이윽고 용진진과 용당돈 대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용당돈대에는 돈대 가운데 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자라고 있다. 바람에 씨앗이 날려와 의도치 않게 자랐는지, 누군가가 뜻을 두고 심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모습이 무척 의연하다. 나라를 지키려 외적에 맞서 싸우던 선조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은 나무가 자란 곳이 돈대이기 때문이리라.


이후 길은 끝없는 갈대밭으로 이어진다. 갈대가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춤사위를 보는 듯하다. 어디 그뿐인가. 갈대끼리 부딪쳐 이는 소리는 냉한 가슴을 더 서늘하게 할 만큼 스산하다. 길을 걷는 동안 화도돈대와 오두돈대를 거쳐 광성보에 다다른다. 사적 제227호 강화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서 신미양요의 가장 처절한 현장이었다. 초지진에서 광성보에 이르는 강화해협은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던터라 힘없는 나라의 힘없는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이 그 어느 곳보다 한스럽게 남아 있다.


유속이 빠른 손돌목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전략요충지였는데 그곳을 지키는 곳이 용두돈대이다. 용두돈대에서 내려다보는 손돌목은 명량해협의 울돌목에 견줄 정도로 물살이 거칠다. 용두돈대에서 언덕을 오르면 신미양요 당시 미군과 백병전을 치른 손돌목돈대에 닿는다. 이곳에서 조선군은 목숨을 바쳐 항전했지만, 최신 무기를 앞세운 미군에 맞서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한마디로 적수가 되지 못한 조선군은 450여 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참패했다. 광성보에는 당시 전사한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무명의 용사를 기리는 비각이 여럿 있다. 그래서일까 지금까지 거쳐 온 다른 진과 돈대에 비해 마음이 숙연해진다.


어느새 길은 사적 제226호 강화 덕진진에 이른다. 덕진진은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지휘하는 곳으로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진 곳이다. 그런 만큼 이곳 역시 신미양요의 격전지 중 한 곳이다.


이윽고 길은 호국돈대길의 마지막 지점에 이른다. 사적 제225호 강화 초지진이다. 조선 효종 6년(1655년)에 설치된 초지진은 강화해협의 진입로라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사건 등 국난의 시작점이자 참화를 감내해야 할 호국의 전초기지였다. 지금도 당시 포화의 흔적이 성벽과 아름드리 나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강화도는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1,000여 년의 세월 동안 역사상 가장 중요한 국방의 요충지였다. 특히 고려 왕실은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으며 조선시대 역시 고려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임시 수도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것이 강화도가 여느 섬과 구별되는 특별한 이유이다.

여행 정보 즐길 거리 # 강화 평화전망대 | 북한 땅과 민가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가을에는 추수하는 북한 주민을 망원경으로 볼 수 있다. 군사분계선에 인접한 곳이라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하고 방문객 차량 출입증을 받아야 입장할 수 있다. # 옥토끼 우주센터 | 우주와 공룡, 로봇과 과학체험을 통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는 곳이다. 실내에서는 과학전시물 관람 및 우주 엘리베이터와 중력가속도 체험 등이 가능하다. 야외에도 전망탑을 비롯해 공룡의 숲, 로봇공원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 강화풍물시장 | 오랜 전통을 지닌 강화장의 명맥을 잇는 전통시장이다. 강화의 특산물인 인삼, 화문석, 사자약쑥 등을 비롯해 곡물과 채소, 각종 건어물을 판매한다. 1층에는 농수산물과 활어를 구매할 수 있고 2층에는 다양한 먹거리를 내놓는 식당이 영업 중이다. 문의 고려궁지 032-930-7078, 광성보 032-930-7070 덕진진 032-930-7074, 갑곶돈 관광안내소 032-932-5464 초지진 관광안내소 032-937-9365 탐방 코스 ➊ 용흥궁~성공회 ➋ 강화성당~고려궁지~강화산성 ➌ 북문~갑곶돈~용담돈대~광성보~덕진진~초지진


글, 사진. 임운석(여행작가) 


출처:월간 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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