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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인천연안에 깃든 충혼, 수도 서울을 지키다
글쓴이 tntv 등록일 [2020.04.09]

인천연안에 깃든 충혼, 수도 서울을 지키다

발간일 2020.04.08 (수) 13:18
          



연 희 동

 

바람은 열린 곳으로 분다고 합니다. 바람이 부는 방향엔 길도 열려 있게 마련입니다.

인천시민을 사랑하는 인터넷신문 ‘i-view’가 새로운 기획 ‘바람결 따라 골목길 걸어’를 연재합니다. ‘바람결 따라 골목길 걸어’는 이 시대 인구 300만의 인천이란 도시의 속살을 만나는 특별기획입니다. ‘i-view’는 인천사람들이 살아가는 ‘우리 동네’를 하나하나 찾아가 그들 삶의 이야기와 자연을 만나고, 문화유산, 집, 전통시장 같은 공간과의 대화도 시도할 것입니다. 인천의 하늘 아래 우리 인천시민들이 발 딛고 살아가는 땅과 마을의 참모습을 그려보겠습니다. <편집자> 

연분홍 팝콘처럼, 툭 툭 망울이 터지며 피어난 벚꽃 길을 걸어간다. 계양산에서 내려온 봄바람이 벚나무 가지들을 훑고 지나간다. 벚꽃 잎들이 눈처럼 떨어져 흩날린다. 서곶근린공원과 서구 사계절썰매장 사이 4차선 도로, 심곡로가 벚꽃잎으로 뒤덮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들은 자리를 옮기어 다시 길가에 눕는다. 연희동에 봄이 흐르고 있었다.


계양산과 정서진의 가운데 자리한 서구의 중심 연희동(연희·공촌·심곡동)엔 과거 서곶면사무소가 있었고 지금은 서구청이 자리한다. 서부경찰서, 서부소방서, 서구보건소, 서인천세무서 등 주요 관공서가 밀집한 만큼 연희동은 서구의 중심상권이기도 하다. 아파트와 상가가 많지만 계양산 자락을 따라 우거진 녹음이 맑고 신선한 공기를 선물한다.

연희동 심곡로엔 지금 벚꽃이 만개했다.




개항기 병인·신미양요 겪으며 ‘연희진지’ 구축


연희동의 서쪽은 바닷물이 드나들던 갯벌이었다. 인천시 서구 연희로 42번길 서곶중학교 건너편 ‘연희진지’(連喜鎭址) 표지석은 과거 이 자리가 바다와 가까운 지역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진(鎭)은 왜적이 침투하기 쉬운 바다 근처에 설치한 특별행정구역으로 진영(鎭營)이라고도 부른 군사기구였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 등 서양함대의 침략과 계속되는 이양선 출몰로 위협을 느낀 고종은 도성과 가까운 인천연안 방비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적이 인천연안에 상륙해 부평로를 따라 진격할 경우 최단시간에 서울 도성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연희진지 표지석. 인천시 서구 연희로 42번 길(연희동 247번지) 계명공원은 인천연안을 방비하던 군사시설 연희진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이 됐다. 연희진지는 1879(고종16)년 설치됐다가 개항 전인 1882(고종19)년 없어졌다.

부평로는 한양도성을 출발, 양화진에서 한강을 건너 철곶포(양평동)~고음달내현(화곡동)~부평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었다. 강화도에 이어 1875년 영종도까지 점령당하며 수도 한양을 지킬 가깝고도 새로운 연안방어선의 구축은 시급한 현안이었다.


1879(고종16)년 고종임금은 연희진과 동구 화수동에 화도진 축조를 명한다. <서구향토지>는 ‘연희진이 연희포대 3좌(용두산 인근 용두포대), 갯말포대 2좌(원창동), 가정포대 1좌(봉우제), 가좌동 1좌 등을 관할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연희진은 연희동과 원창동, 가좌동 일대의 포대, 화도진은 만석동 괭이부리와 북성포, 제물포 등에 구축한 포대를 각각 관할했다. 포대를 설치한 어영대장 신정희는 신미양요 직후인 1874(고종11)년 강화 해안에 포대를 축조한 강화진무사 신헌의 아들이었다.



연희동은 서구의 중심으로 연희·심곡·공촌동 등 3개의 법정동을 묶은 행정동이다. 서구청별관13층에서 바라본 연희동 전경.




주민들의 피와 땀으로 쌓은 계양산 경명현의 ‘중심성’​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1880년(고종17) 인천의 개항이 결정되면서 1882(고종19)년 연희진은 폐지되고 화도진은 훈련도감 아래로 들어간다. 1883(고종20)년 10월, 고종은 연희진을 대신할 군사시설인 ‘중심성’ 축조를 명한다.


그렇게 지금의 서구와 계산동의 경계선인 경명현(징매이고개)을 중심으로 동서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171m, 서쪽으로 297m, 성문이 3m로 총연장 471m에 이르는 성이 건설된다.


경명현은 한강 하류 서쪽 평야지대 중심부에 위치해 서해의 관문이자 한양으로 향하는 교통, 군사상 요충지였다. 중심성에선 서쪽 해안선과 동쪽 인천시내, 한강하류까지 조망할 수 있었다. 당시 부평부사 박희방이 주민들의 성금과 노동력으로 건설했다는 의미로 중심성(衆心城)이란 이름을 붙였다.


연희감리교회는 연희동에서 초가집 형태로 1903년 예배를 시작,
지금까지 한 세기 넘게 연희동에서 기독교를 전파하고 있다.




중심성사적비, 비석은 사라지고 주춧돌만 서구청 보관​


지금 중심성 흔적을 찾기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1914년 허물어진 뒤 광복 후 성터에 남아있던 돌들을 미군들이 공사를 위해 가져갔다는 얘기만 전해져올 뿐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서구청에서 중심성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서구청 우측통로 앞 입구엔 무거운 주춧돌이 놓여 있다. 모서리가 둥글고 직사각형의 홈이 파인 주춧돌은 다름 아닌 ‘중심성사적비’를 떠받치고 있던 주춧돌이다. 중심성 성문 서쪽으로 20m 아래 서 있던 중심성사적비는 1950년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박물관이 불타면서 함께 소실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명현 산자락엔 주춧돌이 남아 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90년대 후반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 같은 사실이 ‘인천일보’에 보도됐고, 이후 한 달 만에 어느 석재상에 처박혀 있던 것을 찾아내 서구청으로 옮겨놓으며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됐다. 우툴두툴하게 표면이 거친 주춧돌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개항기에 나라를 지키고자 안간힘을 쓴 선조들 피땀의 응고체처럼 느껴져 가슴이 아려온다.

​중심성은 인천연안으로 들어오는 외적으로부터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계양산 경명현에 쌓은 성이다. 현재는 중심성사적비를 받치고 있던 주춧돌만 서구청에 남아 있다.​



군인들들 다녔던 군인길, 지금은 작은 골목길로 남아


연희동엔 ‘군인길’ 혹은 ‘군잇길’이라 불리는 길이 있다. 1903년 설립해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온 ‘인천연희감리교회’(서구 승학로 267, 심곡동)에 있던 작은 고갯길이었다. 삼거리였던 이 길은 서곶로를 따라 와서 서곶초등학교와 연희진 터로 이어졌다.


서곶로가 닦여지기 전 군인들은 이 지역의 중요한 교통로였다. 고려 때는 이 길을 따라 개경으로 향했고 조선시대엔 이 길을 타고 와서 연희진에서 계양산 옆 경명현을 지나 부평부, 서울로 갔다. 토지활용으로 길의 모양이 달라지긴 했지만 지금도 ‘군인길’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길을 내어주고 있다.


▲​
군인길 혹은 군잇길로 불리는 골목. 군인길은 예로부터 오가던 중요한 교통로였다.
개항기 연희진지가 구축되고 군인들이 많이 오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른쪽 골목이 군인길이다.


군인길이라는 명칭에 대해 김영덕 인천서구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은 “연희진과 함께 ‘용의머리 반도’ 끝에 용두포대를 만들고 이곳에 기연해방영이라는 병영을 설치하는 등 군사요충지였던 것과 관련이 깊다”며 “군사시설이 많다보니 군인들이 이곳으로 많이 다니면서 생긴 이름”이라고 말했다.


이원규 소설가는 “상급기관에서 연희진이나 용두포대로 긴급 전령이나 파발이 달려오고 달려가고 군 병력도 대오를 맞춰 이동했을 것”이라며 “지금은 도시개발로 가옥들 사이로 난 하나의 골목길로 남았다”고 말했다.


군사요충지였던 연희동엔 지난 2014년 제17회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주경기장으로 사용한 ‘인천아시아드 주경기장’이 들어섰다. 인천을 상징한 빛과 바람과 춤을 모티브로 설계한 인천아시아드경기장은 개·폐막식과 육상경기장으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인천아시아드 웨딩컨벤션’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연희진지 자리였던 계명공원 벤치에 앉아 봄바람을 맞는다. 바람이 150년 전 조선 군인들의 힘찬 구령소리를 싣고 왔다.

글·사진 I-View 김진국 총괄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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